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30)
여름방학이 벌써 일주일 지나갔다. 문승협이 잠에서 깨어 천장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내일 출발하는 보이스카우트잼버리를 준비해야 하였다. 가기 전에 정난희를 보고 싶었다. 지난번처럼 불쑥 찾아가면 화낼 것이 뻔했다. 벌떡 일어나 씻고 집을 나섰다. 먼발치서라도 봐야겠다는 의지였다.
정난희가 무용연구소에 갈 때면 늘 SS패션매장 앞 버스정류소에서 내렸다. 문승협은 근처에서 기다리면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였다. 들뜬 기분으로 건너편골목에 숨어 주시했다. 일요일아침이라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잔뜩 집중하여 도착하는 버스마다 샅샅이 훑어보는데 누군가 등을 두드렸다.
“오메 깜짝이야.”
“야 문승협, 니 여그서 뭐 하냐?”
“장홍기, 너 넌 여기 웬일이야?”
“여그가 우리 집이잖애, 서양제화.”
“아참 그렇지, 윙스공연준비는 잘 돼?”
“그냥 그래. 근디, 뭐 한다고 아까부터 두리번거리냐?”
“아, 뭐 좀 살게 있어서, 저기 SS패션매장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지.”
“10시쯤 돼야 열 것인디? 아직 한 시간도 더 남았다야.”
“그 그러냐, 난 9시에 여는 줄 알았어.”
“니 혹시 정난희 기다리는 거 아녀?”
“아 아니야 그런 거. 근데, 난희가 여기서 내리는 건 어떻게 알아?”
“일요일인가 언젠가, 가끔 여그서 내리는 거 봤어.”
문승협은 당황하던 차에 무심코 정난희의 하차정류소를 말해버렸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아 그랬구나, 나 난 저기 옷 좀 보려고.”
“혹시 모른께 문 앞에 가서 기다려라, 어쩔 때는 일찍 열 때도 있어. 가께, 나중에 또 보자.”
“응, 그래, 들어가.”
문승협은 집에 들어간 장홍기가 지켜볼까 봐 난처하였다. 진짜 SS패션을 찾은 것처럼 보여주려 매장으로 가 문을 흔들었다. 때마침 11번 버스가 정류소가까이 다가왔다. 얼른 골목에 숨어 지켜보았다. 정난희가 두 사람 뒤에 내렸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무용연구소 쪽으로 걸었다. 문승협은 장홍기집을 한번 살펴보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라갔다. 행여 들키면 또 혼나기에 동태를 예의주시했다. 슈퍼에 들어가는 정난희를 보고 멈칫하였다. 한참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이상히 여겨 다가가는 찰나 정난희가 불쑥 나왔다. 재빨리 몸을 숨겼다. 하마터면 마주칠뻔하여 가슴이 철렁했다. 정난희가 눈치채지 못하고 무용연구소 쪽 코너를 돌아갔다. 문승협도 다시 움직였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뒤로 넘기는 정난희모습이 예뻤다. 아쉽게도 금세 무용연구소건물로 사라졌다. 씁쓸한 마음에 허공을 쳐다봤다. ‘여자친구를 눈앞에 두고도 이게 뭐 하는 짓이지?’라고 자조하였다. ‘그래도 못 볼 줄 알았는데 봐서 다행이야’라며 울컥한 기분을 스스로 달랬다.
다음날아침 이른 시간 목포역광장에 7개 학교 남녀스카우트들이 한 것 멋 부리고 집결했다. 모두 스카우트제복에 베레모를 쓰고 항(두)건을 둘렀다. 기장(기능장, 진급장, 휘장)과 호루라기를 부착하고, 요대에 수통, 구명승을 착용하였다. 다들 항고, 코펠, 버너, A텐트 등이 담긴 무거운 배낭을 짊어졌다. 남자학교는 문일중고와 덕일중고, 여자학교는 인혜여중고와 제원여고였다. 문승협은 덕일중 양명기선생과 인혜여중 강지영선생을 만날 줄 알았으나, 두학교 스카우트대장이 바뀌어 서운했다. 교통정리와 봉사 등 스카우트활동을 하면서 알은 남녀스카우트들과 홍지아가 눈에 띄었다. 승차시간이 긴박하여 간단한 안부인사만 나눴다. 질서 정연하게 대기 중인 버스에 올라 덕유산야영장으로 출발했다. 중간휴게소에서 마주쳐 짧게나마 담소를 나눴지만, 덕유산에 도착해서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각기 배정된 야영장이 멀리 떨어진 데다, 스카우트들이 너무 많아 억지로 찾아가기 전에는 만나기 어려웠다.
