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무슨 감정일까? - (7)
최선경이 대강당에 가다가 주전자를 들고 내려오는 박진숙과 마주쳤다.
“진숙아, 물 뜨러 가니?”
“잉. 참 선경아, 소풍 때 도시락 맛있게 먹고,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다야.”
“아냐, 맛있게 먹었다니 내가 다 고맙다.”
“아니어, 느그 어무니한테도 감사하다고 인사했어야 했는디, 암튼 고맙다.”
“호호, 그래. 근데, 할머니는 좀 어떻니? 괜찮으셔?”
“잉? 니가 그걸 어뜨크롬 아냐? 너 혹시 문승협이한테 들은 거여? 이 시끼가 참말로, 어디 가서 말하지 마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그만은.”
“아 아니야, 승협이가 말한 게 아니야. 실은.”
최선경이 궁금한 마음이 앞서 얼떨결에 박진숙의 할머니안부를 물었다. 발끈하는 반응에 아차 싶었으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박진숙에게 미안하다며 자신이 알게 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박진숙이 수긍하는듯하였다.
“승협이는 내가 따라간 것도 몰라.”
“…….”
“진숙아, 정말 미안해. 너 화내는 거 이해해, 나라도 그럴 거야. 누구나 숨기고 싶은 일이 있는데, 내가 아는 체했어. 하지만 너도 알잖아, 승협이나 나나, 어떤 악의도 없다는 걸.”
“그래, 느그들이 그런 아그들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제. 근디, 이상하게 화가 나. 뭣이 나를 화나게 하는지 설명은 못하겄는디, 그냥 화가 난단 말이어.”
최선경은 다는 몰라도 조금은 박진숙마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어떻게 위로하고 마음을 달래야 할지 난감했다. 일단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으로 대신하였다. 박진숙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경이 시무룩이 걸어가는 박진숙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자기 일처럼 가슴 아파했다. 설사 문승협에게 혼나더라도 한번 의논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최선경은 학교동산을 속속들이 안다고 자부했다. 특히 계절과 시간에 따라 햇볕이 풍성한 장소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일상처럼 6월의 날씨와 어울리는 곳을 찾아갔다. 적당한 그늘과 햇살이 잘 드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가져온 책 두 권을 보며 어떤 것을 먼저 읽을지 고민했다. 한 권은 아빠가 권유한 ‘박경리의 토지’, 또 한 권은 엄마가 추천한 ‘황순원의 소나기’였다. 책표지를 넘기다 그리 멀지 않은 데에 앉아있는 문승협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다.
“문승협, 안녕.”
“어, 안녕. 점심은 먹었니?”
“그럼, 먹었지. 너는?”
“응, 나도 먹었어. 무슨 책이야?”
“읽으려고 가져왔는데, 너 이거 읽을래? 너 다 읽고 나면, 이거랑 바꿔보자.”
최선경이 박경리의 토지를 건네고, 자신이 읽을 황순원의 소나기를 보여줬다.
“그래, 고마워, 잘 읽을게.”
“저기,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줄래?”
“그러면, 이 책은 뇌물인가?”
“그래, 화내지 말라는 뇌물이야.”
“음. 화낼 일인데 화내지 말라는 건, 나에 대한 어떤 마음이 있다는 뜻인데, 어떤 거야?”
“치, 뭐 그런 걸 물어보냐. 문승협에 대한 신뢰? 그런 거지 뭐.”
“신뢰 말고 다른 건 없고?”
“사람이 신뢰받고 신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건데. 다른 거? 뭘 바라는 거야.”
“하하하. 아냐, 농담이야 농담. 뭔데 그래?”
문승협이 궁금하던 최선경마음을 은근히 떠봤다. 최선경은 의도를 알면서도 부끄러워 회피했다.
최선경이 박진숙의 할머니이야기를 꺼냈다. 우연히 문승협을 미행하였고 그래서 알게 된 사실과 박진숙에 대한 걱정을 말했다. 문승협은 박진숙의 부모와 동생들에 대해 아는 것과 자기 생각을 보탰다.
“친구이기는 하지만, 남의 가정사에 관여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 어른들 일이기도 하고, 더구나 우리 같은 어린애들이 말이야. 그리고, 박진숙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걱정되고.”
“맞아. 그런데,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기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선의라도 받는 사람입장에선 상처될 수도 있으니까, 우리 신중하게 생각해 보자.”
문승협이 박진숙가정에 도움 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고 하였다.
“그런데, 화 안 낼 거야?”
“화를 왜 내. 그럴 수 있어, 이해해. 근데, 다음부터는 미행하지 말고, 궁금하면 그냥 물어봐.”
“알았어, 화 안 내줘서 고마워.”
“그리 고마우면, 나중 내 부탁 한번 들어주시든가.”
“피, 공짜는 없구나? 무슨 부탁일지 궁금한데?”
“분명 약속했다, 나중에 언제 그랬냐고 모른 척하면 안 된다?”
“호호호, 약속할게. 무슨 부탁일지 겁이 다 나네요.”
“하하, 동산에 오니까 좋네.”
사실 문승협은 최선경눈에 띌만한 위치에 의도적으로 앉아있었다. 최선경친구들에게 듣던바대로 동산에 올라가는 최선경을 목격하고 먼발치서 뒤따라왔다. 김철종과 가병수를 따돌리고 오느라 애먹었다.
며칠 후 토요일, 최선경이 박진숙집을 찾아가서 직접 부딪혀보자고 하였다. 문승협의 부작용우려에도 감수하자며 적극적이었다. 두 사람은 같이 가기로 결정하고 뭘 사갈지 의논했다. 문승협이 박진숙자매들을 생각하다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예전에 박진숙이 문현아에게 받은 튀김만두와 가정방문 때 챙겨간 과자였다. 동생들을 위해 가져갔다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조금 더 넉넉히 준비하여 박진숙집으로 갔다.
박진숙이 빨래하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문승협과 최선경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하여 냉랭히 대했다. 그러나 할머니와 동생들이 의외로 문승협을 반가워하였다. 튀김만두와 과자를 좋아하는 모습에 차마 화낼 수 없었다. 최선경이 미소 지으며 박진숙손을 끌어 토방에 앉히고 튀김만두를 집어 주었다. 박진숙이 불편해하며 받기를 주저했다.
“아따 염병하네, 뭔 튀김만두 하나 먹는디, 저렇게 어려우까잉?”
“호호호, 허허허.”
