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무슨 감정일까? - (6)
토요일은 여느 때처럼 수업이 끝나면 대청소를 하였다. 전교생이 담당청소구역으로 분주히 움직이면서 학교전체가 들썩였다. 5학년 1반 학생들도 교실과 복도를 쓸고 닦고 광내느라 바빴다. 몇몇 아이들은 교실과 복도의 바깥쪽 창턱에 걸터앉아 유리창을 닦았다. 3층 창밖으로 떨어질까 아슬아슬 위험해 보이는데도 장난치는 아이들이 있었다.
미화부장 가병수가 동생사건 이후 문승협과 김철종의 청소구역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했으나, 문승협이 그냥 하던 대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라고 하였다. 김용남지시로 쓰레기장청소를 담당하게 했던 가병수입장을 배려해서였다.
문승협과 김철종이 쓰레기통을 맞들고 쓰레기장으로 갔다. 강덕구와 이진구가 뒤따라 왔다. 김철종이 수상한 낌새를 느껴 문승협에게 조심하라고 하였다.
“어이 서울놈, 잘 있었냐? 무지하게 오랜만이다잉.”
“나는 오다가다 봤는데, 너희들은 못 봤나 보구나?”
“니까짓 것이 우리들 눈에 들어나 오겄냐? 원래 뭔가 찔리는 놈이 의식하는 것이제. 그건 그렇고 말이어, 니가 조동구동생한테 쪽을 이빠이 줬다믄서?”
“내가? 글쎄, 기억에 없는데?”
“그라믄 내가 생각나게 해줘야제잉. 아마도 쪼께 맞으믄 생각날 것이다.”
이진구가 작심하고 문승협에게 도발했다. 김철종이 끼어들었다.
“짱구야, 니가 어서 뭔 야그를 들었는지 모르겄다만, 뭣을 잘못 안 거 같은디?”
“이 서울놈 따가리 종놈시끼. 철이철이 쫑아, 넌 쫌 찌그러져 있어라잉, 종이 나설 자리가 아닌께. 그라고, 뭐가 사실인지는 중요 하도 안 해. 중요한 것은, 저 서울놈 시끼가 오늘 좀 맞아야 겄다는 것이어.”
이진구가 말을 마치자마자 주먹을 날렸다. 문승협이 재빨리 얼굴을 돌려 피했다.
“아따 씨발 놈, 태권도 좀 했다드만 제법인디. 나하고 한판 뜨자, 내가 오늘 반 죽여 놀라니까.”
“그래?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라.”
문승협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진구가 쓰레기장 안쪽 작은 공터로 가자며 앞장섰다. 몇 발짝 가다가 갑자기 뒤돌아 또 주먹을 날렸다. 문승협은 이번에도 몸을 옆으로 피했다. 이진구가 주먹과 발차기로 쉴 틈 없이 계속 공격하였다. 문승협은 피하기만 했다. 쓰레기장 벽을 등지고 있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둘은 대치한 상태로 잠시 호흡을 조절하였다. 이진구가 숨을 가다듬고 주먹을 쥐며 다시 싸울 태세를 취했다. 문승협이 대련자세를 잡고 한발 앞으로 내디디며 공격하는 척했다. 이진구가 예상치 못한 선제동작에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으나, 문승협은 제자리에 있었다. 이진구가 힘껏 쥔 주먹을 날리는 순간, 전광석화 같은 문승협의 뒤돌아차기가 이진구얼굴에 꽂혔다. 이진구공격을 피하면서 싸움습성을 파악한 계산된 반격이었다. 이진구가 일격을 당하고 나가떨어졌다. 안면을 정통으로 맞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마음 편히 옆에서 지켜보던 강덕구가 놀라 허겁지겁 뛰어갔다. 김철종도 멍하니 있다가 이진구코피를 닦아주며 상태를 살폈다.
“오메오메, 순식간에 이것이 뭔 일이다냐. 아야 짱구야, 정신 차려야.”
이 사실은 조동구를 데리러 간 강덕구에 의해 일순간 5학년아이들에게 퍼졌다. 최선경도 전해 듣고 쓰레기장으로 달렸다. 이진구가 정신 차릴 즈음, 조동구가 몹시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타났다.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이진구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야기 듣는 도중 이진구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는 문승협에게 다가갔다. 찡그리던 인상을 풀고 손을 내밀었다. 문승협은 혹시 있을지 모를 기습에 대비하느라 선뜻 악수에 응하지 않았다. 조동구가 멋쩍게 자기 손을 한번 보더니 팔짱을 꼈다.
“문승협, 미안하다. 짱구가 오해해 갖고 그런 것인께, 니가 이해해라. 내 동상 빵사건, 내 동상한테 들었어. 그라고, 저번 일도 우리 담탱이한테 다 들었어. 내가 퇴학당할 수도 있었는디, 으째 학교에서 봐줬는지 알고, 니가 태권도지도하는 이유도 알어. 내 성질에 이런 말 안 한디, 고맙다잉.”