한국스카우트연맹창설 60주년을 맞이하여 제8회 아시아태평양잼버리 겸 제6회 한국잼버리가 무주덕유산덕유대야영장에서 열렸다. 한국과 아시아태평양지역 청소년들이 우정과 화합을 다지기 위해 모였다.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 대원 12,000여 명이 참가했다. 덕유산일대 국토순례를 하거나 등산로를 따라 하이킹을 하고, 민속행사와 민속공연 등으로 친목을 다지며, 대형캠프파이어를 끝으로 작별하는 6박 7일간 일정이었다. 특히 부채 만들기, 민요 배우기, 널뛰기, 투호, 씨름, 안동 차전놀이 등에 많은 인원이 참가하였다. 김천 빛내 농악, 판소리 등 민속공연도 인기 있었다. 잼버리에서 스카우트진급단계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기능장과정을 배움과 동시에 시험을 치렀다. 주로 야영과 생존훈련, 긴급구호와 응급처치 등 기능장획득기준으로 평가했다. 스카우트대원에게 최고 영예인 범스카우트TigerScout 수여식도 거행하였다.
범스카우트는 리더십과 장래성이 인정되는 대원에게 수여하는 최고스카우트대원을 양성하는 제도다. 경력이 최소 6년은 되어야 하고, 이 기간 중 6단계에 걸친 스카우트진급과정을 거쳐야 하며, 기능장 21개 이상 취득과 2백 시간 이상 사회 봉사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 스카우트진급 6단계는 초급스카우트, 2급스카우트, 1급스카우트, 별스카우트, 무궁화스카우트, 범스카우트다. 기능장에는 진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15종 필수기능장과 개인 흥미와 적성에 따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89가지 일반기능장 등 모두 104종이 있다. 각 진급단계에 필요한 과제와 취득해야 할 기능장의 자세한 내용은 스카우트핸드북과 기능장과정집에 나와 있었다. 진급 시마다 진급기장을 수여할 뿐 아니라, 기능장이 많은 경우 기능장을 부착한 휘장을 둘렀다. 진급과정에 3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다른 경쟁사회에서는 타인을 이겨야 진급되나, 자신의 기록에 도전하는 방법으로 자기 발전을 도모했다. 둘째는 각과정에 일정한 기준을 설정하여 도달한 대원에게 진급기장을 수여하는 방식으로, 일정 수준 기능숙달을 유지하게 하였다. 셋째는 일정기간 정해진 양을 배우는 학교교육과정과는 달리 각자 흥미와 노력, 능력에 따라 진급속도가 결정되도록 개인의 장점에 초점이 맞춰졌다. 스카우트운동목적은 청소년을 육체적∙도덕적∙정신적으로 건전하게 육성하여 국가와 인류에 기여함에 있다. 스카우트운동이 국가적이라 함은 조직체를 통해 유능하고 건전한 민주시민을 육성한다는 취지다. 지적인 면을 형성시켜 자연을 배우며 탐험하는 능력과 기능을 익히는 데 의의가 있었다.