박진숙이 갑작스러운 문승협의 사투리흉내에 피식 웃었다. 최선경과 박진숙의 할머니가 소리 내어 웃었지만, 박진숙의 동생들은 튀김만두를 먹으며 왜 웃는지 의아했다. 박진숙이 웃음을 멈추더니 금세 눈물을 흘렸다. 최선경이 다가가 안아주자 박진숙의 할머니가 달랬다.
“아가, 울지 마라. 친구들도 있는디, 울면 쓰냐.”
“할머니, 저희는 괜찮아요. 우는 사람을 말리는 건 실례래요, 울면서 생각하고 치유하고 성장하는 거래요. 진숙아, 우는 거 창피한 거 아냐, 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도 돼.”
박진숙이 문승협말에 소리 내어 울자, 박진숙의 동생들도 언니를 보며 덩달아 울음을 터트렸다. 박진숙이 동생들에게 울지 마라면서 스스로 감정을 달래 눈물을 닦았다.
다 같이 튀김만두와 과자를 먹은 후, 최선경이 빨래하자며 팔을 걷고 나섰다. 박진숙이 어쩔 줄 몰라하며 만류하였다. 문승협이 작은 마당 우물가에 세워진 고무통을 바로 놓고 마중물을 부어 펌프질 했다. 물을 반쯤 채워 가루비누를 풀면서 할머니와 박진숙의 동생들에게 빨래거리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박진숙의 동생들이 옷가지를 가져오고, 최선경이 방에서 빨만한 이불들을 들고 나왔다. 박진숙이 그제야 체념하고 같이 움직였다. 최선경이 박진숙과 빨래를 하겠다며 문승협에게 대청소를 맡겼다.
문승협은 쓸고, 박진숙의 동생들이 걸레질했다. 문승협이 방청소를 하다 벽에 걸린 박진숙의 가족사진을 보았다. 옆으로 다가온 둘째 박선숙이 다섯 살 때 찍은 거라고 하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박진숙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박선숙이 아버지품에 안겨 찍은 자신의 사진을 보라고 가리켰다. 박진숙의 엄마가 막내 박미숙을 무릎에 앉히고 찍은 사진도 있었다. 사진에 표기된 날짜를 보니 찍은 지 4년 정도 되었다.
각자 맡은 일을 하는 동안, 박진숙과 동생들이 밝아진 표정으로 장난치며 재미있어했다. 박진숙의 할머니가 설거지를 하다 그 광경을 보고 흐뭇해하였다.
문승협이 방과 마당 청소를 끝내고 다시 펌프질해 우물을 길러주었다. 박진숙과 최선경이 발로 밟아 빤 빨래를 깨끗이 헹궈 마당 한가운데 놓인 빨랫줄에 널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마무리 정리가 끝나갈 무렵, 최선경이 지나가는 하드장사아저씨소리를 듣고 불러 세웠다. 박진숙의 동생들과 아이스하드를 사 왔다. 적당한 노동 후에 먹는 아이스하드라 더욱 맛있었다.
문승협과 최선경이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박진숙의 동생들이 아쉬워하며 언제 또 오는지 물었다. 다음 주에 와서 공부도 함께 하기로 약속하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박진숙의 할머니가 모든 게 새것이 된 기분이라며 좋아했다. 이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고 눈물을 훔쳤다. 박진숙이 할머니를 달래듯 껴안았다.
문승협과 최선경이 가겠다며 인사했다. 박진숙의 할머니가 문승협과 최선경의 손을 부여잡으며 연신 고맙다고 하였다. 둘이 한 번씩 할머니를 안아드렸다.
박진숙이 배웅하러 따라 나왔다. 셋이 걸어서 바다와 시내가 내려 보이는 곳에 앉았다. 박진숙이 잠시 뜸 들이다 자신의 가정사를 이야기하였다.
박진숙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뱃일을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행복한 가정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3년 전 태풍으로 다리를 다쳐 더 이상 뱃일을 할 수 없게 되면서 불행이 시작되었다. 일자리를 잃은 상실감과 생활고로 술에 의존하면서 자주 술주정을 했다. 그때부터 만류하는 엄마의 잔소리에 폭력을 휘둘렀다. 반복되는 폭력에 견디지 못한 엄마가 결국 집을 나가버렸다. 박진숙의 엄마는 식당 일을 하면서 세 달에 한번 정도 집에 들를까 말까 하였다. 박진숙의 아버지는 맨날 취해서 부랑자처럼 떠돌아다니며 집에 안 온 지 꽤 오래되었다. 할머니가 폐지와 공병을 팔아 근근이 생활하는데, 요즘은 치매증상까지 있어 그조차도 쉽지 않다고 하였다.
“진숙아, 어려운 이야기인데, 말해줘서 고마워.”
“아니어, 내가 고맙제. 그래도 말하고 난께, 나도 쪼까 마음이 편해졌다야. 승협이도 고맙고.”
“그래 진숙아, 감정을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아, 그 감정과 마주하고 대화해야 해. 네가 가장 두려운 게 무엇인지, 또 원하는 건 무엇인지 말이야.”
“승협아, 근디 잘 모르겄어. 어른들 일인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거 같고.”
“이 일은 네 책임이 아니야, 네 잘못도 아니고. 지금이라도 너 자신에게 물어보고, 솔직하게 대답해 봐. 그러면, 적어도 네가 바라는 방향은 보일 거야.”
“방향이 보이믄, 그대로 된다냐?”
“행복하고 싶다면, 행복을 찾는 훈련을 계속해야 해, 긍정의 생각도 훈련의 하나야.”
“그란께, 훈련을 한다고 행복해지냐고?”
“진숙아, 너희 할머니께도 말했었는데. 행복은 찾아오는 게 아니고, 우리가 찾아가는 거야. 이젠 선경이도 있고 나도 있으니까, 방법이 생길 거야, 힘내자.”
박진숙은 문승협과 최선경의 위로가 고마웠지만, 문승협말처럼 세상이 자기편에 서줄 정도로 너그럽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희망도 갖지 않았고 큰 의미도 두지 않았다.
박진숙이 어깨가 축 처져서 집으로 들어갔다. 문승협과 최선경은 박진숙마음을 충분히 어루만져줄 수 없는 자신들의 능력을 무척 아쉬워했다.
“승협아, 진숙이 부모를 한번 만나보면 어떨까?”
“우리가? 나쁠 것 같진 않은데? 괜찮은 생각이야.”
“우리가 어리다고 무시하진 않을까?”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도 어리다는 건, 어른들 생각이지. 우리 함께 고민해 보자.”
최선경은 바래다주고 가는 문승협뒷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키가 좀 작다고 생각도 작을 거라는 편견은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리자 편견이 아닌 진리라며 입을 씰룩거렸다.
