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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Dec 07. 2023

연말 조직개편, 우리 팀이 통째로 날아갔다

Environmet _ 안전감 _ 1. 몰입

기업의 연말은 대개 시끄럽다. 기업의 크기나 규모 비즈니스 영역에 관계없이 이런저런 소문이 돌고 분위기는 붕 뜬다. 연말 이벤트 때문이다. 기업 간의 합병은 지극히 예외적이고 특수한 이벤트지만 기업의 연말 이벤트는 매년 반복된다. 평가, 승진, 조직개편 등등 구성원 모두가 직, 간접적 영향을 받는 초미의 관심사들이 집중되는지라 제아무리 워커홀릭이라도 이때만큼은 분위기에 편승해 일에서 손을 놓는다.


빠르면 11월 중순부터 조직은 들썩인다. 대부분의 업무가 10월까지의 실적을 중심으로 11월에 결산이 이루어지고 연말 분위기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 결과에 따라 연간 평가, 승진, 조직개편, 인사발령도 이어진다. 거기에 크리스마스를 포함한 연말 분위기까지 더해져 회사는 사실상 놀자판이 된다.


신년이 시작돼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다. 연말의 이벤트 후폭풍은 여전하다. 연례행사처럼 발표되는 조직개편으로 크고 작은 변화가 생기고 적응하느라 한 달이 후딱 간다. 변화가 큰 조직은 큰 대로 작은 조직은 작은 대로 어수선한 주변 환경에 휩쓸린다. 어찌저찌 다시 연간 목표가 세팅이 되고 본격적으로 돌아가기까지 과도기는 꽤나 긴 시간 동안 이어진다. 10월 말부터 2월 말까지로 농사로 치면 농번기나 다름없다. 그렇게 일을 좀 할만하면 더위가 찾아온다. 6월 말부터는 여름휴가 시즌에 접어들며 또 한 번 분위기가 들썩인다. 사실상 직장인의 일이란 게 1년의 삼분의 일 이상을 불안정하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임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면 하루 일상은 어떨까?

9시 출근, PC를 켜고 숨좀 돌리고 티타임을 갖고 메일을 처리하다 보면 점심시간이다. 11시 30분쯤부터 엉덩이가 이미 들썩인다. 이르면 40분, 늦어도 50분쯤에는 식당으로 향한다. 식사를 마치면 커피 한잔, 담배 한 대는 필수다. 13시 오후 업무가 시작되지만 아, 어쩌나 슬슬 졸리다. 괜히 일어서서 복도를 어슬렁거리거나 메신저로 잡담을 한다. 그래도 안되면 2차 담배타임, 티타임으로 20~30분을 그냥 흘려보낸다. 정신 차리고 업무에 집중할만하면 미팅이다. 펼쳐둔 노트에 낙서를 끄적이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난다. 생각해 보니 이 미팅에는 왜 참석했나 싶다. 자리로 돌아와 미뤄둔 업무 파일을 열고 얼추 집중할만하면 이런, 5시가 훌쩍 넘었다.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뜨니까'라고 중얼거리며 퇴근을 준비한다.


직장에서의 하루, 한 달, 일 년이 이런 식이라면 온전히 자신의 일에만 몰입 가능한 시간은 대체 얼마나 될까? 일하는 시간의 절대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시간당 생산성은 세계 최저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당최 기본적으로 일에 집중력을 발휘해 몰입을 할래야 할 수 없는 구조와 환경이 아닌가?


놀라지 마라. 권위의식에 쩔은 임원, 꽉 막힌 리더, 도무지 닮고 싶지 않은 선배, 잰 체하는 동료 따위 진짜 몰입을 방해하고 결국 회사를 떠나게 만드는 본질적 원인인 인간관계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 어쩌면 오늘날 회사 조직 그 자체가 업무의 몰입과 집중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 정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만화 [드래곤볼]을 보면 '시간과 정신의 방'이라는 신비한 장소가 나온다.

[드래곤볼] 시간과 정신의 방

중력도 더 세고 허허벌판뿐인 무(無)의 공간이지만 충분한 음식과 휴식공간이 제공된다. 그 어떤 방해도 없이 먹고 마시고 쉬면서 원하는 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련이 가능한 환상의 공간이다. 무엇보다 이 안의 1년은 바깥세상의 하루와도 같다는 점이다. 아 정말이지 이런 곳이 실제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치의 노력을 했을 뿐인데, 1년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셈 아닌가? 지금의 나라면 1년이고 2년이고 무조건 들어갈 텐데 말이다.


'시간과 정신의 방'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을 겪고 재택근무라는 신세계를 접한 이후 '시간과 공간'의 유연성을 확보하고 집중력을 손실하지 않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을 선제적으로 제시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만화적 발상이지만, 어쩌면 이 작품의 작가 도리야마 아키라는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 최고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지, 고도로 집중하고 몰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인간사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천재 또는 외계인이 아니었을까? 마치 2020년부터 시작된 팬데믹과 그로 인한 혼란, 변화의 거센 흐름을 내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 창의력에 영향을 주는 건 심리적 안전감이다. 즉, 자기가 속한 팀이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 하고, 팀원들에게 편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분위기일 때 창의력을 더 발휘할 수 있다.