문승협은 무궁화스카우트였다. 기능장 3개 이상을 따면 범스카우트가 될 수 있었다. 모든 스카우트들이 빡빡한 잼버리일정을 따라가기 벅차했다. 고등학교연장대와 중학교소년단뿐 아니라 걸스카우트와 보이스카우트 프로그램이 다 달랐다. 교육진행을 스카우트들 중 리더인 중학교도반장과 고등학교영조장이 주도해 우왕좌왕하였다. 지도선생인 스카우트대장들은 참관만 했다. 기능장과정을 교육받은 후 획득시험까지 치렀다. 압권은 마지막 날 밤 화려한 대형캠프파이어였다. ‘비바, 비바, 비바람이 치는 바다 잔잔해져 오면~’. 다 같이 이구동성으로 ‘연가’를 부르며 시작됐다. 캠프파이어가 끝날 때까지 많은 재미와 추억을 심어주었다. 심신은 지친 반면 많은 걸 배운 잼버리였다. 정치색이 짙은 ‘나라를 위한 스카우팅’이라는 표어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으나, 6박 7일간 잼버리는 성황리에 마쳤다.
문승협에게 세 가지가 특별히 기억에 남았다. 첫 번째로 민속행사하던 날 각국 전통의상을 소개하며 행렬하는 행사였다. 문승협이 파격적인 여자한복을 입었다. 예쁘장하다는 이유로 강요받아 마지못해 입었지만, 말하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이 여자로 알았다. 해외에서 온 남녀스카우트들이 남자임을 안 뒤 같이 사진 찍자고 요청했다. 길게 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마치 연예인 같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두 번째는 10여 Km 5시간 산행에서였다. 덕유산정상 향적봉에 구상나무주목나무 거목군락과 소나무 고목들의 꿋꿋한 자태가 경이로웠다. 수많은 태풍과 번개를 맞고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어서 천년주목이라는 말뜻이 새삼 이해됐다. 무주구천동계곡으로 캠핑 왔던 중1 때는 보지 못한 절경이었다. 세 번째로는 각종 행사와 교류를 통한 타지방과 해외에 사는 또래 스카우트들과의 친목다짐이었다. 펜팔을 하기 위해 미국일본대만 등 스카우트들과 주소를 교환하였다. 외항선선원이었던 중국인 진춘이 생각났다.
목포지역스카우트들은 갔던 대로 같이 돌아왔다. 오후 3시가 넘어 목포역에 도착했다. 학교별로 점검하고 해산하였다. 문승협이 무거운 배낭과 캠핑짐을 챙겨 횡단보도로 갔다. 클랙슨소리와 함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홍지아가 낯익은 차량 옆에서 오라고 손짓했다. 문승협이 홍지아엄마와 전에 봤던 기사아저씨에게 인사하였다. 예상대로 홍지아엄마가 바래다줄 테니 타라고 했다. 기사가 웃으며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문승협이 배낭을 마저 싣고 앞자리 조수석에 앉았다.
“오랜만이구나, 많이 탔네?”
“네, 햇볕이 엄청 뜨거웠어요.”
“엄니 지아도 까맣게 탔수, 이 딸은 안 보이나 봅니다?”
“따님은 타든가 말든가, 나는 관심 없소이다.”
“어무니가 진정 내 엄니가 맞소이까?”
“너 또 그 식상한 홍길동 대사 하려고 그러지,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한다는.”
“호호호, 그러고 보니 홍길동이 우리 조상이 맞나 봐.”
“이그, 지긋지긋한 홍씨들. 기사님, 저기 슈퍼 앞에 잠깐만 세워보세요.”
“엄마 왜, 뭐 사려고?”
“더워서 우리 사위 아이스크림 사 먹일라고 근다 왜?”
“하여튼, 엄마는 승협이 밖에 몰라.”
“잠깐 있어, 갔다 올 테니.”
“어머니, 제가 다녀올게요, 앉아계세요.”
“아니다, 내 손으로 사다 먹여야 맛있게 먹지.”
“야 문승협, 너 캠프파이어 때 어디 있었어, 엄청 찾았는데 안보이더라?”
“애들이 너무 많아서 능선 쪽에 있었어, 위에서 보니까 잘 보이더구먼.”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한참 찾아다녔다야.”
“나는 너 민속행사시간에 봉산탈춤 배운 거 봤어, 너 완전히 몸치던데?”
“내가 춤까지 잘 추면 여기 있겠냐, 벌써 서울로 갔지.”
