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무슨 감정일까? - (8)
햇볕이 너무 좋았다. 최선경이 점심을 먹은 후 책을 들고 동산에 올랐다.
잠시 따스한 햇볕을 만끽하고 책을 폈다. 소사아저씨가 휴지를 주우며 올라와 최선경 옆에 앉았다.
“그래, 오늘은 이 자리가 최고제잉.”
“아저씨 덕분이에요, 아저씨가 가르쳐주셨으니까.”
“허허, 실은 내가 아니고, 저그 저놈이어. 저놈이 1학년 때인디, 이 동산을 여그저그 훑고 다니길래, 으째 한 군데 안 있고 옮겨 다니냐고 물었제. 그랬드만, 계절과 시간에 따라 햇볕 위치가 다 다르다믄서, 좋은 곳을 찾아다닌다나 그러드라고.”
“그래요?”
“그러드만은 2학년인가 돼서는 한 1년 안 보이다가, 3학년 때 다시 나타났다가 또 한 1년 사라졌었는디, 금년에 또 나타난 거여. 저 아그가 1년씩 나타났다 사라지길 두 번이었제, 뭔 사정인지는 모르겄어. 그래도 내가 지켜보고 겪어본께, 슬픔이 있는 것 같은디 아그가 참 착하더라고.”
“누 누구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사아저씨가 다시 손가락으로 운동장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쪽에는 축구골대 주변에 땀을 뻘뻘 흘리며 축구하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한 아이가 공을 멀리 차내자, 아이들이 공을 쫓아 우르르 중앙선부근으로 나갔다. 그곳에 골키퍼를 하며 축구골대를 지키고 있는 한 명이 남아있었다. 바로 문승협이었다.
최선경은 순간 놀라서 몸이 굳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문승협이 계절과 시간에 따라 옮겨가며 앉았었던 장소에, 최선경이 똑 같이 옮겨가며 앉았던 것이다. 지금 최선경이 앉아있는 곳도 문승협이 앉았었던 그 장소중 하나였다.
최선경은 몰래 눈물을 닦으며 소사아저씨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저 아그가 어떤 날은 멍하니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울기만 하드라고. 으째 그냐 뭔 일이냐고 물어도, 늘 그냥이라고만 하제 다른 말은 일절 안 해. 어떤 날은 여그 있다가 괴롭힘 당하거나 다친 아이들 보믄 가서 도와주고, 또 어떤 날은 나랑 같이 쓰레기를 줍거나 위험한 기물들을 치우기도 했제. 재작년 엄청난 태풍에 홍수가 났을 적에, 내가 하수구에 걸려있는 나무를 치우다 미끄러져부렀어. 물에 휩쓸려갖고 급작스럽게 하수구로 빨려 들어간디, 저 아그가 물이 가심까지 차는디도 겁도 없이 와서 나를 구해주드란께. 그때 저놈이 아녔으믄, 나는 영락없이 죽었을 것이다. 너도 저놈, 승협이 알지야?”
“네, 알아요, 문승협.”
“잉. 승협이가 딴 착한 일도 많이 했어. 내가 본 것 말고 들은 것까지 말하믄, 입이 아플 정도로 숱하제.”
소사아저씨가 학교전체를 두루 돌아다니며 모든 잡일을 다하였기에, 문승협의 조동구, 가병수 등과 관련된 일뿐 아니라 김용남과의 일까지 웬만한 일은 다 알고 있었다.
최선경은 소사아저씨이야기 중에서도 문승협의 착한 일보다 왠지 슬픈 일에 강한 관심이 생겼다.
뭔가에 이끌리듯 일어나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축구골대로 가다가 골대를 비켜나 굴러오는 공을 발로 잡았다. 축구공을 가지러 오려던 문승협이 달라고 손짓하였다. 갑자기 심통이 생겨 공을 줄까 말까 망설였다. 축구공을 기다리는 아이들 시선에 어쩔 수 없이 공을 주려고 발로 찼다. 공의 윗부분을 차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공이 데굴데굴 굴러 문승협에게 갔다.
문승협이 공을 주워 아이들에게 멀리 차주고 재빨리 최선경에게 달려갔다.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바짓가랑이와 무릎을 털어주었다. 최선경은 창피해서 머쓱했다.
“야, 거긴 내가 털게.”
“아, 미안. 괜찮아? 안 다쳤어?”
“응, 괜찮아.”
문승협이 무심코 엉덩이 부분까지 털어주려다 멈췄다. 괜찮은지 확인하고 곧바로 골키퍼 하러 갔다.
최선경은 강한 햇빛에도 골대 옆에 서서 지켜보았다. 골대 뒤로 가는 공을 부리나케 뛰어가 주워 가져다주었다. 문승협을 돕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기를 몇 번하더니 얼굴이 창백해지며 호흡을 거칠게 쉬었다. 급기야 가슴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선경아, 왜 그래?”
