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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Sep 04. 2024

단테의 별 - 1권 1부 14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무슨 감정일까? - (12)

이자연이 휴가처리하고 다시 사택으로 출근하였다. 여직원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누나, 내일이나 모레쯤 날씨 좋으면, 우리 외항선에 갈 거래요.”

“잉, 수출과장이 말하드라. 그라믄 오늘은 뭐 하까?”

“근데, 우리 다음 주 화요일에 가는 거 알아요?”

“니 가는 거 하고 나랑 뭔 상관이대? 가든가 말든가.”

“와 너무했다, 언니 서운해요.”

“음마, 우리 현아씨도 가신가?”

“그럼요, 오빠 가는데 나도 같이 가야죠.”

“난 또 현아씨는 안 가는 줄 알았제잉. 승협이는 가든가 말든가 상관없는디, 우리 현아가 간단께는 허벌나게 슬프다야.”

“아, 언니 또 장난친 거구나, 또 속았네.”

“근디야, 언니가 가지 마라 해도, 어쩔 수 없이 가야 한께. 그냥 같이 있을 때나 재밌게 실컷 놀자.”

이자연이 맛있는 것도 먹을 겸 읍내구경을 가자고 하였다. 지프차가 보이지 않아 버스를 타기로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뜨거운 햇볕이 강렬히 내리쬐었다. 비릿한 짠 내음을 품은 덥고 습한 바닷바람까지 불어왔다. 전형적인 8월 초 정오의 여름날씨였다. 양산을 쓰고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데도 기진맥진했다.

버스가 마른 먼지를 풀풀 날리며 도착하였다. 버스기사아저씨가 창문을 열어 놓았으나 시원하기보다는 숨이 턱턱 막혀 별 소용이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를 정도로 불쾌지수가 높았다. 중간에 타고 내리는 승객이 많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한 시간쯤 달려 읍내에 도착했다. 거의 반쯤 녹초가 된 기분이었다.

이자연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상점으로 들어갔다. 아이스박스에서 시원한 환타와 사이다를 꺼냈다. 뚜껑을 따 문승협남매에게 한 병씩 쥐어주었다. 다들 푹푹 찌는 날씨에 갈증 나 병째 들고 정신없이 마셨다. 급히 마시느라 입가에 흘리기도 하고 옷에 젖기도 하였다. 문현아가 갑자기 트림을 하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이자연과 문승협이 깔깔 웃었다.

목을 축이고 나니 배가 고팠다. 분식집에 들러 만두와 튀김, 오뎅과 떡볶이를 시켜 먹었다.

시장기를 달래고 읍내구경에 나설 때는 태양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자연은 문승협남매에게 신발을 사주고 싶었다. 시장으로 가는 길에 문현아가 지프차를 가리켰다.

“어? 저거 우리 차다. 언니, 저거 우리 차 맞지?”

“잉, 여그 와있었네. 현아가 잘 봤그만, 이따 집에 갈 때 타고 가믄 쓰겄다.”

“와, 버스 타기 힘들던데 잘됐다.”

“느그들은 잠깐 여그 있어, 내가 가서 기사한테 말하고 오께.”

그때 도로 옆 다방문이 쾅하고 열렸다. 박옥춘이 어떤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소리 지르며 나왔다.

깜짝 놀란 이자연이 몸을 돌려 문승협남매의 시선을 막았다. 재빨리 길 건너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기사한테는 이따 말하고, 우리 신발구경 가끄나?”

“언니 갑자기 이러면 어떡해, 넘어질 뻔했어요.”

“오메 미안타, 안 다쳤냐?”

“언니, 더운데 좀 천천히 가요.”

쩌렁쩌렁하게 욕을 퍼붓는 박옥춘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이자연이 빠른 걸음으로 주위를 벗어나려 했다. 힘들어하는 문현아를 안고 뛰다시피 하여 시장으로 들어갔다. 문현아를 내려놓고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박옥춘이 다방아가씨에게 호통치는 소리가 시장입구까지 들렸다. 시장사람들이 소란에  무슨 일인가 하여 하나둘씩 나가보았다.


박옥춘은 남편이 가있는 광산에 갈 때면 늘 그랬다. 광산직원부인들에게 남편의 행실과 들은 풍문을 물었다. 여기 도안광산에 와있는 동안에도 남편 문재환을 미행하며 뒷조사했다. 때마침 소문을 확인하던 차에 다방아가씨가 꼬리 쳐서 바람피웠다는 확신으로 응징하는 것이었다. 문재환의 처신이 전혀 문제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삼자대면이나 사실확인을 하면 대부분 오해였다. 주로 발단은 문재환이 즐겨하는 춤이었다. 카바레서 춤추는 상대가 여자였기에, 박옥춘입장에서는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춤 이상은 없었다는 것이 문재환의 항변이었다. 박옥춘도 남편의 춤추는 취미에 덩달아 사교춤을 배웠다. 가끔은 집에서 또는 어딜 가서 음악을 틀어놓고 남편과 지르박이나 탱고 같은 사교춤을 같이 추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남편이 주도적으로 바람피우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여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문재환의 중후한 외모와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에 반한 여자들이 주위에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박옥춘에게 당하고 직접피해를 보는 쪽은 오늘처럼 항상 여자들이었다. 물론 문재환도 모호한 처신 때문에 회사와 친인척들에게 오해받아 힘들어했다. 주변에서 박옥춘의 행동을 의부증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그렇다는 동정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박옥춘과 문재환의 그런 행동과 평판이 인생을 가로막고 사업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어갔다.


이자연이 문승협남매를 살폈다. 지금 할머니가 벌이고 있는 일을 손주들이 모르길 간절히 바랐다.