“하하, 그래도 그렇지 너무 못 따라 하더라.”
“그래 좋겠다 너는, 춤 잘 추는 애인 있어서.”
“무슨 소리야, 누가 춤을 잘 추는데?”
“아냐 엄마, 그런 게 있어.”
“자, 하나씩 받아라.”
“또 이거야, 난 가나초코바가 맛있던데.”
“아이스콘은 뭐니 뭐니 해도 부라보콘이 제일이야, 안 그러니 승협아?”
“네 맞아요, 저도 부라보콘이 좋아요.”
“아주 둘이서 쿵짝이 잘 맞네, 도대체 누가 자식이야.”
“기사님, 그 카세트테이프 좀 틀어주세요, 아이스콘 먹으면서 기분이나 전환하게.”
기사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이프를 밀어 넣었다. 문승협의 그룹사운드공연녹음이었다. 문승협은 부끄러워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홍지아엄마가 부라보콘을 먹으며 흥얼거렸다. 의외로 ‘휘버스의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을 좋아하였다. 부라보콘은 공연녹음테이프를 준 문승협에게 약소한 답례이자 애정표현이며, 항상 가족을 위해 맞춰주는 엄마면서도 기호식품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홍지아모녀가 문승협을 내려주고 갔다.
집에 들어선 문승협은 곧바로 배낭과 캠핑장비를 정리했다. 빨래거리를 내놓고 샤워하였다. 다섯 시가 조금 넘어갈 무렵 동생 문현아가 들어왔다.
“오빠 잼버리 간 날 저녁에 난희언니한테 전화 왔었어.”
“아 그래? 뭐래?”
“오늘 저녁 6시쯤 전화할 거라면서, 만약 통화가 안되면 집으로 전화해 달래.”
“자, 이거 향나무부채야.”
문승협은 평소 같으면 멀리 다녀온 오빠에게 인사안 한 문현아를 핀잔했겠으나, 너무 반가운 소식이라 오히려 고마웠다. 덕유산에서 기념으로 사 온 선물을 주고 어서 6시가 되길 기다렸다. 하지만 6시가 지나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30분쯤 지나 문현아에게 전화 걸어달라고 하였다.
“여보세요, 언니 잠시만요.”
“여보세요.”
“어 나야, 잘 다녀왔어?”
“응, 잘 있었어?”
“응, 아이스크림은 맛있었어?”
“응?”
“근데, 캠핑을 가면 간다고 미리 말해야 되는 거 아냐?”
“아, 말할 기회가 없었어.”
“무슨 캠핑 가는 걸 하루아침에 결정하는 거야?”
“그 그런 건 아니지만, 만날 수가 없었잖아, 연락하는 것도 어렵고.”
“보이스카우트에서 가는 거면, 적어도 두세 달 전에는 알았을 거 아냐.”
“마 맞아, 미안해.”
“또 미안,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편해?”
“…….”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토요일 아침 9시에 만나.”
“어디서?”
“코롬방제과점 앞에서.”
“알았어, 그럴게.”
“그럼 끊어.”
정난희가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평소 다정다감한 스타일은 아니나, 화난 사람처럼 다른 때보다 퉁명스러웠다. 문현아가 옆에서 지켜보다 안쓰러워 한마디 했다.
“오빤 난희언니한테 뭘 그리 잘못했기에 맨날 쩔쩔매?”
“내가 언제 쩔쩔맸다고 그래, 네가 뭘 안다고 까부냐?”
“피, 괜히 나한테 성질이야.”
문승협은 순간 욱해서 괜한 문현아에게 분풀이하였다. 뜬금없는 아이스크림이야기가 떠올랐다. 홍지아엄마가 들렀던 슈퍼가 정난희무용연구소 근처이긴 했으나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차 안에만 있어서 누가 볼일도 없었다. 거리낄 것이 없어 그냥 무시하였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1분도 채 안되어 전화벨이 또 울렸다. 혹시 정난희에게서 다시 온 전화인가 싶어 재빨리 받았다.
“여보세요.”