“괘 괜찮아.”
문승협이 놀라 축구경기를 팽개치고 최선경을 부축해 그늘로 데려가 상태를 살폈다.
“선경아, 어디가 아픈 거야?”
“괜찮다니까.”
“어디가 안 좋은지 말해봐, 응?”
“괜찮아, 안 뛰다 뛰어서 그런 가봐, 이러다 좀 있으면 괜찮아져.”
“언제부터 그런 거야?”
최선경은 거듭된 질문에도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였다. 문승협은 넝쿨에 걸려 굴렀다고 했던 소풍때와 오버랩되며 왠지 걱정스러웠다. 가병수가 아이스하드 내기 경기를 문승협 때문에 지겠다며 투덜댔다.
최선경이 안정을 조금 되찾아 교실로 가겠다고 하였다. 문승협이 데려다줬다.
5교시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문승협은 최선경상태가 궁금해 반으로 찾아갔다. 교실에 보이지 않아 불안하였다. 제갈민주가 교실 밖에서 서성이는 문승협을 보고 나갔다. 양호실에 최선경이 누워있다고 알려줬다.
문승협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김철종의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양호실로 뛰어갔다. 그러나 양호실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초조한 마음에 양호실문을 억지로 열어보았다. 창문으로 내부를 들여다보며 열심히 두드려도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어 안절부절못했다. 김철종이 다급히 뛰어왔다.
“승협아, 선경이가 조퇴하고 병원에 실려갔단디?”
“뭐? 누가 그래?”
“너 뛰어나간 뒤로 재잘이 민주가 와서 그라드라.”
“어디 병원이래? 괜찮대? 제갈민주는 어디 있어?”
“잉, 재잘이가 교문 앞에서 기다린다고는 했어.”
“빨리 가보자.”
문승협과 김철종이 교문을 향해 뛰어갔다. 제갈민주가 걱정스럽게 울상이었다.
“재잘아, 우째된 일이대?”
“작년에도 뙤약볕에서 달리기 하다 그런 적 있었는디, 그때도 이틀인가 입원했어야.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좀 약해갖고 그런다드라고.”
최선경은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어서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점심시간마다 햇볕을 쬐는 것도, 소풍 때 언덕을 올라가다 쓰러져 다리를 다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럼 작년에 퇴원하고 나서는 괜찮아진 거야?”
“잉, 그랬던 거 같은디?”
“민주야 잘 생각해 봐? 선경이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바로 학교에 나왔어?”
“아, 기억난다야, 가을운동회 준비하다가 그랬제. 잉, 퇴원하고 학교에 와서는 암시랑 안 했어.”
“잉, 철종이 말이 맞어. 학교에 와갖고, 이반저반 다니믄서 농담하고 막 그랬어야.”
“그래? 근데 선경이 성격이면, 친구들 안심시키려고 그랬을 수도 있잖아.”
“그라고 본께, 그런 거 같기도 하다잉.”
문승협은 조금 안심했다가 제갈민주의 불명확한 대답에 걱정이 다시 커졌다.
“민주야, 미안하지만, 선경이네 전화해서 소식 아는 대로 나한테도 좀 알려주라.”
“친구일인디 뭔 미안하다고 하냐, 내가 연락해 보고 바로 알려 주께.”
“철종아, 너도 같은 동네니까, 혹시 소식 들으면 알지? 부탁할게.”
“부탁은 무슨, 당연하제.”
문승협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걱정스레 TV를 보았다. 할머니를 의식하며 전화 옆에 앉아있었다.
김철종과 제갈민주가 집으로 찾아왔다.
“전화로 알려줄까 하다가, 니가 걱정하는 것이 눈에 선해서 재잘이랑 같이 왔어.”
“그래 고맙다. 뭐래? 어떻대?”
“예전보다 좋지 않은 건 맞는디,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선경이 엄마가 그라드라.”
“잉, 지금은 괜찬해 졌고, 한 사나흘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한다드라.
“그럼 병문안은 가능하대?”
“그건 안 물어봤는디. 그라믄, 지금 가 갖고 물어보든가 해서, 아는 대로 알려 주께.”
“그래, 부탁할게.”
“아따 맘 상하게시리, 부탁이란 말 하지 마란께.”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어허, 고맙다 미안하다, 그런 말도 말고 쫌.”
김철종과 제갈민주가 최선경소식을 전해주고 갔다.
문승협이 할머니 눈치를 보며 전화를 기다렸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밤새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세계인의 축제 몬트리올올림픽이 개막한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에 레슬링선수 양정모가 건국최초금메달을 도전합니다……. 미국 무인 우주탐색선 바이킹 1호가 화성착륙에 성공했습니다……. 헨리키신저 미국무장관이 한반도문제해결을 위해 4자 회담으로 양국교차승인과 유엔동시가입을 제안…….’