문승협은 집으로 가면서 누군가를 도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문득 아이스하드를 먹으면서 코에 묻힌 최선경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마음이 참 따뜻한 아이라고 생각하였다.
문승협은 월요일방과 후부터 박진숙아버지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일단 박진숙아버지를 만나기라도 해 보자는 심산이었다. 수소문하여 찾아 나선 지 3일째에 박진숙가족사진에서 봤던 비슷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 남자를 발견한 곳은 선창가 수산물시장이었다.
그 남자가 어묵상점 쓰레기통을 뒤졌다. 팔다 버린 어묵쪼가리를 비닐봉지에 담더니 메고 있는 망태에 넣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더 거쳐 쓰레기통을 뒤져 담고 어딘가를 향해 움직였다. 문승협은 아는 체할 타이밍을 잡으며 뒤따라 갔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인지, 다리가 불편해서 절뚝거리는 것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지저분한 옷은 말할 것도 없이 얼굴과 손은 시커멓고,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에는 각종찌꺼기들과 음식물이 범벅되어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서워 피할 정도였으며 위생도 걱정스러웠다. 그 남자가 계단을 한참 올라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인적 드문 곳에 앉아 술병을 꺼내 병째로 들이마셨다. 망태에서 음식물을 담았던 비닐봉지를 꺼내 손으로 집어먹었다. 문승협이 설마 해치진 않겠지 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 남자가 흠칫 경계하며 살기에 찬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았다. 눈빛을 본 순간 너무 무서워 그냥 지나쳐갔다. 진짜 당황스러운 건 막다른 골목이었다. 길을 잘못 찾은 마냥 태연하게 길을 다시 거슬러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침착하려 애썼으나 엄청 떨렸다. 다행히 그 남자는 먹고 마시는데 집중했다. 문승협은 자기 걸음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스스로 쫄보라고 자책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수확이 있었다고 애써 위안 삼았다. 그 남자가 있던 곳은 길 끝에 밭이 있는 인적 드문 막다른 골목이었다. 골목 밖에서 보면 움푹 들어가 잘 보이지 않는 엄폐된 장소였다. 비를 피할 정도의 양철처마와 종이박스가 깔려있는 것이 아지트 같은 근거지로 보였다. 문승협은 다시 가보려 했으나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번을 망설이다 들키지 않게 동태만 살피기로 자신과 타협하고 숨죽이며 다가갔다. 그 남자가 드러누워 눈감고 있는 게 이상하여 좀 더 가까이 갔다. 전혀 움직임이 없어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살금살금 옆으로 가 바르르 떨리는 손을 코에 가져다 대보았다. 다행히 숨은 쉬었으나 역겨운 악취가 코를 찔러 순간 구역질이 나올뻔했다. 술 취해 잠든 모습이 생각보다 처참해서 절망스럽고 난감하였다. 어찌할지 고민하다 가방에서 연습장을 꺼내 간단히 메모했다. 연습장을 찢어 접은 후 그 남자손에 살짝 꽂아놓았다.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지는 걸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아기들은 부모로부터 버려지는 걸 가장 두려워합니다. 다시 찾아뵐게요. 박진숙의 친구, 문승협 올림.’
문승협이 그 남자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다독이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다음날, 문승협은 두려운 마음에 김철종을 데리고 갔다. 그 남자가 자리에 없어 골목입구 계단에서 기다렸다.
“진숙이네 아부지가 맞긴 맞어?”
“내 예감에는 확실해.”
“그러다 아니믄 으짤라고 그냐?”
“차라리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니가 뭔 소리한지 모르겄다.”
“철종아, 이건 절대 비밀로 해야 해, 알았지?”
“알았단께, 알았다고 몇 번을 말하냐, 걱정 말어. 근디, 진짜 여그에 있다고?”
“응, 절대 놀라거나, 무섭다고 도망치면 안 된다.”
“잉, 알았어. 근디, 상상이 잘 안 간다.”
멀리서 들리던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절름발이 땅 거지, 다리병신 왕 거지, 산적 같은 개 거지’라는 노래 같은 놀림이 명확히 들렸다. 곧이어 코너를 돌아 계단을 올라오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가 계단을 올라오다 쫓아가듯 위협하자, 놀리며 뒤쫓아오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그 남자가 문승협과 김철종을 보고 멈칫하다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계단까지 올라와 돌을 던졌다. 문승협이 나서 아이들을 쫓아 보냈다. 김철종이 엄청 놀란 표정으로 숨죽여 말했다.
“오매오매, 이거 진짜네잉?”
“쉿, 조용히 해.”
문승협은 스스로 진정시킨 뒤 가보자며 신호를 보냈다. 김철종이 심호흡하고 앞장서라며 손짓했다. 문승협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김철종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뒤따랐다. 그 남자가 눈을 감고 벽에 기댄 채 두 다리를 펴고 앉아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진숙이 친구입니다, 어제 왔었던.”
그 남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문승협은 화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조금 안심되었다.
“아저씨, 죄송합니다. 아이들이 불쑥 나타나 이러는 거, 화나고 불쾌하시리라 생각해요. 더구나 진숙이 친구들이니, 더욱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죄송합니다.”
그 남자가 갑자기 눈을 떴다. 문승협과 김철종이 움찔하였다. 문승협이 용기 내서 말을 이어갔다.
“저희들이 아직 어려서 아저씨마음은 잘 모르지만, 진숙이 선숙이 미숙이 마음은 알아요. 그래서, 아이들 마음만이라도 이야기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그 남자가 다시 눈을 감았다. 문승협은 긍정신호로 알고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어제 제 메모 보셨어요? 어른들은 사회가 세상이라면, 저희 아이들은 부모가 세상이에요. 그래서 사회에 버림받은 어른들 마음은 몰라도,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마음은 잘 압니다. 우리는 살아보지 않은 어른들 세상은 몰라서, 사회에 버림받았다고 자멸하는 인생을 사는 어른은 관심 없어요. 그렇지만, 부모에게 버려진다는 두려움에 아이들이 자멸당하는, 그것도 가장 사랑받아야 할 아버지로부터 절망에 빠진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많아요. 더욱이 친구의 경우라면 남일 같지 않거든요. 우정과 의리가 어른들만의 것은 아니니까요.”
드디어 그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몇 살이냐?”
“진숙이가 12살, 선숙이 9살, 미숙이 6살이에요. 애들은 몰라요, 오늘 일은 영원히 비밀로 할 겁니다.”
문승협은 자기 나이 대신 박진숙자매들의 나이를 알려주었다. 자식의 이름과 나이를 들으면 조금이라도 동요할 거라는 의도에서였다.