“나여, 니 성님이다. 캠핑은 잘 갔다 왔냐?”
“응, 아까 도착했어.”
“갔다 왔으믄 보고를 해야제, 이느무씨끼 빠져갖고는.”
“하하, 어쩐 일이야?”
“용경이랑 서울친구들이 왔어, 같이 가서 놀자.”
“아 그래? 근데, 나는 오늘 좀 그렇다.”
천영기가 당장 오라고 막무가내 꼬드겼다. 문승협은 미안하다며 내일 가겠다고 사정했다. 가고 싶으면서도 피곤한 데다 외출하기에 눈치 보였다. 이른 저녁을 먹은 뒤 캠핑을 다녀온 여독에 일찍 잠들었다.
다음날 문승협이 부용경집에 갔을 때는 천영기와 이담이 먼저 와있었다. 서울친구들과 반갑게 인사하였다. 지난겨울 만났던 박정진과 박상인외에 처음 보는 친구가 있었다.
“승협아, 얘도 박정진이야.”
“어이 문승협, 이야기 많이 들었다.”
“그럼 네가 작박인가?”
“무슨 소리, 내가 큰박이다.”
“전에 이야기 듣기로는 키 큰 애가 큰박이고, 작은 애가 작박이라 했는데?”
“하하, 그래 맞아. 내가 1센치 작아서 작박이다, 인정.”
“승협이도 키가 많이 컸네, 저번엔 밤톨이었는데.”
“최봉수는?”
“봉수는 부산에 갔어, 해양소년단 캠프 있어서.”
“그러면, 여기 문승협이가 큰박을 물리친 승자인가?”
“야 작박, 뭔 쓸데없는 소리 하냐, 다 지난 일인데.”
“무슨 말이야?”
“오호, 너 모르는구나? 큰박이 정난희를 꼬실라고, 엄청 노력했는데 까였잖아.”
“너 뒤진다 진짜, 쪽스럽게 그럴래?”
“야 임마 그만해, 큰박하고 승협이 표정 좀 봐라야.”
부용경이 자꾸 놀리는 작은 박정진을 말렸다. 문승협에게 오해마라며 자초지종 설명했다.
부용경막냇동생 부현숙도 무용을 하였다. 방학이면 정난희와 서울에 가서 같은 교수에게 레슨 받았다. 큰 박정진이 부용경을 따라 부현숙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정난희를 보았다. 이후 적극적으로 구애했지만 매번 거절당하였다. 단념한 건 지난겨울방학 목포에 왔을 때라고 했다.
“정난희가 남자라면 죽어도 싫다고 나를 거절했는데, 너랑 사귄다니까 남자로서 자존심이 조금 상할 뿐이지, 지금은 아무 감정 없어.”
“승협아, 옛날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라.”
“하하 그랬구나, 난 전혀 몰랐어.”
“근데, 정난희를 어떻게 꼬셨냐?”
“뭐 특별히 한 건 없는데?”
“옴마, 승협이가 큰박을 두 번 죽이네, 허허허.”
“아야 큰박, 니는 정난희랑 안 사귄걸 다행인 줄 알아.”
“왜?”
“저시끼 난희랑 사귀믄서 꽉 잡혀갖고, 난리도 아니어.”
“야 시끄러, 영기 네가 나랑 난희랑 사귄다고 말했지?”
“큭큭, 당연하제, 친구의 불행이 나의 재미인디.”
“으이그, 웬수 같은 놈.”
“느그는 좋은 주먹을 놔두고, 으째 입으로 투닥거리냐.”
김철종이 천도복숭아를 사들고 왔다. 씻어서 하나씩 입에 물었으나, 작은 박정진만 손대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다 내려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영문을 모른 채 우르르 몰려갔다. 부용경사촌형이 좋은 구경시켜 줄 테니 봉고차에 타라고 하였다. 들뜬 친구들을 태운 봉고차가 시외로 빠졌다. 얼마 후 부용경매형이 경영하는 농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친구들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돼지축사와 양계장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여름이라 인부들 구하기 어려워서 고심했는디, 처남 친구들이 온께는 한시름 놨다야.”