지나간 10일 사이에 세상이 떠들썩한 뉴스들이 있었다. 그러나 문승협에게는 아무 감흥 없이 무미건조한 소식이었다. 오히려 근심과 걱정에 휩싸인 시간이었다. 최선경의 병세가 악화되어 병문안이 불가하였다. 사흘 뒤 퇴원 했지만, 방학과 연결하여 대학병원에 정밀검사를 받기 위해 그다음 날 서울로 갔다.
여름방학식을 하였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나눠준 '방학공부'를 받아 들고 신났다. 반면 문승협은 최선경을 만나는 건 고사하고 건강상태와 소식조차도 알 수 없어 침울했다. 약한 아이를 돕고 편들어주는 키 크고 인기 많은 착한 소녀가 아프다는 게 마음 아팠다. 착한 소녀를 보호해 주는 소설 속 남자주인공처럼 지켜주지 못한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그나마 착한 소녀에게 능력을 겸비한 약사엄마와 의사아빠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런 부모에게 충만한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는다는 점은 문승협에게 큰 위안이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일주일 뒤, 문승협과 문현아는 본인들 의사와 상관없이 할머니 박옥춘을 따라 할아버지 문재환이 있는 도안광산에 가야 했다.
도안광산은 다도해의 한 섬에 있었다. 문재환이 순회하며 경영하는 다섯 개 광산 중 하나였고, 보통 보름정도 머물렀다. 이번에는 한 달 정도 머물 계획이라고 해서, 박옥춘이 손주의 방학을 명분 삼아 간다고 하였다.
문승협남매는 옷 가방을 싼 뒤 각자 방학공부와 읽을 책을 골라 책가방에 넣었다. 문승협은 ‘박경리의 토지’를 마저 읽을 계획이었다. 다 읽은 후 바꿔 읽자던 최선경생각에 자꾸 불안한 마음이 고개 들었다.
도안광산은 목포항에서 큰 여객선을 타고 6시간 정도 가야 했다. 바람이 세거나 파도가 높으면 8시간도 걸렸다. 웬만한 사람도 뱃멀미에 고생할 정도로 멀고 먼 여정이었다.
멀리 도안광산이 보이자 여객선에서 뱃고동을 몇 번 크게 울렸다. 잠시 후 통통배가 다가와 밧줄을 던지고 당겨서 여객선 옆쪽에 붙었다. 승객이 건널 수 있게 널빤지를 연결하였다. 선착장에 접안이 불가한 큰 여객선과 마중 나온 작은 통통배가 한 몸이 되어 도는 동안, 십여 명의 승객이 통통배로 옮겨 탔다. 임무를 마친 통통배가 밧줄을 풀어 여객선과 분리하고 도안광산 선착장으로 출발하였다. 여객선도 다음 목적지를 향해 뱃고동을 울리며 떠났다. 문승협은 배에 타고 내릴 때마다 겁에 질린 동생을 조심스레 챙겼다. 문현아도 오빠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통통배가 도안광산 선착장에 다가가면서 광산 사무실과 직원들이 기거하는 직원사택이 눈에 들어왔다. 반대편 먼바다에는 대여섯 척의 외항선이 떠있었다. 멀리서 본 직원사택은 낮은 지붕에 똑같이 생긴 판잣집으로 줄줄이 붙어있었다. 낡고 허름한 집도 있었지만 새로 지은 듯한 깨끗해 보이는 집도 보였다.
직원사택은 무료였고 장기근속 순으로 배정되었다. 방안에는 텔레비전뿐 아니라 서울 잘 사는 집에서나 있을 법한 전기밥솥, 전축 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귀한 가전제품을 모조리 갖추고 있었다. 어찌 보면 양계장이나 돼지우리 같아 보이는 사택이었지만, 집집이 지붕마다 늘어선 텔레비전 안테나는 호황을 맞은 광산촌경제의 상징이었다. 한동안 광부들 사이에서 ‘보너스 안 탄 셈 치고 전축 한대 사자. 보너스는 공돈인데 가전제품부터 사고 보자’는 말이 유행했다. 남들보다 먼저 첨단 제품을 사들임으로써 가난에 찌든 한을 풀어보려던 심정도 있었다. 광산촌의 과소비풍조가 만연하여 광업소가 나서 광부와 주부들을 대상으로 과소비방지교육을 시행했을 정도였다.