조동구가 다시 한번 악수를 청했다. 문승협도 조동구손을 잡았다.
강덕구가 이진구를 일으켜 세웠다. 문승협이 가까이가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코피가 난 것 외에는 이상 없었다. 이진구가 기분 나빠하며 문승협손을 쳐냈다. 강덕구부축도 밀어내고 조동구일행과 갔다. 조동구동생이 형들을 따라가다 돌아보았다. 문승협에게 꾸벅 인사하고 다시 뒤쫓아 갔다.
“짱구야, 저 서울놈이 저번에 나한테 뭐라 한지 아냐? 받는 만큼 꼭 돌려준다드라, 내가 돌려받을 것을 시방 니가 받은 것이어. 언젠가는 이유도 말할 거라드만, 결국 저 시끼 말대로 되부렀네, 하하.”
조동구가 가고 몰려들었던 아이들도 흩어졌다. 김철종이 주위를 둘러보며 문승협에게 호들갑 떨었다.
“오메, 내가 쫄아서 디진 줄 알았네. 얼마나 쫄았는지 내 간이 다 아프다, 허허허.”
“그만해라, 빨리 쓰레기장이나 정리하자.”
“살짝 겁주고 물러선 척하믄 반사적으로 공격한께, 뒤돌아차기로 단방에 쾅, 끝. 멋져 부러.”
“야 그만하라니까, 창피하게시리, 싸운 게 자랑은 아니잖아.”
“그럼요, 승협씨 말씀 들어야지라. 나도 때릴지 모른께라우, 큭큭.”
“너 진짜, 계속 그럴래?”
최선경이 조금 먼 발취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움에 마음이 착잡했다
‘저 아이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착한 것 같은데 자주 싸우기도 하고, 그것도 조동구 같은 어마 무시한 불량한 애들을 무서워하지도 않아’
최선경은 싸움을 한 문승협에게 실망했지만 갈수록 신경 쓰였다.
내일이 봄소풍날이라 다들 들떠있었다. 보통 4월 말 전후에 갔는데 날씨로 인해 두 번이나 연기된 봄소풍이었다. 아이들이 수업 중에도 내일 비가 오지 않길 바라며 교실 창 밖 하늘을 자주 쳐다보았다.
문승협남매는 수업이 끝나고 사이다, 새우깡, 캐러멜 등 소풍 가서 먹을 과자를 샀다. 내일아침에 삶은 계란과 식초를 가미한 할머니만의 일본식 김밥을 소풍가방에 담으면 되었다.
문현아가 소풍 간다는 설렘에 밤잠을 설쳤음에도 아침에 일어나 활기가 넘쳤다. 큰고모 문희숙이 소풍 가서 사 먹으라며 용돈을 주었다. 문승협남매는 호주머니에 잘 챙겨 넣고 소풍가방을 등에 멨다.
소풍날인만큼 등교하는 학생들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하였다. 평상시 아침조회 같았으면 짜증스러울 텐데, 소풍출발 전에 치르는 의식 행사라선지 학생들 표정이 밝았다.
이윽고 학교가 계획한 동선에 따라 소풍장소로 출발했다. 선생님들 지도로 줄 맞춰서 경쾌하게 걸었다. 한 시간여 걸어 삼학도갓바위동산에 도착하였다. 학년별로 정해진구역에 집합하여 인원점검을 마쳤다. 다시 각 반별로 옮겨 자리 잡고 준비한 오전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5학년 1반은 소풍기념단체사진을 먼저 찍었다. 이어 오락부장 김철종주도로 오후에 있을 5학년 전체 반별대항전을 대비하여 응원연습과 게임을 했다. 오전 마지막 행사로 보물 찾기가 시작되었다. 담임선생들이 반별 오락시간 때 보물을 적은 종이를 곳곳에 숨겨놓았다. 점심시간을 포함해 오후 집합신호가 울릴 때까지 찾으라고 하였다. 시작하자마자 보물이 적힌 종이를 찾는 아이, 종이를 찾았지만 꽝이 쓰여 실망하는 아이도 있었다. 보물 찾기를 시작한 지 30분 정도 지나 점심시간을 알리는 확성기소리가 울렸다. 아이들이 집결장소에 모아뒀던 소풍가방을 챙겨 삼삼오오 점심 먹을 장소를 찾아다녔다. 다들 적당한 자리를 물색하는 사이, 언덕위쪽에 있던 최선경이 덩굴에 걸려 넘어졌다. 다행히 언덕을 굴러내려오다 작은 바위에 걸려 멈췄다. 문승협이 우연히 목격하고 뛰어갔다. 최선경을 살펴보다 김철종을 불러 5학년 6반 담임에게 알리라고 소리쳤다.
“괜찮니? 어디가 아픈지 말해볼래?”