“이것이 뭣이어, 우리 납치된 거여? 매형, 우리는 사촌형이 가자고 한께, 그냥 멋모르고 잡혀왔는디라우.”
“허허허, 영기야, 이 매형이 저녁에 푸짐하게 대접할 텐께 쪼까 도와주라.”
부용경매형이 저녁식사를 미끼로 사료주기와 축사청소를 시켰다. 친구들이 투덜거리면서도 세 팀으로 나눴다. 비위가 약한 문승협과 작은 박정진, 이담은 닭모이주기를 맡았다. 닭똥과 깃털로 범벅된 닭장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천영기와 김철종은 장화로 갈아 신고 축사청소를 하였다. 큰 박정진과 박상인은 작은 수레에 배설물을 실어 날랐다. 규모가 커서 작업이 오래 걸렸다.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렸다. 처음 경험하는 고약스러운 냄새와 불결함에 다들 힘들어했다. 이미 몇 번 체험한 부용경은 괴로워하는 친구들 모습을 즐겼다. 호수로 물을 뿌리며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다들 우물에 모여 한바탕 등목으로 냄새와 더위를 씻어냈다. 두 번 다시 못하겠다며 아우성쳤다. 부용경매형이 도살장에서 갓 잡은 돼지고기를 한 아름 가져왔다. 부용경과 박상인은 마당모퉁이 화로 세 개에 장작을 넣고 불을 피웠다. 언제 왔는지 부용경의 큰누나와 동생 부현지가 닭 세 마리를 손질했다. 큰 솥에 갖가지 재료를 넣어 닭백숙을 하였다. 부용경매형이 가운데 솥에 흉측해 보이는 돼지머리를 삶았다. 두 박정진은 소일거리를 도왔다. 부용경과 박상인이 바깥쪽 화로에 슬레이트를 놓고 고기를 얹었다. 장작을 나르며 옆에서 보조하던 천영기와 김철종이 구시렁거렸다.
“슬레트에 고기구우믄, 건강에 안 좋단 말이 있듣디?”
“지랄, 암시랑토 안 해.”
“아니어, 석판 땜시 그런다드라.”
“꾸불꾸불해서 기름이 잘빠지고, 두께가 가늘어서 불전달도 잘돼. 과학이어 과학, 심지어 놀러 갈 때 갖고 가는 사람도 있단다야.”
문승협과 이담은 부현지를 도와 평상 위에 상차림을 도왔다. 이윽고 푸짐한 음식이 차려졌다. 두 여자와 두 박정진이 평상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화로 주변에 서서 소주를 마시며 즉석구이를 안주 삼았다. 술을 못 마시는 문승협과 이담은 양쪽을 왔다 갔다 했다. 부용경매형이 삶은 돼지머리를 평상으로 가져가 칼로 자르고 손으로 뜯고 찢었다. 박상인이 몬도가네라는 별명처럼 돼지의 귀와 혓바닥 등을 거침없이 맛봤다. 맛있다면서 먹어보라고 적극 권하였다. 비위 약한 세 사람은 인상을 찡그리며 엄두를 못 냈다. 부현지가 망설임 끝에 집어먹더니 눈을 휘둥그렜다. 이담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머리고기살점을 시식했다. 문승협과 작은 박정진은 의심의 눈빛으로 쳐다볼 뿐 도전하지 않았다. 대신 닭백숙을 개눈 감추듯 해치웠다. 얼마나 먹었는지 배불러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부용경매형이 담배 있으면 한 개비 달라하였다. 박상인이 건네고 큰 박정진과 담배 피우러 가려했다.
“아야, 느그도 여그서 그냥 피워.”
“연설하네 진짜, 고등학생들한테 담배 달라는 것도 모자라 여그서 피우라 한가?”
“형부는 오빠들 술담배를 못하게 해야제, 같이 하믄 그것이 어른이요?”
“아따, 나는 술담배를 중학교 때부터 했그만 그라네, 괜찬해 그냥 피워 부러.”
