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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Dec 25. 2023

1990 크리스마스, 푸른하늘, 눈물 나는 날에는

참지, 마요 _내적욕구 _감성에 푹 빠져보기

까까머리 중1 시절


낙성대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레코드집이 있었다. 하굣길이면 하릴없이 들러 음반을 고르는 척하기도 하고 흘러나오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눈여겨봐 뒀던 것은 <푸른하늘2집> LP판이었다. 용돈을 넉넉하게 받는 편은 아니었기에 약 1만 2천 원가량 했던 앨범을 사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모았어야 했다. 하필 그 시점이 크리스마스이브였던 것 같다.


마침 집 안방에는 태광 에로이카 전축이 있었는데 TAPE 양면을 자동으로 재생할 수 있는 더블데크와 그 상단에 LP를 돌릴 수 있는 턴테이블이 놓인 중심부, 양쪽으로 정수기만 한 스피커와 우퍼를 갖춘 나름 고급 시스템이었다. 크리스천도 아니지만 괜히 크리스마스만 되면 기분이 들뜨던 그때...


꼬깃꼬깃 접은 천 원짜리 2장과 5천 원짜리 두장을 내고 <푸른하늘2집> 앨범을 사서 네모진 비닐봉투에 담아 들고 오던 길. 초록과 빨간 나무 모형에 색색으로 반짝 거리는 작은 전구를 두른 트리와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캐럴과 잔뜩 흐려 눈이라도 내릴 것 같았던 하늘과 원했던 것을 마침내 손에 넣었다는 기쁨, 빨리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 LP를 돌려보고 싶은 기대 따위가 뒤섞여 한 장의 인화된 필름처럼 남았다.


왕십리에서 가게를 하시던 부모님은 겨울철이 되면 도로 사정으로 가게에서 머무는 일이 많아 안방은 비어 있었고, 방에 들어서자 보일러를 틀어놨던 탓인지 더운 열기가 훅 끼쳤다. 나는 비닐봉투 속 앨범을 꺼내 까맣고 동그란 LP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늦은 오후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을 커튼으로 가리자 방은 온통 깜깜한 암막이 되고, 나는 방 한켠 노란 장판 위에 깔린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 노래가 나오길 기다렸다.


첫 노래는 <눈물 나는 날에는>


'우리들 마음 아픔에 어둔 밤 지새우지만

찾아든 아침 느끼면 다시 세상 속에 있고

눈물이 나는 날에는 창밖을 바라보지만

잃어간 나의 꿈들에 어쩔 줄을 모른데


나에게 올~마하는 시간들을...'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LP판 특유의 긁히는 노이즈와 유영석의 목소리, 아무도 없는 검은 안방, 추위에 얼었던 귀와 코와 손과 발이 녹으면서 퍼지는 따뜻한 안도감...


4번 트랙 <겨울바다>를 들으며 나는 얼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까맣게 텅 빈 안방과 절절 끓는 아랫목과 노란 장판이 대비된 겨울은 수십 년의 세월이 얹혀 매해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어렸을 엄마와 아버지는 회색 추위 속에서 돈을 벌고 있었을 것이다.


다시 47살의 크리스마스, 마침 눈이 내렸다.


저녁을 먹고 문득 그날이 떠오른 김에 푸른하늘 2집을 검색한다. LP판과 으리으리한 전축은 없지만 당근으로 산 10만 원짜리 하만카돈 스피커를 블루투스로 연결해 <눈물이 나는 날에는> <겨울바다>를 찾아 듣는다.


메리 크리스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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