“나 지금 무지 창피한 거 알아? 아픈 거보다 창피해서 눈을 뜰 수가 없어.”
“그럼 계속 눈감고 있어, 상처는 내가 찾아볼게. 많이 놀랬겠다, 진정되면 어디가 아픈지 말해.”
최선경은 ‘계속 눈감고 있어’라는 말에 심쿵했다. 상처를 찾아본다고 하여 고개를 문승협반대편으로 돌리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자신의 신체를 문승협이 살펴본다는 생각에 아프기보다는 부끄러워 꼼작할 수 없었다.
“다행이다, 외관상으로는 괜찮은 것 같아.”
“너 이상한 생각하지 마.”
“무슨 이상한 생각? 너 바지 입었어.”
최선경은 아침에 치마를 입었다가 바지로 바꿔 입은 걸 착각했다. 문승협은 바지를 치마 여미듯 하는 최선경손을 보고 짐작했다. 최선경이 왼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오른발만 움직였다. 문승협이 최선경왼발을 받쳐 무릎을 들어 올리자 아프다고 하였다. 바지단을 살짝 올려보았다. 덩굴에 감겨 생긴 빨갛고 검푸른 자국이 조금 부어있었다. 주변에서 부목으로 쓸만한 나무와 가는 넝쿨을 구해왔다. 최선경발목을 임시로나마 고정시키고 바위에 기대게 하였다. 최선경의 담임 오성희선생이 숨 가쁘게 올라왔다.
“선경아, 많이 다쳤니? 괜찮아?”
“네 선생님, 괜찮은데 발목이 좀 아프긴 해요.”
“그래, 다른 곳은 아픈데 없고?”
“네, 괜찮아요.”
“어휴, 천만다행이다. 철종이 이야기 듣고 깜짝 놀랐어. 어때, 걸을 수 있겠어?”
최선경은 오성희선생부축으로 일어났으나 발목이 아파서 다시 주저앉았다. 오성희선생이 어떻게 할지 생각하다 김철종을 쳐다봤다.
“철종아, 네가 선경이를 좀 업을래?”
“예? 제가요?”
김철종이 되물으면서도 시선은 최선경을 향했다. 최선경은 김철종시선을 받아 문승협을 바라봤다.
“네가 발목을 이렇게 해놨으니까, 네가 업어.”
“그래, 알았어.”
최선경은 순간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토 달지 않은 문승협에게 또 심장이 쿵하고 요동쳤다. 이번엔 뻔뻔하게 문승협 등을 내놓으라며 팔을 벌렸다. 문승협보다 큰 키의 최선경을 업은 모습이 조금 웃겨 보였지만 주위에 있는 아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성희선생이 최선경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김철종에게 옆에서 문승협을 부축하라고 하였다. 몇 발짝 내려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최선경이 언덕꼭대기 바위에서 보물을 찾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를 듣고 내려오다 덩굴에 걸려 넘어져 굴렀다고 하였다.
문승협이 최선경을 업고 중간쯤 내려갔을 무렵 등에서 땀이 흐르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최선경은 알면서도 오히려 문승협의 어깨와 목에 양팔을 꽉 감았다. 5학년집합장소에 다다라 양호선생이 응급함을 들고 최선경엄마와 같이 왔다. 소풍날이면 학부모회가 선생들 식사를 준비했다. 일부 학부모는 각자 알아서 점심시간에 맞춰 따로 오기도 하였다. 문승협이 평평한 자리에 최선경을 내려놨다. 양호선생이 상처 난 부위를 살펴보았다.
“와따, 나름 부목을 잘 댔다야. 승협이는 이런 것을 우째 알았으까? ”
“TV연속극 전우에서요, 군인들이 부상당한 다리를 응급처치 하는 거 봤어요.”
양호선생이 사고경위를 묻자, 오성희선생이 대답해 줬다. 최선경엄마가 문승협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연신 고맙다고 하였다. 양호선생이 간단히 치료하고 부목을 교체해 붕대를 감았다.
"양호선생님, 좀 어떤가요?"
“발목을 접질린 것 같은디 심각하지는 않네요. 그래도 혹시모른께, X-Ray 한번 찍어 보쑈.”
“선경아, 그럼 지금 가서 찍어보자.”
“싫어 엄마, 소풍 왔는데 어딜 가. 지금은 괜찮으니까, 내일가”
최선경엄마가 완강한 딸고집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딸을 부축해 맡아둔 점심식사자리로 움직였다. 딸시선이 문승협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다.
“승협 학생,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가서 점심 먹자.”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2학년동생이 있는데, 찾아가서 같이 먹을 거예요.”
“문승협, 어른이 청하면 따라야지 말이 많니? 동생은 찾아서 데려오면 되잖아.”
최선경이 주위사람들 조차 의아할 정도로 정색하였다. 문승협도 어리둥절했다.