“나는 절망인께, 그냥 모른 체끼 해주믄 안 되겄냐?”
“아저씨, 도움 안 받아 보셨죠.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미숙하면 도움받아야 해요. 아이들에게는 이리저리 도와주고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도저히 못하겠으면 엄마아빠한테 말하라면서, 왜 어른들은 정작 자기 일에 도움 받길 죽음만큼 싫어해요?”
“나도 할 만큼 해봤어야, 도저히 안된께 이 꼴이제.”
“그럼 방법이 있으면, 누군가 도움을 주면, 무엇이든 해볼 생각은 있으세요?”
“…….”
“딸들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용기 내보세요. 그리고, 할머니가 요즘 치매증상이 있어요. 아저씨가 끝까지 주저앉으면, 아이들의 불행을 멈출 수 없어요.”
“…….”
“다시 올 테니, 잘 생각해 주세요. 혹시 마음이 있으시면, 면도도 좀 하시고 씻으셨으면 합니다.”
문승협이 비상금을 꺼내 박진숙아버지 곁에 두고 일어났다. 긴장이 다소 풀리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문승협은 김철종과 돌아가는 길에 최선경을 만나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먼저 박진숙아버지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게 급선무라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당분간 박진숙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틀뒤, 박진숙동생들과 약속한 날이었다. 문승협과 최선경이 만나는 장소에 김철종도 왔다.
“철종이 넌 왜 왔어?”
“아야, 나는 친구 아니어? 으째 나만 뺄라고 하냐.”
“아니 그게 아니라, 진숙이가 알면 속상해할까 봐 그러는 거야.”
“내가 좋은 선물을 갖고 왔은께, 일단 들어 나 보고, 나를 데려가든가 말든가 하쑈.”
“좋은 선물? 뭔데?”
“내가 느그 말 듣고, 우리 아범한테 말했잖애.”
“무슨 말?”
“진숙이 아부지 야그여. 좋은 일자린지는 모르겄는디, 시방 우리 아범회사에서 직원을 뽑는단다야.”
“다리를 다쳐서 불편한데, 괜찮을까?”
“잉, 내가 그것도 말했제. 근디, 앉아서 하는 일이라, 본인만 괜찬하믄 암시랑 안 하대.”
“그래? 그거 참 잘됐다. 와, 철종이 진짜 한 건 했네.”
“그라믄 나도 같이 갈 자격은 생긴 거제?”
김철종아버지는 쥐포를 일본에 수출하는 회사의 생산부장이었다. 최근 수출물량이 늘어나 생산직사원을 증원해야 했다. 대부분 앉아서 하는 수공업형태작업이라 절음거리는 정도의 다리장애는 상관없었다. 김철종아버지가 어려운 친구가정에 관심 갖는 아들을 대견해하며 동네친구들에게 자랑하였다. 박진숙아버지를 직접 만나볼 의향도 있다고 하였다.
“이것도 한 박스 챙겨주드라, 수출용 쥐포여.”
"우아, 철종이 너희 아빠 멋지다."
“선경아, 그 박스에는 뭐 들었어?”
“진숙이 동생들 주려고, 엄마한테 부탁한 거야.”
“뭔데?”
“크레파스와 스케치북, 종합장과 연필, 멜로디언.”
“와, 엄마가 신경 많이 쓰셨네. 그럼 내가 그 무거운 박스를 들 테니, 네가 이 과자꾸러미를 들어.”
셋은 준비한 물건을 챙겨 들고 박진숙집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이 즐거워서 언덕길도 가뿐했다.
박진숙이 밝은 미소로 문승협과 최선경을 맞이했다가 김철종을 보고 놀랐다. 행여 김철종을 통해 학교에 알려질까 봐 걱정스러워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문승협이 갑자기 박진숙을 대신해 김철종에게 가라고 윽박질렀다. 박진숙이 난처해하다 마지못해 김철종에게 들어오라고 하였다. 문승협의 역지사지 술책이 통했다.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간단히 청소를 했다. 박진숙의 동생들이 최선경에게 그림과 동요를 배우는 사이, 문승협은 산수를 가르쳐 주려고 연습장에 구구단을 썼다. 김철종은 할머니말벗을 해주고 동생들과 장난치며 놀아주었다. 집에 갈 즈음에는 김철종이 제일 인기 있었다. 문승협과 김철종은 다음날 박진숙의 아버지를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최선경은 박진숙의 엄마를 수소문해 보기로 하였다.
문승협과 김철종이 박진숙아버지를 만나러 갔을 때는 여기저기 널려있던 공병이나 쓰레기 같은 물건들이 치워져 있었다. 근거지가 종전과 다르게 나름 정리된 느낌이었다. 기다린 지 꽤 시간이 흘러 오후 네 시쯤 되어서야 박진숙아버지가 왔다. 머리와 수염이 짧아지고 얼굴을 씻은듯했다. 옷도 빨아 입었으나 지저분한 모습에 냄새가 나는 건 어쩌지 못했다. 문승협이 단도직입적으로 김철종아버지가 만나고 싶어 하니 한 번만 만나보자고 설득하였다. 박진숙아버지는 여전히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김철종이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다 박진숙할머니이야기를 꺼냈다.
“아자씨, 진숙이 할무니, 긍께 아자씨어무니지라우. 어제 할무니가 내 손을 잡으믄서, 눈물이 그렁그렁해갖고 뭐라 한 줄 아요? 기억을 더 잃기 전에, 아들얼굴 한 번만 봤으믄 소원이 없겄다고 합디다.”
김철종이 할머니말벗을 해줬을 때 들은 이야기였다. 박진숙아버지가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제가요, 우리 아부지한테 처음 칭찬받았어라우. 세상 살믄서 친구도 돕고 그렇게 어울려 사는 거라믄서, 아들 철들었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닙디다. 그란께요, 우리 아부지 믿고 한번 만나만 보쑈?”
망설이는 박진숙아버지에게 용기가 필요해 보였다. 김철종이 한마디를 더 보탰다.
“아따, 지금 우리 아부지가 기다리고 있단께라우. 빨리 갑시다, 우리도 힘들어 죽겄소.”
박진숙아버지가 주섬주섬 일어났다. 자기 행색을 살피며 한숨을 쉬었다. 문승협이 한마디 거들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철종이 아빠도 대충은 알고 계시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면목은 없지만, 그라믄 가보자.”
문승협과 김철종이 마주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둘은 신이 나서 앞장서 갔다. 혹시나 가는 도중에 박진숙아버지가 마음 변해서 다른 곳으로 갈까 봐 잘 따라오는지 여러 번 뒤돌아보았다.