갱내막장에서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광부들은 먹는 건 잘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면 돌가루나 먼지가 씻겨 나간다고 믿어서 퇴근 후에 마시는 술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잘 먹고 잘 노는 일을 최고로 여겨 놀이계가 성행하였고, 휴일이면 음주가무를 즐겨 유흥이 발달했다. 광산촌 주변에는 요정이나 술집이 생기고 전국기생들이 모여들었다. 네다섯 평밖에 안 되는 대폿집이나 니나놋집이라도 젊은 작부 네다섯 명은 두고 있었다. 한창 호황기 때는 ‘강아지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까지 유행하였다. 광업소신분증만 뒷주머니에 차면 시집오겠다는 처녀가 줄을 섰고, 식당, 술집, 식육점, 옷, 신발, 그릇, 상점 등 모든 곳에서 신용카드처럼 사용되었다.
통통배가 도안광산 선착장에 도착하자, 기다리던 광산직원 두 명이 배에 올랐다. 총무과장과 운전기사라며 박옥춘에게 인사하였다. 운전기사가 가방과 소지품들을 챙겨 들었고, 총무과장이 문승협남매의 손을 잡고 부축해 파도에 출렁이는 통통배에서 하선을 도왔다.
문승협은 도안광산이 처음이라 여객선에서 내리고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했다. 문현아도 오빠 따라 인사하였다.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마중 나온 사람들이 박옥춘에게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지 추측하며 소곤대는 사람도 있었다.
박옥춘가족을 태운 지프차가 선착장을 빠져나와 10분 정도 달려 광산사무실에 도착하였다. 여직원 두 명과 남자직원 몇 명이 나와 인사를 하며 맞이했다. 여직원 중 한 명과 운전기사가 짐을 사택에 가져다 놓겠다며 같이 갔다. 남아있던 여직원이 박옥춘가족을 사장실로 안내했다.
“사모님, 안녕하셨어라우? 처음 뵈어요, 제 이름은 이자연이어라.”
“잉, 자연이. 일한 지 얼마나 됐는가?”
“인자 4개월 돼서 아직 많이 서툰디요, 잘 부탁드릴게라우.”
“다른 거 없고, 윗사람 잘 모시고 회사 일에 성실하믄 돼야.”
“예, 그러께요. 오시느라 고생하셨어라우.”
“나 혼자 여그 오믄 진이 빠진께 엄두도 안 난디, 손주들 방학이라 어쩔 수 없이 델고 왔네야.”
“사장님은 소장님이랑 현장 가셔 갖고, 조금 이따 오시고요. 사모님 오시믄 사택으로 모시라 했는디, 시원한 주스 한잔 올릴라고 이 짝으로 모셨어라우, 언능 가서 내오께요.”
보통 키와 까무잡잡한 피부에 촌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도회적인 외모의 꽤 어려 보이는 비서였다. 오렌지가루를 풀어 얼음을 띄운 주스와 씻은 포도송이를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문현아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리를 꼬며 오빠를 쳐다보았다. 문승협이 동생손을 잡고 나가 비서 이자연에게 화장실을 물었다. 이자연이 문현아를 데려가면서 남자화장실은 안에도 있다고 하였다.
문승협은 동생을 기다리는 동안 밖으로 나가 사무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가면 깨끗이 정돈된 1층집이 보였다. 좀 더 올라가 산 중턱에 조경이 가꿔진 2층집이 자리하였다. 사무실 앞 계단을 끝까지 내려가면 좌우로 자전거보관장소가 있었다. 학교운동장만 한 공터를 지난 맞은편에 광석을 분쇄하거나 선별하는 공장이 눈에 띄었다. 그 공장에서 길게 뻗어 나온 컨베이어 벨트 끝에는 분류된 광석들이 군데군데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사무실 왼쪽 계단으로 내려가는 중간에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창고 같은 건물이 위풍당당했다. '화기엄금'푯말이 붙은 출입문에 큰 자물쇠를 굳게 채워놓은 화약고였다. 끝까지 내려가면 차량 정비소와 보관소 그리고 몇 개의 창고가 있었다.
길 건너 먼산에서 ‘쿵’하는 소리가 난 후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때마침 이자연이 문현아를 데려 왔다. 문승협이 궁금하던 차에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왜 저러는 거예요?”
“잉, 저그가 광산이어. 시방처럼 다이너마이트로 터트려서 산을 허물고, 연기가 걷히믄 인부들이 광석을 캐는 거여. 지금 터트렸은께, 할아버지 오실라믄 한 시간은 있어야 쓰겄다.”
“그럼, 자연을 해치는 건데? 벌거숭이 민둥산이 되잖아요.”
“나를 해친다고? 나는 벌거숭이도 아니고 민둥산도 아닌디?”
“아니오, 자연이요 자연. 산, 나무 말이에요.”
“그라믄, 신사분은 겨울에 추운디 연탄 안 땔란가?”
“하하하, 오빠보고 신사래.”
“제가 뭐라고 불러야 돼요?”