“응? 아 알았어, 동생 찾아서 갈게.”
“저기 보이지? 빨리 가서 동생 데리고 와.”
문승협은 바로 동생을 찾아 나섰다. 여기저기 곳곳에 선생과 학부모들, 부모와 함께 또는 친한 친구끼리 옹기종기 둘러앉아 도시락을 펴놓은 채 점심을 먹고 있었다. 2학년집합장소에서 동생을 찾아 최선경이 오라는 장소로 갔다. 그 자리에는 최선경의 친한 친구들과 엄마들도 있었지만, 박진숙과 보육원아이들이 함께 있는 것은 뜻밖이었다. 최선경이 문승협의 동생을 자기 옆에 앉히고 친절히 대했다. 문승협은 동생 옆에 앉았다.
“안녕, 반가워. 2학년이라며, 이름이 뭐야?”
“문현아예요.”
“나는 최선경이야, 언니라고 불러도 돼. 동생이니까, 현아라고 불러도 되려나?”
“네. 저도 오빠친구니까, 언니라고 할게요.”
“오빠의 친구는 별론데, 현아의 언니는 하고 싶다. 못생긴 말썽쟁이 오빠한테, 이렇게 예쁜 동생이 있다니 놀라운데? 호호호.”
“네? 우리 오빠가 얼마나 착하고 잘생겼는데요, 언니라고 안 할까 보다.”
“아 아니, 농담이야 농담, 현아 화났어?”
“아뇨. 언니, 우리 오빠 좋아하죠.”
문현아의 당돌한 직설에 최선경이 당황했다. 점심 먹을 준비하며 최선경과 문현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그래, 맞아. 나를 구해줬는데 안 좋아하는 게 이상한 거지, 안 그래?”
최선경이 멋쩍음을 숨기며 실제 있었던 일을 구실 삼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모여있는 사람들이 뜻밖의 최선경대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빠, 오빠가 진짜 언니를 구해줬어?”
“구해주긴, 그냥 조금 도와 준거야.”
“맞어, 구해줬다는 말은 핑계고, 방금은 왕자 등에 업혔던 공주의 사랑고백이여.”
김철종이 최선경속마음을 꿰뚫고 한마디 하였다. 어느새 최선경얼굴이 빨개졌다. 주위사람들이 입을 가리고 소리 죽여 웃었다. 최선경이 문현아에게 도시락을 먹기 편하게 준비해 주며 김철종을 째려보았다. 김철종이 눈치 보며 최선경시선을 회피했다.
“호호호, 다들 친하게 지내고, 맛있게 많이 먹어라.”
최선경엄마가 티격태격하는 김철종과 딸을 보고 웃었다. 아이들에게 부담 없도록 배려된 식사여서 다들 맛있게 먹었다. 최선경이 엄마에게 부탁해 준비한 점심도시락이었다. 문승협은 그런 최선경엄마가 멋있어 보였다. 덩달아 최선경도 달리 보였다. 마음까지 예쁜 아이라고 생각하였다.
최선경은 동생을 챙기는 것부터 행동과 말투까지 문승협에게 더욱 호감이 생겼다. 그래서 자꾸 문승협을 의식하였다. 최선경엄마도 그런 딸시선을 보았다. 그럴 때마다 문승협을 관찰하게 되었다. 최선경엄마가 식사하는 도중에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식사를 마치고도 모두 모이라 하여 사진을 찍어주었다.
5학년아이들이 점심을 먹고 아직 못 찾은 보물을 찾거나 끼리끼리 모여 놀았다. 점심시간 끝과 집합을 알리는 확성기소리가 울려 학년별 집합장소로 모였다. 선생들이 인원파악을 끝내고 보물찾기 결과에 따라 선물을 나눠줬다. 5학년대표로 1반 오락부장 김철종이 사회를 맡았다. TV사회자처럼 잘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시나리오도 준비해 재미있게 진행하였다. 반대항 응원전에 이어 장기자랑이 시작되었다. 각반 반장들과 대표들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 송창식의 고래사냥과 왜 불러, 송대관의 해 뜰 날, 만화영화 요술공주,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등을 열창했다. 김용남도 1반 반장자격으로 ‘남진의 님과 함께’를 노래했다. 주로 남자아이들은 남자가수유행가를, 여자아이들은 만화영화주제가와 여자가수유행가를 불렀다. 각설이타령을 하거나 코미디언 남보원을 흉내 내는 아이도 있었다. 그렇게 다 끝나고 선생들이 모여 심사에 들어갔다. 심사하는 동안 김철종이 ‘송창식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멋지게 했으나 선생들 심사가 길어졌다. 김철종이 공백시간을 어찌하나 고민하며 주위를 살폈다. 문승협을 바라보고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참가자들 실력이 막상막하여서 선상님들 심사가 길어지고 있은께, 초청가수를 한 분 모실게라우. 여러분도 알란가 모르겄소만, 서울서 곰방 도착한 유명한 가수인디요. 태권도를 아주 잘하는 오늘의 초청가수, 문승협씨를 모시겄습니다. 여러분, 박수!”