김철종아버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박진숙아버지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오메오메, 왔소. 그래, 정말 잘 왔소. 아그들한테 다 들었은께 부끄러워 마쑈잉.”
“…….”
“아야, 느그는 느그 알아서 가 놀아, 여그는 어른들끼리 알아서 할란께.”
문승협과 김철종은 가라는 말에 뻘쭘하였다. 그러나 감사한 마음으로 얼른 자리를 비켜줘야 했다.
“어이 남사장, 박사장. 거 준비한 것들 갖고 오소.”
“잉 알았네, 언능 가져감세.”
“이거 입고 신었던 것인께, 절대 부담 갖지 마쑈잉.”
“저그 목욕탕에 이야기해 놓았은께, 이거 들고 가서 일단 씻고 갈아입읍시다.”
호형호제하며 한 동네에서 사는 남강과 박현의 아버지들이 옷가지와 신발을 가져왔다. 김철종아버지가 목욕탕으로 안내하였다. 문승협과 김철종은 목욕탕에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자리를 떴다. 아버지들의 환대에 감동하며 그냥 걸었다.
“철종아, 너희 아빠께 감사드려야겠다.”
“안 그래도 되아, 우리 아범이 좋아서 한 것인께.”
“좋아서 하다니, 무슨 뜻이야?”
“그런 거 있어, 나중에 야그 해주께.”
“뭔데 그래, 말해봐.”
“어허, 보채지 마란께. 그나저나, 선경이도 알믄 좋아라 할 텐디, 안 그냐?”
“그러게, 많이 좋아할 텐데.”
“음마, 귀신도 지 말하믄 온다드만, 저그 온다. 근디, 저러코롬 이쁜 귀신이 있으까? 큭큭큭.”
“야 김철종, 너 나보고 뭐라 했지?”
“음마, 귀신은 귀신이다야.”
“하하하, 우연치고는 재미있다.”
“뭐야, 승협이 너도 내 이야기한 거야? 슬슬 기분 나빠지려고 하는데?”
“아냐, 진숙이 아빠가 왔어. 지금 목욕탕에 갔고, 어른들끼리 이야기하시겠데.”
“정말? 어머, 진짜 잘됐다. 나도 진숙이 엄마가 어디 있는지 알았어. 승협아, 내일 같이 가보자, 응? 나 엄청 떨릴 거 같아서 그래.”
“그래, 그러자.”
“뭣이어, 이 남녀가 나만 빼고, 내일 둘이서 연애질 하겄다는 거여? 고렇게는 안되제, 내가 필히 중간에 껴갖고, 고춧가루를 확 뿌릴 것이어.”
박진숙아버지가 말끔해진 모습으로 목욕탕을 나왔다. 아버지들은 삼겹살에 소주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논의했다. 박진숙아버지는 출근하면 술을 끊고 회사 일에 충실하겠다며 세 아버지들에게 다짐하였다.
“그래야지라우, 지금은 술이 병인께. 나도 사실 그것이 쪼까 걱정됐는디, 다짐해 준께는 고맙소야. 그라고, 인자는 아그들 봐서 그라믄 안 되지라우.”
“술이 술을 먹고 그러다가 사람까지 잡아먹고, 평시에는 암시랑 안타가 술만 먹으믄 개 된다는 말도 있지라우. 그란께, 일단 술은 끊는 게 맞고요. 그것이 쉽지만은 않은디, 까짓것 같이 한번 이겨내 봅시다.”
“일주일 참으믄, 상으로다가 주말에 우리끼리 한잔하믄 쓰겄그만, 하하하.”
“그럽시다, 허허허.”
“정말, 진짜로, 참말로 고맙소. 이 은혜는 내가 평생 갖고 갈라요.”
세 아버지들의 걱정과 격려에 박진숙아버지가 재삼 다짐하고 가슴 깊이 새겼다.
박진숙아버지는 김철종아버지가 다니는 회사에 취직하기로 했다. 정식출근 때까지는 당분간 회사경비업무를 도우며 숙직실에서 기거하기로 하였다.
김철종이 기어코 문승협과 최선경 사이에 끼었다. 셋은 방과 후에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검문소가 있는 종점에서 내렸다. 제법 큰 호수를 지나 유원지에 있는 닭백숙식당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박진숙의 어머니가 있다는 식당을 찾아갔다. 두 번째 식당문을 열고 들어가 인기척을 냈으나,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한적하고 사람이 없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주위를 살폈다. 식당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쓴 아주머니가 마늘을 까고 있었다. 박진숙가족사진에서 봤던 박진숙의 어머니였다.
“어떻게 왔으까? 점심장사는 폴쎄 끝났는디.”
“저기, 아주머니, 진숙이 엄마 맞으시죠?”
“잉? 우리 진숙이를 안가?”
“네, 저희는 진숙이 친구예요. 안녕하세요.”
“음마, 진숙이 친구들이 으짠 일로 왔으까? 여그는 어뜨크롬 알고?”
박진숙어머니가 놀라 몸빼바지에 손을 닦으며 일어났다. 최선경이 드릴 말씀이 있어 왔다고 하자, 박진숙어머니가 머리에 쓴 수건을 풀어 평상을 닦으며 앉으라고 하였다. 식당에 가서 복숭아를 씻어왔다.
“묵어봐, 제철과실이라서 여간 달아.”
“네, 잘 먹겠습니다.”
박진숙어머니가 복숭아를 하나씩 쥐어주었다. 문승협과 김철종은 한입 베어 물었지만, 최선경은 복숭아를 받아 들고서 차분히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였다.
박진숙어머니가 이야기 중간중간 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몹시 마음 아파했다. 최선경의 이야기가 끝나자, 자식들이 불쌍하고 미안하다면서도 남편에 대한 불신을 들어냈다.
“내 새끼들 땜시 이 먼 곳까지 왔는디 으짜까잉. 진숙이 애비가 그렇게 되고, 몇 년간 나한테 한 짓이 있어.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믄, 끔찍하고 소름 돋아갖고 용서가 안 돼야. 이것은 어른들 일인께, 어른들이 알아서 할 것이어. 느그들 마음은 고맙다마는, 신경 끊어 불고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 늦으믄 안 된께, 얼른 묵고 가.”
문승협이 평소의 침착함을 잃고 울컥해서 목소리가 커졌다.
“아줌마, 죄송합니다만 참 이기적이시네요. 세 딸의 인생이 걸렸는데, 어떻게 어른들만의 일인가요? 부모에게 버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들 마음은 생각해 보셨어요? 부모들의 선택에, 아이들은 선택할 기회조차도 없이 불행해야 하잖아요.”