“곰방 자연이라고 내 이름을 막 불러놓고는 그러네잉, 시방 나 놀리는 거 아니제?”
“아, 죄송해요. 그런 뜻이 아닌데.”
“호호호, 신사분 당황하셨소?”
“하하하, 또 신사래.”
“자연누나라고 부르든가, 그냥 누나라고 부르든가, 그건 신사분 맘대로 하쑈.”
문승협은 유쾌하고 재미있는 누나라고 생각하였다. 놀리는 눈빛과 예쁜 선한 눈웃음에서 최선경이 떠올랐다.
이자연이 앞장서 피곤하다는 박옥춘을 안내했다.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깔끔한 1층 집은 소장이 거주하였다. 좀 더 올라가 나름 조경이 꾸며진 2층집이 사장이 올 때마다 기거하는 사택이었다.
“사모님, 당분간 저도 여그 묵을 건디라우, 시키실 것 있으시믄 언제든 말씀하셔요.”
“잉? 뭐 한디 그래.”
“사모님 하고 손주 분들이 여그 길도 물정도 잘 모르고 한께, 여그 있는 동안에 같이 있으믄서 심부름도 하고 도와주라고, 소장님이 말씀하셨어라우.”
“소장이?”
“예, 사장님은 신경 쓰지 마라 하셨는디요. 소장님이 그래도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근무시간 쳐준다믄서 좀 도와주라고 당부하셨어라우.”
이자연의 말처럼 한 시간 정도 지나서 할아버지 문재환이 사택에 도착하였다. 오랜만에 보는 장손장손녀에게 큰절을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동안 어찌 지냈는지 물었다. 문승협남매는 성적표를 보고 기뻐하는 할아버지에게 칭찬도 듣고 용돈도 받아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엄마와 아빠에게 전화나 연락은 자주 오냐는 질문에서 말문이 막혔다. 문재환도 대답을 어물거리는 손주들이 짠하고 마음이 상했다. 때마침 소장부부가 반찬과 음식거리를 싸 들고 인사하러 왔다.
“사모님, 안녕하셨소, 저 곽소장이어라우.”
“사모님, 이게 얼마만이어요, 안녕하셨어라우?”
“오메, 오랜만이요. 잘 있었소?”
“안녕하세요.”
“워메, 니가 장손 승협이냐? 와따 엄청시리 커부렀네. 니가 젖빨 때 봐서 내가 누군지 모르겄다만, 산성광산에서 일할 때 내가 너를 많이 예뻐했어야. 근디, 야는 누구요?”
“제 동생 현아예요, 현아야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허허, 꼬마숙녀가 얼굴멩키로 인사를 이쁘게 하네잉. 아따, 인사도 잘한께 용돈이나 줘야 쓰겄다.”
곽소장이 만 원짜리를 꺼내 내밀었다. 문현아가 받아도 되는지 오빠를 쳐다봤고 고개를 젓자 뒤로 물러섰다.
“오메오메, 아그들한테 뭔 그렇게 큰돈을 주요.”
“몇 년 만에 봤는디 이 정도는 줘야지라우. 언능 받아야, 팔 빠진단께.”
문승협남매가 할머니의 받으라는 눈짓에 공손히 받았다. 곽소장부인이 가져온 것들을 풀어헤쳤다.
“이거 별거 아니고요, 계시는 동안에 드시라고, 집에 있는 거 대충 싸왔어라우.”
“그냥 오제는 뭣을 이리 많이 싸왔소, 미안시럽게.”
“음식이 별거 없고 누추해라우.”
“별말을 다하요, 내가 이녁 음식 솜씨를 잘 알그만. 고맙게 잘 먹으께라, 이렇게 신경 써줘서 고맙소.”
소장부부가 돌아가고, 박옥춘이 소장부부가 싸 온 음식과 자신이 가져온 반찬으로 저녁상을 차렸다.
이자연도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했다. 이자연이 2층으로 올라와 이부자리를 펴고 TV를 보다 잠든 문현아를 옮겼다. 문승협을 살펴보더니 베란다에 가보자고 하였다.
사택베란다에서 바라본 도안광산 주변은 말 그대로 암흑이었다. 사무실 주변과 차가 다니는 도로양쪽에 가로등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10미터 앞도 분간이 어려울 만큼 가시거리가 짧고 인적 또한 없었다.
“무서울 정도로 엄청 어두워요, 사람도 안 다니고.”
“잉, 전기가 약한께. 그라고 사람들은 직원사택에 모여 살아서, 밤에는 이 짝으로 올 일이 없어야. 저그 저 반딧불처럼 보이제, 저그가 직원사택이어.”
“저기 높은 곳 띄엄띄엄 반짝이는 불빛은 뭐예요?”
“아까 낮에 봤던 광산 꼭대기여, 구역도 표시하고, 혹시 안전사고 있을까 비.”