문승협은 느닷없는 호명에 창피해서 고개를 무릎 사이로 숙였다. 5학년아이들이 박수를 치다 박자에 맞춰 문승협을 호명하였다.
“아따 여러분, 박수소리가 약한갑소, 뜨거운 박수 한번 쳐주쑈. 문승협씨, 고개 쳐 박고 있다고 이 순간을 모면하긴 어려울 것인께, 빨리 앞으로 나오쑈.”
한층 커진 박수소리에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문승협이 왼손으로 이마와 눈을 반쯤 가리고 김철종을 원망스럽게 째려보았다. 죽이겠다는 듯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마지못해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문승협씨, 태권도는 우리가 매주 본께 고것은 빼고, 어디 노래 한번 들어봅시다. 여러분, 동의하요?”
“그랍시다, 서울놈 노래는 으짠가 한번 들어봅시다”
김철종이 장기로 태권도를 할 거라 생각하고 배제시켰다. 노래를 들어보자며 아이들 호응을 유도했다.
문승협은 난감하면서도 마냥 서있을 수 없었다. 결국 수줍어하며 가곡 ‘별’을 노래하였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 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도 어느 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서울에서 다니던 국민학교의 합창단원일 때 배웠던 노래였다. 엄마랑 헤어져 있으면서 밤에 별을 보며 혼자 수없이 불렀었던 가곡이었다.
문승협이 노래를 마치자마자 후다닥 자리에 가 앉았다. 잠깐 정적이 흐르다 갑자기 아이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나왔다. 박수가 계속 이어지다 어디선가 작게 시작된 ‘앵콜’ 소리가 점점 커졌다. 김철종이 심사하는 선생들 쪽을 보았다. 선생들이 앙코르를 받아들이라며 손짓했다. 선생들도 잠시 심사를 멈추고 문승협노래에 심취하여 들었었다.
“여러분, 노래 들어본께 으짜요, 내가 소개했듯이 가수 맞지라우. 나도 첨 듣는디, 노래실력이 어마무시하네요잉. 그라믄, 앵콜곡을 신청해 보까라우?”
문승협은 김철종이 얄밉고 곤혹스러웠지만 하는 수 없이 다시 앞으로 나가 앙코르곡을 불렀다.
‘You are the answer to my lonely prayer, you are an angel from above, I was so lonely till you came to me, with the wonder of your love……So hold me close and never let me go, and say our love will always be, Oh my darling I love you so, you mean everything to me’
아이들이 모르는 노래였다. 또래아이가 부르는 팝송이 처음이라 신기해하였다. 가곡 별에 비해 박수소리가 작았으나, 선생들은 모두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문승협이 부른 ‘You mean everything to me’는 아버지 문경준이 좋아하는 미국싱어송라이터 닐세다카의 노래였다. 'Oh carol'등으로 1960년대까지 주로 활동하였고, 70년대에는 엘튼존이 코러스로 참여한 ‘Bad Blood’가 빌보드싱글차트에서 2주간 1위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문승협은 영어를 모르지만, 아버지가 집에서 듣던 레코드뒷면가사를 노트에 옮겨 쓴 다음 오랜 시간 사전을 찾아가며 가사를 외웠다. 아버지에게 관심받고 싶어서 노래를 수십 번 반복해 들으며 혼자 배운 곡이었다. 아버지친구들이 집에 오면 항상 이 노래를 부르게 하고 노래가 끝나면 용돈을 줬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며 칭찬해 줘서 좋았다.
최선경은 가슴이 뭉클했다. 왠지 문승협의 노래 같았다. 두 곡을 문승협의 노래로 마음속에 담았다.
모든 시상과 주변청소를 마쳤다. 학년별로 줄 맞춰 학교에 복귀했으나, 최선경은 택시 타고 병원으로 가서 X-Ray를 찍었다. 다행히 타박상이었다.
봄소풍 이후 문승협을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비하와 차별의 부정적 의미로 불렸던 ‘서울놈’이라는 호칭이 긍정적 의미로 바뀌어갔다. 김철종이 부르는 것처럼 친근과 호감이었다. 점점 이름을 부르는 아이들도 늘어났다. 그동안의 태권도지도도 크게 한몫했다.
문승협과 최선경은 소풍을 다녀온 후에도 서로 수줍은 탓에 여전히 서먹하였다. 그래도 나아진 것은 오다가다 만나면 나누는 자연스러운 인사 정도였다. 달라진 점이라면 최선경이 단짝 제갈민주에게 문승협을 자주 언급했다. 제갈민주는 둘을 한번 만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문승협마음도 확인할 겸해서 문승협과 같은 반 현기정과 짜고 우연을 가장한 꾀를 냈다. 점심시간에 현기정을 찾아갔다.