“아야 아가, 니가 내 가심을 찌른다마는, 내 생각은 변함없을 것이다. 에미가 되어갖고 새끼들 생각하믄 억장이 무너지제. 그란디, 그 인간은 틀렸어. 애비가 돼갖고 책임감 없이, 지 인생을 지가 조져분디 으짜겄어? 그라고, 내 인생은 으짜고?”
“그래요, 물론 아줌마 인생도 중요하죠. 하지만, 적어도 자식들이 우리 엄마가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은 들어야, 엄마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린것이 시답잖은 말로 어른 말꼬리 잡지 말고야, 말 다했으믄 어여 가그라.”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감정이 격해져서.”
“괜찬해, 죄송할 거 없은께 얼른 가.”
“아줌마, 안 믿기시겠지만. 좀 전에 선경이가 말한 대로, 진숙이 아빠가 술도 끊고 취직도 하고, 아이들과 가정을 위해서 나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어요. 여기 철종이 아빠에게 도움도 받고, 술 안 마시고 성실하게 회사에 다니겠다는 다짐도 했고요.”
문승협이 불쑥 주머니에서 오백 원짜리 지폐를 꺼내 아무렇게 찢었다.
“이 돈 찢어졌다고 버리지 않잖아요, 어떻게든 붙여 쓰잖아요. 하물며, 사람에게 상처가 좀 있다고 버리면 안 되잖아요.”
“돈은 사람멩키로 마음과 정신이 없은께, 그냥 붙여 써도 탈이 없제만. 사람은 또 발병하고 그래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어.”
최선경과 김철종은 할 말을 잃어 휘둥그렜다. 문승협도 숨이 턱 막혔으나 지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렇지만 사람에게는 가족이 있잖아요. 엄마, 아빠, 할머니 그리고 세 딸. 언제든 따뜻하게 보듬어줘서 회복 가능한, 힘들면 의지할 수 있어 힘이 되는, 부족하면 아낌없이 그냥 보태주는 가족이요.”
“뭔 말인지 알았은께, 인자 고만해. 나 저녁장사 준비해야 된께, 싸게 가그라.”
“마지막으로 이것만 생각해 보세요, 엄마한테 버림받을까 봐 매일 두려움에 떠는 세 딸이요,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좀 지나친 건 용서 바랍니다.”
문승협일행은 쫓기듯이 발길을 돌렸다. 박진숙어머니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계속 닦아냈다.
“선경아, 아까 진숙이 엄마한테 준 게 뭐야?”
“우리 집 전화번호, 혹시 몰라서.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시라고 했어.”
“잘했다, 난 미처 생각도 못했다.”
“잘하긴, 승협이 네가 잘했지. 너는 말에 감정이 풍부해, 네 말을 들으면 바로 느낌이 오고 상상이 간다고 할까, 아무튼 그래.”
“워메, 눈꼽 시려서 못 보겄네 참말로, 막 서로 칭찬하고 좋아죽네 죽어.”
이틀 뒤, 박진숙어머니가 최선경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김철종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해서 최선경이 연결해 드렸다. 다행히 김철종아버지가 박진숙아버지 변화를 세세히 설명해 주며 회사도 성실히 잘 다닌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이틀 뒤, 김철종아버지가 문승협과 최선경을 불렀다. 박진숙아버지와 남강과 박현의 아버지도 모여있었다.
“중대 발표다잉, 놀라서 발작하믄 책임 못 진다잉.”
“그라믄 병원차를 미리 부르까라우?”
“허허, 그럴 것까진 없고.”
“뭔디 그란가? 뭔디 이렇게 다 불러놓고 뜸 들인가? 김부장, 얼른 말해보소?”
다들 궁금해서 김철종아버지에게 집중했다. 박진숙아버지는 뭔가 아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진숙이 엄니도, 우리 회사 구내식당에 출근하기로 해부렀어.”
“와따메, 정말 잘 됐그만.”
“정말? 진짜예요?”
“아야 무자게 섭하다, 으째 내 말을 못 믿는다냐?”
“아니 그게 아니고요, 믿기지 않아서요.”
최선경이 총총 뛰며 박수를 치다 문승협을 바라보고 하이파이브자세를 취했다. 문승협이 얼결에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펴주었다. 최선경이 좋아하며 몇 번 마주쳤다. 마지막에 세게 짝하고 부딪치고는 문승협손을 깍지 껴 잡았다. 문승협은 처음 잡아본 최선경손에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렸다. 최선경도 느꼈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슬그머니 손을 풀었다.
“그라믄, 인자 으째되는 것이어?”
“아따 센스가 빤스네, 입 아프게 말해야 안가? 인자 온 가족이 뭉쳐 사는 것이제., 하하하.”
문승협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김철종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남을 돕는 것으로도 자신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김철종의 아버지가 이렇게 적극 도와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박진숙아버지와 비슷한 상황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었다. 살아생전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이해하며 용서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진숙의 어머니가 가정으로 돌아왔다. 누구보다도 박진숙자매들과 할머니가 크게 기뻐하였다. 부부가 함께 출근하게 되면서 박진숙의 가정은 예전 행복했던 시절로 회복되었다.
박진숙은 차림새가 정갈해지고 표정도 밝아졌다. 그러나 언행은 변하지 않았다. 문승협을 대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문승협은 그 점이 서운했다. 뭔가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박진숙이 상냥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친 말은 삼갈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박진숙은 부모가 돌아온 일련의 과정을 전혀 몰랐다. 문승협이 최선경과 김철종에게는 물론이고 박진숙의 부모에게까지도 절대비밀로 당부했기 때문이었다.
박진숙은 요즘 문승협의 소지품이 책상에 그어놓은 선을 넘어오지 않아 심심했다. 때마침 문승협의 일기장이 국경선을 넘자 신나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른 물건이면 전처럼 문승협에게 심통 부리는 재미가 있을 텐데 일기장이라 조금 찜찜했다. 그냥 놀래 키기만 하고 돌려줄 생각으로 문승협을 불렀다. 김철종말에 정신 팔려있어 반응이 없었다. 호기심에 일기장을 슬쩍 들춰 보았다. 자신의 이름이 쓰여있는 부분이 얼핏 눈에 띄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 문승협 몰래 일기장을 가방에 담았다.