[그들은 왜 사무실을 없앴을까] 브라이언 앨리엇

분명, 도리야마 아키라는 자신만의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드래곤볼]을 기획하고 그려냈을 것이다. 이토록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그의 작업 공간이 불안과 어수선함으로 점철되었을 것이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으므로.


뭐 당연한 이야기인데, 심리적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어야 일을 하든, 자리를 펼치고 눕든 뭔가를 시작할 수라도 있지 않겠는가?




불필요한 조직개편, 인사발령을 남발하지 말라

현직에 있을 때 나는 매년 팀 소속을 옮겼다. 적응할만하면 짐을 싸서 사무실을 옮기거나 팀 이름을 바꾸고 팀장이 바뀌는 일을 겪다 보니 연말이 다가오면 내년에는 또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앞서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대체 왜 이렇게 조직을 사람을 붙였다 뗐다 마치 레고 놀이 하듯 장난을 칠까? 조직개편 발령지에 뜬 의의 및 목적은 늘 같았다. 짝수해는 업무역량 강화, 홀수해는 다양성 제고. 무슨 돌려 막기도 아니고. 나는 지금도 매년 한해도 빠지지 않고 시행했던 대규모 조직개편의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인사팀이 일하는 흉내, 일 놀이를 하는 모양이라며 혀를 차는 사람들도 많았다.


변화도 좋지만 연속성도 중요하다. 급변하는 외부의 상황에 맞춰 즉시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 영역과 내부의 힘을 결집하고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안정성과 연속성을 최우선해야 하는 영역은 선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내년이면 어차피 바뀔 거 뭘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라는 체념이 어디선가 들려온다면, 당장 도망쳐라.

 


몰입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함께 제공하라

할 수만 있다면, '시간과 정신의 방'을 만들어라.

아? 여기는 만화 속 세상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좋다. 정 그렇다면 만화 속 한 장면보다 못한 현실 속 구성원들에게 몰입을 위한 자신만의 시간을 쓸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개인 몰입 공간을 만들어 제공하는 것은 어떤가? 아? 이건 돈이 든다고?


인간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일에 대해 몰입을 할 수 있는가? 의 문제는 그 일과 그 일을 수행하는 주체의 정합성, 예컨대 일의 재미, 의미, 성취감 등과도 관련되지만, 무엇보다 전제되어야 하는 요소는 최소한의 물리적, 정서적 환경을 갖춰주는 일이다.


수능을 앞둔 고3 교실 주변에 공사장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수업 시간 내내 공사소음이 울려 퍼지고 드릴의 진동이 바닥과 벽을 강타하고 먼지가 날아다닌다면, 제 아무리 수능을 코앞에 두고 공부에 올인하려 마음을 굳게 먹은 모범생들일지라도 온전히 공부라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을까?


아이디어는 확산과 수렴을 통해 구체화되고 현실화된다. 확산을 위해서는 열린 공간과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개활지가 필요하지만, 일단 확산된 아이디어를 수렴해 새로운 것을 연결해 내는 창의적 발상을 위해서는 혼자 몰입할 수 있는 집중의 공간 또한 필요하다.


공간 못지않게 시간 역시 중요하다. 시공간은 그 둘은 연결한 개념이다. 공간은 갖춰졌지만 시간을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면 반쪽 짜리다. 언제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유용하게 스스로를 위해 쓸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정서적 불안감은 크게 상쇄된다.


구글을 포함한 잘 나가는 빅테크 기업들이 20% 룰을 적용해 업무 중 일정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제도화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 잘함' 을 새롭게 정의하고 그에 맞게 보상하라

매일 야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사람이 대접받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그 잔재는 여전하다. '근면성실' 하면 반은 먹고 가는 인재상 역시 유효하다. 그런데 이제 시대가 변했다. 열심히 해서 되는 시대는 갔고 잘해야 하는 시대다.


할 줄 아는 것이 오직 시간을 많이 쓰는 것뿐인 사람들은 조직의 소중한 자산인 시간과 주변의 안정감을 잡아먹는 썩은 사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훨씬 적은 시간을 쓰고도 같은 퍼포먼스를 뽑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인재로 정의되어 인정받고 각광받아야 마땅하다.  


회사는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최고의 효율을 내는 사람을 '일 잘하는 사람'으로 정의해야 한다. 그들에게 실제로 높은 평가를 부여하고 승진시키고 조직의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반면 쓸데없이 오래 일하는 사람을 조직의 적으로 규정하고,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려는 음험한 시도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주어진 시간 내에 제 역할을 완수해 내지 못하고 야근을 자처하는 사람을 무능력자로 낙인찍어야 한다. 공연히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불안을 야기하며 강박을 주는 이들은 칭찬과 찬사가 아닌, 강력한 페널티를 날려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자신의 역량, 잠재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믿기 힘든 성과, 효율성, 생산성을 낼 수만 있다면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일한들 무슨 상관인가?


아무튼, 안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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