“기정아, 너 그거 아냐?”
“뭣을아?”
“선경이는 점심 먹은 후에 항시 뒷동산에 간단다야”
“아, 비 오거나 특별한 일 없으믄 맨날 간다드만, 진짜 그런갑다잉.”
“잉, 오늘도 갔어.”
문승협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문승협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김철종이 심심하다면서 동산에나 가자며 문승협 팔을 끌고 나갔다.
학교뒷동산은 산등성이로 연결되어 꽤 넓었다. 올라가는 길도 두 곳이었다. 하나는 쓰레기장과 5학년화장실 옆이고, 또 하나는 운동장을 지나 1학년 교실 옆 충무공이순신장군과 소파방정환 동상이 있는 길이었다.
김철종이 문승협을 이끌고 5학년화장실 옆길로 올라갔지만, 최선경은 보이지 않았다. 문승협에게 들키지 않게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동산아래쪽에서 아이들 여러 명을 세워놓고 뭔가 하고 있는 김용남을 발견하였다. 김철종이 문승협옆구리를 찌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보자는 신호를 보내고 조심스레 접근했다.
아이들 몇 명이 김용남 앞에 열중쉬어 자세로 서있었다. 틱장애가 있는 가병수동생에게 놀랐다며 무차별적으로 때리고, 조동구동생에게 빵을 훔쳤다며 많은 아이들 앞에서 창피와 모욕을 줬던 아이들이었다. 자기들 스스로 자랑스럽게 말하는 소위 김용남동생들이었다.
“이상하다잉, 세모는 있는디 가분수가 안보인디?”
“가병수가 왜?”
“저런 자리에는 항시 세모하고 가분수가 있었제. 아야, 저것이 뭣이냐?”
“뭐 말하는 건데?”
“저기 김용남 앞에 바닥에 있는 거 말이어.”
“무슨 신문하고 책 같은데?”
“워메 깜짝이어.”
가병수가 옆에서 불쑥 나타났다.
“쉿, 조용히 해야. 저것이 뭐냐믄, 소년조선하고 소년동아 같은 어린이 신문이랑, 어깨동무 같은 만화책이어. 그라고 양지하고 다마도 있어, 전부 다 서있는 동상들이 용남이한테 상납한 거여. 저 동상들은 저 물건들을 자기 돈으로 사거나, 돈이 없으믄 다른 애들한테 뺏어갖고 상납하제. 저거 말고도 빵이랑 과자 하고, 음료수 같은 다른 것도 많애.”
“저 애들은 왜 상납을 하는 거야?”
“반장도 있고 공부도 좀 하고 집도 괜찬하게 사는 아그들인디, 김용남 빽으로 고아원아이들로부터 보호받고, 또 즈그들끼리 뭉쳐서 가오 잡는 것이제.”
“용남이네 잘살잖아, 굳이 상납받을 이유가 있어?”
“용남이는 저 물건들 관심도 없어야, 쓰레기장에 갖다 버리기도 한께. 근디, 인기 누리고 왕노릇에 재미 붙었제, 즈그 엄마도 육성회에서 왕노릇 하잖애.”
“거봐라 승협아, 내가 뭐라디, 내 말이 맞제?”
“그러네.”
“야, 근디 너는 으째 저그에 안 있고 여그에 있냐?”
“야 쫑, 넌 꼭 아픈 데를 찌르드라잉. 김용남이 내 태도가 이상하다길래, 그런 거 없다고 아니라고 했는디. 동상들 데리고 가서 승협이 너를 패든가, 아니믄 손에 장을 지지라고 하드라.”
“그래서 뭐라 했는디?”
“둘 다 못하겄다고 했제. 그랬드만 동상들 앞에서 개쪽 주고, 내가 쪼다 돼부렀어야. 챙피해 갖고 더 이상 같이 못 다니겄더라고. 하물며 같이 있던 동상들도 덤비드란께, 내가 쪽 팔려서 어디다 말도 못 해야.”
“으짜쓰까잉, 완전 썩을 시끼들이네. 승협아, 너도 당분간 조심해야 쓰겄다.”
“맞어, 분명히 저 시끼들이 승협이 너한테 덤빌 것이어, 조심해.”
김철종과 가병수의 예언 같은 말은 며칠 뒤에 현실이 되었다. 김용남이 문승협과 쌈구의 싸움소식을 듣고 문승협의 싸움실력을 확인하려 했다. 더구나 가병수와 조동구의 동생을 도와준 미담이 소문을 탄 데다, 태권도지도와 소풍 때 불렀던 노래로 문승협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후배들을 통해 꺾어 놓으려고 하였다.