“저기 빨간 불빛은요?”
“선착장에 있는 저 빨간 불빛은 술집. 우리같이 가서 한잔 하까?”
“네? 하하하, 누나 좀 웃겨요.”
“그라믄 성공했그만잉. 여그 있는 동안 재미지라고 한 것이어.”
“저기는 바다 같은데 불빛이 있네요?”
“외항선인 거 같은디? 맞어 외항선이어.”
“외항선이 뭐예요?”
“나도 자세히는 몰라야. 나중에 할아버지 빽 써갖고, 나도 좀 데려가 주라. 할아버지가 세관이나 선적과장한테 말하믄 갈 수 있은께.”
“그래요? 궁금하다, 외항선.”
“여그는 배 타고 조금 가믄 좋은데 많아야, 보길도도 있고 명사십리도 있고. 할아버지한테 말하믄 만사 오케이어, 이 근방에서는 할아버지가 대빵인께.”
여름밤 바닷바람에 휩싸인 도안광산 주변의 바다와 육지는 암흑이었으나, 하늘에는 별들이 서로 뽐내며 찬란히 반짝이고 있었다.
문승협이 별을 헤아려 보았다. 문득 서울에 있는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막냇동생 문윤아가 생각나 슬퍼졌다. 최선경은 또 어떤 상황인지 궁금함과 걱정이 몰려왔다.
최선경은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제갈민주와 김철종을 통해 문승협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며칠째 문승협집에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걱정하고 있을 문승협과 통화되지 않아 답답하였다. 다음 주에 퇴원하면 빨리 목포에 가서 만나야겠다는 생각만 되풀이했다.
문승협은 어제 오랫동안 배를 타서 피곤했음에도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도안광산의 아침풍경은 어떤지 베란다에 나가보았다. 어제의 한여름 밤 후덥지근한 바닷바람과는 다르게 대지의 열기를 식혀버린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구름과 바다를 뒤덮은 해무가 어우러졌다. 육지의 산과 멀리 보이는 바다 위의 섬들을 하나로 묶어 놓은 듯한 광경이 경이로웠다. 어젯밤 암흑에서 본 자연과 오늘아침 빛에서 보는 자연이 천지차이였다. 문승협이 아름다운 경치에 빠져있는 사이, 이자연이 베란다로 나왔다.
“신사분께서 일찍 일어났네요잉.”
“누나, 저거 보세요.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저렇게 아름다운 자연은 처음 봐요.”
“자연이 아름다운 건 어제도 봐놓고 그러실까?”
“어제 언제요?”
이자연이 검지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웃었다. 문승협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누나 이름이 예쁘긴 하네요.”
“과연 이름만 이쁘까? 호호호. 이 풍경을 눈으로 찍은 다음에, 눈감고 니 기억 속에 잘 담아둬. 이런 건 카메라로 찍어서 사진으로 봐도, 지금 같은 기분은 느낄 수 없은께.”
덤프트럭이 경적소리와 함께 먼지를 일으키며 도로를 달렸다. 잠시 자연에 빠져있는 문승협을 현실로 돌려놨다.
“근디, 현실은 저러코롬 시끄럽고 먼지투성이어. 항시 우리를 위협해서 아름다움을 잊고 살게 하제, 딴생각하는 걸 못 봐 그냥.”
이자연이 덤프트럭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한마디 했다. 문승협도 동의한다며 웃었다.
이자연이 아침을 먹으면서 여기 있는 동안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짜보자고 하였다. 오늘오후는 보길도에 가서 유적지를 본 뒤 시간이 남으면 해수욕장을 가보기로 하였다. 문현아가 수영복을 챙겨가자고 하였다.
이자연은 문승협남매를 지프차에 태워 선착장으로 갔다. 기다리고 있는 통통배를 타고 보길도로 향했다. 먼저 고산 윤선도와 우암 송시열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시간이 조금 남아 모래 없는 예송리 자갈밭해수욕장에 갔다. 문현아가 지친 듯하여 수영은 하지 못했다. 대신에 싱싱한 해산물을 사주었다. 문승협남매는 비위가 약하여 전복과 해삼은 조금밖에 먹지 못했고, 멍게는 입에 넣자마자 뱉어내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었다. 이자연과 문승협남매는 올 때도 통통배와 지프차를 타고 사택으로 돌아왔다.
박옥춘이 이자연에게 부부동반 저녁약속이 있으니 손주들과 같이 알아서 챙겨 먹으라고 하였다.
이자연은 아이들과 씻은 후 잠시 쉬다가 저녁식사를 차려 먹었다.
“오늘 가본데 중에 어디가 좋디?”
“고산 윤선도 유적지 원림, 세연정 그리고 1.4Km 자갈밭 해수욕장이요.”