하교하여 집에 온 박진숙이 저녁을 먹고 동생들과 놀았다. 막냇동생 박미숙이 언니 허락 없이 책가방을 뒤적이다 뭔가를 꺼냈다. 박진숙이 얼른 빼앗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문승협의 일기장이었다. 비밀스러운 남의 일기를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양심이 찔려 망설였다. 궁금했던 자기 이름이 있는 부분만 읽어보겠다며 스스로 타협했다. 마침내 문승협의 일기장을 펼쳤다.
문승협이 서울로 간 엄마랑 헤어진 날 쓴 일기에 박진숙도 눈물이 났다. 가정방문 때 얼핏 듣기는 했지만 문승협에게 슬픈 가정사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문승협의 부모와 할머니, 동생에 대한 내용은 동정이 가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내색하지 않는 문승협이 대단해 보였다.
박진숙은 판도라상자를 열어버린 것처럼 순간 문승협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빨리 자기와 관련된 내용만 찾아봐야겠다며 서둘러 자기 이름이 나왔던 부분을 찾았다. 일기를 읽어가던 박진숙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일기에는 박진숙의 부모가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과정과 내용이 담겨있었다. 다행히 거지처럼 처참했던 박진숙의 아버지 상황은 문승협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간략히 기록되어 있었다. 박진숙은 부모 스스로 타협하고 선택한 줄로만 알았다. 문승협의 주도였다는 사실에 창피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 혼란스러웠다. 더 이상 읽을 수 없어 일기장을 덮었다. 엄마목소리를 듣고 건너 방으로 갔다.
“어무니, 물어볼 것이 있는디.”
“그래 우리 큰 딸내미, 뭔 디야?
“아부지도 솔직하게 말해주쑈잉?”
“뭔디 그라고 뜸 들이냐?”
박진숙이 문승협의 일기장에서 본 내용을 물었다. 박진숙의 부모는 당황하고 또 부끄러웠다.
“어뜨크롬 알았냐? 승협이가 말하디?”
“승협이 그 시끼가 말할 놈이요?”
“아니믄, 선경이냐? 철종이?”
“뭐라고라, 그것들도 아요? 으짜까잉, 창피해갖고 내일부터 학교도 못 가겄네.”
“그라믄 어뜨크롬 안 건디?”
“지금 그것이 중하요?”
“실은, 그동안 뭔 일 있었는지, 니 할무니 하고 동상들한테 들었어. 에미애비 없을 때, 승협이랑 아그들이 우리 집에 와갖고 한일 말이어. 안 그래도 너한테 말할라고 했어야.”
박진숙의 무모는 문승협이 신신당부하며 절대 비밀로 하자는 부분만 빼고 이야기했다. 문승협이 만에 하나 딸들이 아버지의 처했던 상황을 알면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부분은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었다.
박진숙은 부모에게 이야기 듣고 문승협뿐 아니라 최선경과 김철종도 고맙게 생각하였다.
“진숙아, 그래서 말인디. 승협이하고 그 아그들을 우리 집에 한번 불러갖고, 뭣 쫌 먹였으믄 한디. 니 생각은 으짜냐?”
“그라쑈, 그렇게라도 해야 나도 맘이 좀 편하겄소.”
박진숙은 떨떠름했지만 창피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문승협과 최선경 그리고 김철종을 새삼 다시 보았다. 자기 방으로 돌아와 잠자는 동생들 배를 덮어주면서 어떻게 일기장을 돌려줘야 할지 고민하였다.
박진숙이 평소와 달리 아무도 안 왔을 시간에 일찍 등교했다. 문승협의 책상서랍에 있는 책과 공책들 사이에 일기장을 넣어놓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안심되었다.
문승협이 등교하여 자리에 앉자, 박진숙은 찔린 마음에 인사를 건네고 아차 싶었다.
“왔냐?”
“어? 안녕. 웬일이야, 안 하던 인사를 다하고?”
“염병, 인사는 무슨. 그냥 왔냐고 했제, 뭔 인사를 했다고 그라냐?”
“그게 아침 인사지, 인사가 뭐 별거냐? 그래, 뭐라 안 하거나 욕이 빠지면 박진숙이 아니지, 하하하.”
“앞으로 욕 안 하믄 될 거 아니어. 근디 너는 꼭 멋쩍으믄 빈 웃음 짓드라잉, 하하 하고.”
“뭐라고? 앞으로 욕을 안 한다고? 뭐지, 박진숙이 아닌 다른 여자의 향기가 나네.”
“아따 아침부터 지랄염병하고 자빠졌네 진짜.”
“아 알았어, 여기까지. 오늘은 진숙씨가 기분이 좋은가 본데? 아니면, 나한테 뭔가 찔린 게 있던지.”
박진숙은 고맙고 좋아도 항상 반대로 말했다.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다. 자기감정을 마주하기 두려워 숨기려 하였다. 문승협은 박진숙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문승협이 박진숙과 시비를 정리하고 서둘러 책상서랍을 살폈다. 어제 집에 가서야 일기장이 없어진 걸 알았다. 책과 공책들 사이에 있는 일기장을 찾고서야 마음 놓았다.
박진숙이 들킬까 걱정하며 곁눈질로 문승협을 주시했다. 일기장을 가방에 넣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근디 말이어, 그간 선 넘은 물건들이 나한테 뺏긴 게 아니라, 다 니가 나한테 줄라고 거짓갈로 그랬다믄서?”
“뭔 소리야? 그럴 리가, 그게 돈으로 치면 얼만데? 그럼 지금이라도 전부 돌려주든가?”
문승협이 깜짝 놀라 급 정색하였다. 부정하는 것이 먼저라 화내듯 말하긴 했으나 의문이 들었다. 일기장에 있는 내용을 박진숙이 말했다는 것과 가방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일기장이 집에 가서 보니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교차되면서 박진숙을 혹시나 하고 의심했다.
박진숙은 자신이 말하고도 놀라 자빠질 뻔하였다. 화제를 돌리려고 별생각 없이 한 이야기였으나, 어제 읽었던 문승협의 일기장에 쓰여있던 내용이었다. 눈치챌까 싶어 얼른 수습에 나섰다.
“아니믄 말고. 하기사, 니가 그렇게 천사는 아닌께.”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천사 한번 돼보고 싶다.”
“지랄, 언감생심.”
“야, 너 좀 전에 욕 안 한다고 하지 않았냐?”
“염병, 지랄이 욕이냐?”
“어휴, 관두자, 내가 말로 너를 어찌 감당하겠니.”
박진숙은 속으로 ‘승협이 니가 진짜 천사 맞어’라고 말하며 고마움의 미소를 지었다.
최선경이 화분을 하나 샀다. 문승협과 김철종이 교대로 들고 박진숙집에 도착했다.