김용남사주를 받은 4학년 대여섯 명이 교실로 문승협을 찾아왔다. 점심시간에 방정환동상 앞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문승협은 평상시처럼 점심을 먹고 동산으로 향했다. 김철종과 가병수가 뒤이었다. 혼자 가겠다는 문승협의 만류에도 불안하다며 동행했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동산 주변으로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김용남은 모른 척하며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후배들에게 미리 말해둔 신호를 되새겼다.
최선경이 일상처럼 점심을 먹은 후 제갈민주와 동산벤치에 앉아 햇볕을 쪼였다. 다른 때와 다르게 많은 아이들이 동산으로 모여드는 게 의아했다. 동상 주변에 있는 아이들을 향해 다가가는 문승협과 뒤따라가는 가병수와 김철종을 보았다. 그보다 몇 걸음 뒤 김용남도 눈에 띄었다.
“선경아, 뭔 일 생긴 거 같은디? 저그 승협이, 쫑이, 가분수, 김용남까지 줄줄이, 으째 수상하다야.”
“그러게, 무슨 일이지?”
김철종이 최선경과 제갈민주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가병수에게 말했다.
“야 가분수, 으짤지 모른께, 너는 저그 선경이한테 가있어. 그라고 내가 막 이렇게 손을 흔들믄, 교무실로 뛰어가서 말해, 알겄냐?”
“교무실 가서 뭐라고 말해야?”
“아따 염병, 본 대로 말해. 승협이가 항시 말한 멩키로,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그래도 되까? 승협이가 불리하믄 으짤라고.”
“괜찬해, 나머진 승협이가 알아서 할 것이어, 암은.”
최선경이 다가오는 가병수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가병수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말했다.
문승협이 동상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4학년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김철종은 가병수가 잘 보이는 쪽으로 자리했다. 김용남은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서 팔짱 끼고 지켜보았다.
“아따, 오느라 수고했소. 쪽수도 밀린디 오란다고 오다니, 빙신 아니어? 큭큭큭.”
“야, 말 좋게 해라. 그래도 한 학년 선배인데, 그렇게 시건방 떨면 되냐.”
“오메, 그래도 태권도 좀 했다고 주둥이는 살았네.”
“그래, 말만 하려고 나를 이곳으로 부른 건 아니겠지만, 이유는 알자.”
“이유가 뭐 있겄어, 태권도 좀 한다고 후배들한테 깝친께 그라제. 우리 알제라?”
“그럼, 잘 알지. 너흰 병수동생 때린 애들이고, 너희는 동구동생 괴롭힌 애들이지.”
일곱 명이 문승협을 에워쌌다. 김용남이 팔짱을 풀어 뒷짐을 지자, 문승협 뒤에 있던 아이가 강하게 발로 찼다. 문승협이 넘어질 듯하다 앞으로 굴러 일어섰다. 재빨리 대련자세를 취했으나 등에 충격이 있었다. 동상을 등지고 서니 일곱 명의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왔다. 덤벼드는 세 명을 오른발 앞차기와 왼발 돌려차기, 오른발 뛰어차기를 연속동작으로 단번에 쓰러뜨렸다. 모여든 아이들이 문승협의 공격에 걱정스러운 탄성을 질렀다. 몇몇 아이는 박수를 치기도 했다. 세 명이 맞고 넘어져 쉽게 일어나지 못하자, 남은 네 명은 당황해서 엉거주춤하였다. 문승협이 말로써 제압하려고 싸움자세를 풀었다.
“나를 우습게 아는 모양인데, 어때, 쉽지 않지? 지금이라도 선배한테 무례하게 군 행동을 사과하면, 내가 용서해 줄 의향은 있다.”
넘어진 세 명이 뒤로 기듯이 빠지고, 네 명이 앞으로 나오면서 김용남을 쳐다봤다. 문승협이 다시 싸울 태세를 갖추고 김용남을 노려봤다.
“학교에서 뭐 하는 짓이여, 멈추지 못하냐.”
네 명이 자세를 바로 하자, 문승협도 자세를 풀며 소리 나는 쪽을 쳐다봤다. 모여있던 아이들이 길을 터주는 사이로 6학년 회장 남강과 선도부장 박현이 동산 쪽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박현이 선도부완장으로 4명의 머리를 한 대씩 세차게 때렸지만, 문승협을 한번 쳐다볼 뿐 때리지는 않았다.
“이 짝으로 똑 바로서. 어디 4학년이 5학년 선배를, 그것도 일곱 이서 덤벼? 무릎 꿇어 이 시끼들아.”
박현의 호통에 4학년 일곱 명이 동상 앞으로 줄줄이 무릎 꿇었다. 남강이 문승협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김용남을 불렀다.
“어떻게 된 일이여? 다 알고 왔은께 속일 생각 말고.”
“저는 잘 몰라요. 아그들이 동산에 모여있은께 그냥 와 본 거여라우.”