“오호, 이유는?”
“그냥 좋아서 좋은 건데, 좋은데 이유가 필요해요?”
“신사께서 쪼까 까칠하시그만, 아름다운 자연이 여쭤보믄 대답 좀 해주시지는. 그래도 뭐시냐 그, 이래서 좋았다, 뭐 그런 거 있잖애?”
“하하, 맞아요, 아름다운 자연이 좋았어요. 근데, 왕을 호위 안 했다고 유배 보낸 건 좀 이해 안 가요.”
“호호, 역시 나는 아름다워.”
“히히, 오빠가 말하는 자연은 언니가 아닌데.”
“나도 알거든이라우, 숙녀님.”
“히히, 나한테 숙녀래, 언니 진짜 웃겨.”
“내일은 바닷가 갯벌에 가 갖고, 바닷게랑 낙지랑 잡아서 맛있는 해물라면 끓여주까?”
“그래요, 좋아요.”
문승협남매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일찍 잠들었다. 이자연이 자주 즐겨 듣는 가수 이미자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틀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이자연은 거울을 보고 폼과 감정을 잡아가며 흥얼거리듯 따라 불렀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 카세트를 끄고 잠을 청했다.
문승협이 방학을 알차게 보내겠다며 고심 끝에 만든 생활계획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최소한 도안광산에 있는 동안은 이자연이 생활계획표를 대신했다.
이자연은 양동이와 소쿠리 그리고 모종삽을 준비하였다. 문승협남매를 앞세워 십 여분 비포장오솔길을 걸어서 바닷가에 도착했다. 썰물에 훤히 드러난 갯벌이 바다 쪽으로 길게 펼쳐있었다. 바닷물과 맞닿은 부분에는 부표와 김을 채취하는 그물들이 군데군데 어지럽게 얽혀있었다.
이자연과 문승협남매가 자갈밭을 지나 갯벌 위를 걸어 바다 쪽으로 한참 걸어갔다. 이자연이 낙지가 있는 곳을 찾아 잡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문승협남매에게 모종삽과 소쿠리를 하나씩 나눠주며 직접 잡아보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가르쳐준 대로 했음에도 계속 실패했다. 한참 만에 낙지를 찾았으나 징그러워 꺼내지 못하자, 이자연이 대신 잡아주었다. 문현아는 낙지 잡는 건 이미 포기하였다. 한참 동안 작은 농게를 쫓아다니더니 소라껍데기를 줍거나 조개 캐는데 집중했다. 문승협의 한쪽발이 갯벌에 박혀 빠지지 않아 끙끙거렸다. 이자연의 도움으로 어렵게 빠져나오다 같이 넘어졌다. 이를 본 문현아가 깔깔거렸다. 문승협과 이자연도 서로 넘어진 모습을 보고 웃었다. 그런데 이들이 모르는 사이 낯선 아이들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들을 본 이자연의 웃는 표정이 돌연 싸늘하게 변했다.
“아따 못 봐주겄네 진짜, 꼴값들 떨어요 꼴값을.”
“봐달라고 안 했은께, 깝치지 말고 언능 꺼져라잉.”
반바지나 팬티만 입은 다섯 명의 남자아이들이 비아냥대며 둘러쌌다. 시커멓게 그을린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이런 씨발 확 디질라고, 어따 대고 깝죽 댄다냐?”
“니는 위아래도 없냐? 나이도 내가 많고 학교도 내가 선밴디, 시방 어따 대고 반말이어?”
“내가 중학교 때 꿇었다고 했잖애. 그라고, 나이나 선배가 뭔 소용 있간디?”
“하기사, 니 같은 것이 뭔 예의를 알겄냐. 우리 건들지 말고, 조용히 가라잉.”
“아야 아그들아, 무당딸년인지 술집작부 딸년인지, 우리 보고 예의 없다고 조용히 꺼지란다야? 으짜끄나, 우리가 그냥 가야 쓰겄냐?”
“뭣이라고? 이런 개노무시끼가 입이 뚫렸다고 막 씨 부리네? 내가 지금 애기들이랑 같이 있어갖고 참을라 했그만은, 어디, 너 죽고 나 죽고 한번 해보끄나?”
우두머리로 보이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아이가 막말을 하자, 이자연이 흥분해서 덤비려 하였다. 문승협이 보기에는 고등학생 정도였지만 워낙 거칠게 생겨서 무서웠다. 자칫 잘못하다간 큰 봉변을 당활 것 같아서 이자연을 말렸다.
“누나 참으세요, 우리 이제 그만 가요.”
“하, 뜬금없이 끼어드는 이 따까리는 또 뭐다냐? 어서 튀어나온 놈이어?”
“행님, 서울 말툰디라우?”
“아가, 저리 비켜라잉, 니가 겁 없이 낄 데가 아니어.”