부용경의 큰누나와 부현지가 질타했다. 술담배를 안 하는 문승협과 작은 박정진도 미성년 흡연과 음주 비판에 동조하였으나, 다들 웃음으로 넘겼다. 부용경큰누나가 얼음물에 담가둔 수박을 가져다 갈랐다. 부현지가 포도와 복숭아를 씻어왔다. 작은 박정진이 복숭아를 보고 알레르기가 있다며 멀리 떨어져 앉았다.
“털복숭아는 이해된디, 아까 낯에 천도복숭아도 그래서 안 묵은 거여?”
“응, 복숭아통조림뿐 아니라 복숭아 말만 들어도 그래.”
“맞아, 진짜 신기하더라.”
“승협이 너는 어떻게 알아?”
“아, 국민학교 때 친한 친구가 그랬거든.”
“누군데?”
“지금은 이 세상에 없어.”
“야 문승협, 니 최선경이야기하는 거제?”
문승협이 김철종을 째려보자 움찔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말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반짝반짝 빛을 발산하는 수많은 별들이 한여름밤을 수놓았다. 보이스카우트에서 배운 별자리를 더듬으며 생각하였다. ‘최선경은 저 많은 별들 중 어디에 있을까?’. 유난히 파란빛을 뽐내는 금성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부현지가 기억을 더듬고, 김철종이 맞장구쳤다. 문승협에게 들리지 않게 둘이서 몰래 속삭였다.
“철종 오빠, 우리 유선국민학교방송부아나운서였던 1년 선배 최선경언니 말하제?”
“잉 맞어, 문승협이하고 얼척없는 사이였제.”
“오빠는 으째 그리 잘 안단가?”
“내가 두 사람의 산 증인이여 증인.”
“두 사람이 무자게 친했는 갑서?”
“즈그 둘만 몰랐제 모두가 아는 사실이제, 느그 후배들도 다 알잖애?”
“하기사, 선경언니가 이쁘기도 했고, 승협오빠가 인기도 많았은께.”
“다시 돌이켜보믄, 나이가 어려서 그라제 그런 순애보도 없어야.”
“그 언니 심장병인가 뭔가로 죽었다믄서?”
“말을 말어, 내 맴이 찢어진께.”
“호호, 꼭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같네잉.”
“아야 현지야 그만해라, 승협이 울겄다.”
“뭣이라우, 그라믄 눈물을 멈추게 해줘야제.”
“으짤라고 그라냐?”
“옛 여인을 못 잊는 사람한테는 현재 애인을 떠올려줘야제, 안 그란가?”
부현지가 갑자기 일어나 전화기 앞으로 갔다. 한동안 통화하더니 문승협을 불러 바꿔줬다. 뜻밖에도 정난희였다. 문승협은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였다. 정난희가 마치 부모처럼 단속했다. ‘공부는 안 하고 거기서 뭐 해? 거기서 놀 시간 있어? 내일 나 만나려면 빨리 들어가’라고 하였다. 천영기가 전화받으면서 쩔쩔매는 문승협을 보라며 조소했다. 모든 사람들이 동조하여 놀렸다. 문승협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몇 시인지 물었다.
“영리한 놈, 우리가 놀린께는 금방 화제 돌린 거 봐라.”
“뭔 소리야, 몇 시냐고 묻는데.”
“9시 다됐다, 으짤래?”
“많이 늦었네, 차 끊기기 전에 가야겠다.”
“아야, 방학인디 여그서 자고 같이 놀자?”
“그래라,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래, 같이 더 놀아라. 꼭 가야 하믄, 내가 늦게라도 데려다 줄 텐께.”
천영기가 붙잡자, 작은 박정진이 거들었다. 부용경사촌형이 차가 끊기면 태워다 주겠다고 하였다. 문승협은 친구들과 놀고 팠으나 유혹을 뿌리쳤다.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캠핑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외박이 항상 금지였고, 다음날 정난희와 만남이 가장 큰 이유였다.
서울친구들은 이튿날 진도로 여행을 떠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