김용남이 모르쇠로 일관하자, 남강이 최선경과 김철종을 불렀다. 가병수까지 셋이 앞으로 나왔다. 최선경이 가병수이야기를 듣고 남강과 박현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하라며 김철종과 함께 보냈던 것이었다. 김용남이 그제야 입을 열었지만 변명에 불과했다.
“실은 동상들이 문승협이한테 혼났다고 불평하길래, 만나서 야그나 한번 해보라고 했어라. 서로 잘 지내는 방향으로 해보라고 했는디, 이렇게 됐어라우.”
“야 느그들, 용남이 말이 맞어?”
“예, 마 맞어라우.”
“그라믄 선배한테 공손하게 야그해야제, 으째 주먹질한 것이어?”
“그냥, 말하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그랬어라우.”
“감격이 격해져도 덤빌 데가 따로 있제, 어디 선배한테 덤빈다냐?”
“우리만 맞고 우리는 한대도 못 때렸는디. 우리가 잘 못했어라우, 용서해주쑈.”
남강이 주위 아이들에게 큰소리로 각자 할 일 하라며 어서 해산하라고 하였다. 구경하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남강이 들은 이야기와 상황을 재빠르게 판단했다. 김용남을 따로 불러 이야기를 하더니 문승협 앞으로 데려왔다.
“문승협, 미안하다야. 동상들한테 이러라고 한 것은 아닌디, 일이 커져부렀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내가 약속하께. 그라고, 맘이 좀 풀리믄 나랑도 친하게 지내자.”
“그래, 사과해 줘서 고맙다. 그런데, 쟤들이 누굴 믿고 그랬겠어, 그 믿음을 좋게 썼으면 한다. 그리고 나한테 친하게 지내자는 말, 같은 편 하자는 뜻이 아닌 친구의 의미길 바래. ”
김용남은 후배들과 최선경, 가병수, 김철종이 있는 앞이라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남강의 지지 없이는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웠다. 결국 문승협에게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약속하라는 남강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문승협은 위선적 화해와 한편으로 회유하는 김용남에게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이번 사건은 남강과 박현의 중재아래 그렇게 수습되었다.
6학년인 남강과 박현은 중학교입시준비로 태권도수업이 없어 문승협에 대해 잘 몰랐으나, 교무실을 다니고 선도부를 하면서 선생들과 아이들에게 들은 이야기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이 계기가 되어 문승협을 달리 보았다.
조동구도 쌈구일당과 동산에서 쭉 지켜보았다. ‘화나서 악하게 하면 멀어지고, 약간의 선함이 모든 걸 이긴다’는 문승협말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작고 순해 보이는 문승협이지만 강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문승협과 아이들이 동산을 내려갔다. 1학년교실 쪽에서 한쪽다리를 절며 내려오는 아저씨가 있었다. 문승협이 얼른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아저씨가 먼발치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최선경도 반갑게 인사하였다. 학교를 지키는 소사아저씨였다. 김철종과 가병수가 문승협과 최선경 옆으로 끼어들었다.
“아따 선경이 말이란께는, 공부고 뭐고 만사 제쳐놓고, 번개같이 움직이드라잉.”
“긍께 말이어, 나도 모른 체할까 비 걱정했는디, 말도 끝나기 전에 뛰드란께.”
“그게 무슨 소리야?”
“남강이 성하고, 박현이 성 야그여. 선경이가 도와달라고 했단께는 즉각 반응이드라고.”
“아, 그냥 동네 친한 오빠들이야, 다른 거 없어. 그렇지 철종아? 너도 같은 동네 사니까 잘 알잖아?”
문승협이 가던 발길을 멈추고 최선경을 바라봤다. 최선경은 자기가 도움을 요청한 것에 문승협이 화났을까 봐 걱정이었지만, 정작 선배 두 사람과 관계에 대해서만 변명하듯 말하고 수줍어하였다.
“잉? 알긴 알제만, 남녀관계를 내가 어떻게 다 아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도 있던디? 허허허.”
“야,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오해하잖아.”
“오해? 누가 오해한다고 저렇게 폴짝 뛰까? 수상한디, 큭큭큭.”
“선경아, 고마워. 잘했어, 선경이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정말 고마워.”
“고맙긴, 도움을 청했다고 화낼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최선경이 김철종의 장난말에 당황하자, 문승협이 고맙다는 말로 마음을 풀어줬다. 최선경은 더욱 부끄러워했다. 이번 일로 김철종은 물론 가병수도 문승협을 온전히 믿게 되었다. 김용남그늘에서 벗어나 한결 자유롭게 지냈다. 최선경도 그동안 문승협을 오해했던 일들이 가병수와 김철종의 설명으로 해소되었다. 가병수와 조동구의 동생들 사건뿐 아니라, 담임을 통해 들은 급식명단 일과 쌈구의 교장선생아들이 개입되었던 일까지, 문승협의 새로운 미담과 선행도 알게 되어 호감에서 좋아짐으로 발전하는 자신을 느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