“아줌마, 덴드롱이라는 꽃이에요. 꽃말이 우아한 여성, 행운이래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따 그냥 오지 그랬냐. 꽃이 하얗고 빨간 것이 이쁘다잉, 고맙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잘 계셨지라우.”
“그래, 어서 와라, 어여 들어와.”
“와, 승협이 오빠다.”
셋은 초대해 준 박진숙의 부모와 할머니에게 인사했다. 박진숙의 동생들도 토방에 서서 반겼다. 박진숙의 어머니가 닭백숙과 갖가지 음식을 차려놨다. 모두 둘러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다. 박진숙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닭을 뜯어 닭다리를 나눠주었다. 어느 정도 먹고 나자 이번엔 죽을 떠서 주었다.
“나는 커서 승협이 오빠한테 시집갈래.”
“야, 언니가 먼저야, 너는 언니 가고 나서 가.
“느그들 언니 창피하게 진짜 그럴래? 좀 조용히 밥이나 먹으란께.”
막냇동생 박미숙이 죽을 떠먹으며 문승협을 쳐다보고 뜬금없이 말했다. 무뚝뚝한 둘째 박선숙도 막냇동생을 의식해 한마디 하고 문승협을 힐끔힐끔 보았다. 박진숙의 동생들이 느닷없이 문승협에게 시집간다며 티격태격해 모두 웃었다. 박진숙이 동생들을 핀잔하였다.
“야, 문승협은 언니가 갈 텐께, 너는 김철종한테 가.”
“싫어, 나는 승협이 오빠가 좋은디?”
“아따 아가씨들, 나를 앞에다 두고 서로 싫다니, 허벌나게 섭하요.”
박진숙의 동생들은 언니핀잔에도 문승협 쟁탈전을 이어갔다. 먹는 도중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순도순 웃음꽃이 피었다. 식사가 끝나고 박진숙의 어머니가 참외를 가져와 깎았다. 가정이 회복되기까지 지난 과정을 거론하면서 연신 고맙다고 하였다.
“아줌마, 인자 그런 말 마쑈. 우리가 다 부끄럽단께라우. 안 그냐 승협아?”
“맞아요 아줌마, 이제 그런 말 그만하세요. 그동안 마음 고생한 진숙이도 있잖아요. 박진숙, 초대해 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행복해라.”
박진숙이 고개 숙여 울먹울먹 하다가 갑자기 대성통곡했다. 박진숙의 두 동생들도 덩달아 울었다. 최선경이 박진숙어깨를 감싸 안으며 달랬다. 박진숙이 최선경을 껴안고 울었다. 문승협과 김철종도 머쓱해져 두 동생들을 달랬다. 박진숙이 밖으로 뛰쳐나가자 최선경이 뒤따라갔다.
“진숙아 왜 그래, 왜 우는 거야? 부모님 무안하시겠다, 그만 울어라.”
“아니, 문승협이 저 시끼 때문에 우는 거여. 지도 힘들 것인디, 나한테 행복 하라냐.”
“무슨 말이야? 승협이가 왜? 뭐가 힘든데?”
“내가 우연히 승협이 일기장을 봤는디, 저 시끼도 지금 엄마랑 헤어져 살드라고. 지도 슬픔이 있으믄서 나한테 행복 하란께, 나도 모르게 울음이 쏟아져 부냐. 그라고야, 내가 책상에 선 그어놓고, 승협이 물건이 넘어오믄 뺏어서 동생들한테 갖다 줬는디. 갖다 줄 때마다 동생들이 승협이 오빠가 준거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디, 나중에 알고 본께는 승협이가 학용품 같은 것을 의도적으로 넘어오게 해서, 내 동생들에게 갖다 주게 한 것이더란께. 그뿐이 아니어, 내가 학교에서 맨날 욕하고 나쁘게 대했는디, 한 번도 화낸 적이 없었어야. 저 시끼는 아마도 천사가 아닌가 싶어.”
“그랬었구나, 나는 전혀 몰랐네.”
최선경은 박진숙을 달래면서 박진숙보다 문승협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묘한 질투를 느꼈다.
“진숙아, 일기장은 어떻게 된 거야?”
“아, 어뜨크롬 하다가 살짝 봤어야, 아주 쬐깐.”
“다른 건 못 봤어? 뭐, 내 이야기 같은 그런 거.”
“다른 건 못 봤제, 딱 그거만 살짝 본 것이어. 이거 승협이한테 절대 비밀이다잉?”
“아 알았어, 그럴게.”
박진숙이 안정을 찾아 집으로 들어갔다. 최선경은 문승협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 속상했다. 박진숙의 이야기 때문인지 참외를 먹는 둥 마는 둥 문승협에게 시선이 가있었다. 문승협이 최선경과 눈이 마주치자 왜 그러냐는 듯 눈짓으로 물었다. 최선경이 문승협시선을 피하며 말문을 열었다.
“참, 둘째 선숙이 학교문제도 잘 해결될 것 같아요, 저희 담임선생님이 도움주기로 했어요.”
“오성희선생님이? 와, 잘됐다.”
“승협아, 인제 그만 일어나자.”
“그래, 그러자.”
“오늘 너무 맛있게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할머니 건강하시고요.”
“그래, 조심히들 가라잉.”
“승협이 오빠 잘 가.”
“아가씨들 나는?”
“철종이 오빠는 잘 가든가 말든가.”
“우쒸, 허허허, 그래 다음에 또 보자잉.”
박진숙의 부모가 배웅하려고 나오려 했으나, 김철종이 만류하였다. 박진숙이 대문 앞까지 나왔다.
“다들 너무 고마워서 으짜까?”
“친절을 베풀고 대가를 바라면 친절이 아니야, 진숙이 너의 그런 마음이면 충분해.”
“음메 재수 없는 거, 승협이 니는 무슨 신선이냐?”
“하하하, 우리 갈게, 학교에서 보자.”
셋이 흐뭇한 마음으로 가로등불빛을 지르밟으며 걸었다. 최선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잘돼서 다행이다.”
“그러게, 철종이 도움이 컸어.”
“아니어, 내가 뭐 한 것이 있다고.”
“선경이도 잘했고. 선경아, 칭찬해.”
“아냐, 승협이 네 생각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어. 문승협, 대단하심.”
“내 생각이기보다는, 자식마음을 읽고 자식 입장에서 생각한 부모마음이라고 생각하자.”
“진숙이네 가정이 앞으로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은 작은 조각이어서, 계속 행복하려면, 그 조각들을 이어가는 노력이 필요할 거야.”
최선경은 문승협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어왔다, 아니 문승협이 마음에 들어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