얼굴에 흉터 있는 남자아이가 문승협을 사정없이 밀쳤다. 문승협이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졌다. 문현아가 이를 보고 울기 시작하였다. 이자연이 더 이상 못 참고 문승협을 밀친 남자아이의 따귀를 치며 멱살 잡았다. 계속 소리 지르며 덤벼들었으나 금세 나자빠졌다. 문승협이 넘어지는 이자연을 보고 화가 났다. 심호흡을 하고 막 덤비려는 찰나, 오솔길로 자전거 타고 가는 아저씨가 멈춰 서더니 소리쳤다.
“야, 너 이놈들, 어디서 또 행패냐? 얼른 안 갈래, 응? 이놈 시끼들, 나한테 혼난다.”
“아야, 저 돌탱이 또 누구냐?”
“행님, 세관장 같은디라우?”
“염병, 씨발 졸라 재수 없네. 어이 작부딸, 조심해라잉. 내가 꼭 니를 가만 안 둘 것인께, 알겄냐? 아야, 가자.”
“행님, 그냥 조져부쑈. 뭐 한디 그렇게 뜸 들이요? 진짜로 사랑하요? 킥킥킥.”
“시끄러 시끼야, 이 시끼가 한 대 맞을래?”
패거리들이 킥킥대며 물러가자, 문승협이 이자연을 일으켜 세웠다. 이자연은 문현아를 다독였다.
“현아야, 괜찮아?”
“언니, 우리도 그만 가요?”
“승협이는 괜찬해? 안 다쳤어?”
“네, 괜찮아요.”
이자연과 문승협은 도구들을 챙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택으로 갔다. 이자연은 아이들과 씻은 후 자신만의 해물라면을 끓여주었다.
“어떠냐, 맛나제?”
“네 맛있어요”
“이것이 자연의 맛이어.”
“누나의 맛이라고요? 하하하.”
“아니, 이번엔 진짜 자연 말이어, 바다내음 안나?”
“나요, 정말 맛있어요.”
“언니, 진짜 엄청 맛있어요.”
이자연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였다. 문승협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자연기분에 맞췄다. 그러나 이자연표정이 슬퍼 보였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이자연이 베란다로 나갔다. 문승협이 책을 읽다 따라갔다.
베란다 밖 세상이 암흑이었지만, 이제는 어디에 뭐가 있고 어떤 풍경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동안 각자 어둠을 바라보았다. 이자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문승협에게 물었다.
“저그가 어딘지 아냐?”
“선착장이요?”
“아니, 선착장이 있는 저 빨간 불빛 말이어. 홍등이라고도 하제.”
“아, 술집이라면서요.”
“잉, 술집이제. 내가 태어난 고향이나 다름없어야.”
문승협은 이상한 이자연의 어감에 대꾸 없이 그냥 듣고 있었다.
이자연은 아빠 없이 태어났다. 지금도 얼굴조차 모른다고 하였다. 그것은 엄마가 술집작부이자 무당이기 때문이라며 원망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낯에 깡패 같은 놈들이 그렇게 말한 것이며,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괴롭힌다고 하였다.
문승협은 동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마음이 동요되어 이자연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자연누나, 엄마아빠가 누군지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엄마아빠가 어떤 사람인 건 엄마아빠책임이지, 누나 잘못이 아니잖아요.”
“아따, 우리 신사께서 제법 어른스러운 말씀을 다 하시네요잉. 맞는 말이기는 한디, 내 세상에서는 자꾸 내 책임이고, 내 잘못이라고 안 하냐? 세상이 염병한 것이제.”
“누나는 아름다운 자연이잖아요, 그러니 자신을 지켜요. 아름다움을 지키기 쉬우면 다 아름답게요? 자연만의 자연이어야 더 아름답죠.”
“요 꼬맹이 신사가 못하는 말이 없네요잉.”
이자연이 문승협코를 쥐었다 놓고 미소 띤 글썽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두 손으로 문승협 볼을 만지다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참았지만 볼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눈물이 문승협목덜미에 떨어졌다. 이자연품에 안겨있는 문승협에게도 흐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문승협은 이자연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어쩌지 못하고 그냥 안겨있었다. 그러나 엄마품에 안겨본 기억도 많지 않은 데다 낯선 여자에게 처음 안긴 터라 무척 당혹스러웠다. 더구나 이자연의 가슴이 얼굴에 닿아서 꼼짝할 수 없었다. 두 손을 엉거주춤한 채로 목석처럼 안겨있었다. 문득 이자연이 껴안은 사람은 문승협이 아니라, 이자연 자기 자신을 부둥켜안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자연을 이해한다는 마음에 두 손을 등허리께 껴안았다. 못 느낄 만큼 가볍게 토닥거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