이자연도 과거에 비슷한 경험이 몇 번 있었다. 자기 어머니에게 집적대던 남자들의 부인이 찾아와 오늘 박옥춘이 한 것처럼 해코지하는 걸 보고 충격받았다. 그날의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잊히지 않았다.  

아직 어린 문현아는 모른듯했으나, 문승협은 표정이 말해주었다. 아무 불평 없이 태연히 뛰어온 것만으로도 짐작했지만, 항상 웃는 모습의 문승협 얼굴이 무표정하게 굳어있었다.

“승협이는 표정관리를 잘해야 쓰겄다. 막상막하 경쟁 때는, 속내를 들키는 사람이 지는 것이어.”

“…….”

문승협은 모른 체한 걸 들켰다는 생각에 잠자코 있었다. 사실 이자연이 그냥 넘어가주길 바랐다. 할머니의 오늘 같은 행동을 예전에도 목격했었다. 할머니뿐 아니라 엄마도 그랬던 걸 본 적이 있어서 치부를 들킨 것 같았다.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이자연에게 속상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줘서 고맙기도 하였다.

이자연이 남매마음을 달래주려 신발가게로 갔다.

“자, 느그들 마음에 드는 신짝을 골라봐.”

“나는 이 하얀 고무신.”

“얼마 전까진 너나없이 신었는디, 인자는 후지다고 창피해서 안 신은디야.”

“그래도 이 하얀 고무신이 좋아요, 투명하면 좋겠지만 그런 신발은 없으니까.”

“흰 고무신이라니, 니도 참 벨라다잉.”

“하얀색인데 속이 안보이잖아요.”

“그라믄 껌정고무신도 있잖애.”

“검정고무신은 억지로 색칠한 것 같이, 속을 감추려는 의도가 보여서 별로예요.”

“투명한 것은아?”

“투명하면 속이 훤히 다 보여서 싫어요.”

“뭔 말이대?”

“이 하얀 고무신은 안 감춘듯하면서 완벽하게 감출 수 있잖아요, 투명망토처럼.”

“속을 감췄는디 감춘 것을 들키고 싶지 않다, 그것도 투명할 정도로? 신짝에다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다잉, 신짝은 그냥 신는 것으로 의미를 다한 거여.”

이자연은 문승협이 말하는 의미를 몇 번 되뇌었다. 마음의 상처를 감추고 그 감춘 사실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자신과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어쩌면 문승협에게도 감춘 내용뿐 아니라 감추는 행위조차 숨기고 싶은 상처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문승협을 빤히 바라보았다.

“누나, 어떤 상처가 있다는 걸 들키면 창피하잖아요. 근데 숨기려고 발버둥 쳤던 모습마저 들킨다면, 정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 것 같아요.”

“그래, 맞어, 그건 나도 그래야.”

이자연을 바라보는 문승협눈이 충혈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자연의 두 손이 문승협 얼굴을 감싸 엄지로 눈두덩을 옆으로 쓸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상처 있는 둘만의 공감이었다.

문현아가 요술공주그림이 그려진 슬리퍼를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이자연이 계산하고 슬리퍼와 하얀 고무신을 챙겨 나왔다.

바닷가 쪽으로 가면서 여기저기 구경했다. 어판장에서 경매하는 것을 꽤 오랜 시간 지켜보았다. 어시장을 구경하는 중에 문현아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시장통에 있는 중화요릿집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이 언니가 지대로 한턱낼 텐께, 현아가 먹고 싶은 거 다 묵어.”

“우아, 진짜요? 그럼, 난 짜장면.”

“승협이는?”

“저도 짜장면이요.”

“그라믄 나는 짬뽕 먹으까? 짜장면도 땡기고, 뭐 먹으까나, 아 고민되는디?”

“짬뽕 먹어요, 어차피 현아가 짜장면 한 그릇 다 못 먹을걸요?”

“오빠, 나 한 그릇 다 먹을 거야.”

“알았어라 현아씨, 혼자 한 그릇 다드쑈잉. 낮에는 찐만두 먹었은께, 이번엔 군만두 시키믄 쓰겄다.”

이자연이 주문한 뒤 밑반찬으로 가져다준 단무지에 식초를 뿌렸다. 잠시 후 음식이 나오자 문현아의 짜장면을 비벼주었다. 문승협이 두 개 그릇에 담긴 단무지를 하나로 합치더니, 남은 빈 그릇에 비빈 짜장면을 덜어 이자연 앞으로 밀었다.

“누나, 짜장면도 맛보세요.”

“으메, 이거 감사해서 으짜까잉.”

“짜장면짬뽕 반반해서 메뉴 만들면 잘 팔릴 거 같은데, 왜 없나 몰라?”

“호호, 오빠는 중국집 올 때마다 그 말하더라.”

“진짜 좋은 생각인디? 아자씨, 짜장면짬뽕 반반해서 메뉴 하나 추가하쑈. 그라믄 고민도 안 하고 좋겄소.”

“혹하는 말이긴 한디, 그런 그릇이 있어야제. 안 그라믄 그릇 두 개를 써야 한디, 설거지거리만 늘어서.”

“그릇을 만드시면 되잖아요.”

“에이, 그게 쉽간디? 그런 그릇을 주문할라믄 양도 돼야 허고, 금형이다 뭐다 돈도 들어가서 여간 복잡하단께. 혹시 그릇도매상들이 맨글어 팔믄 모르까.”

세 사람은 짜장면짬뽕 반반메뉴를 숙제로 남기고 맛있게 먹었다. 문승협이 부지런히 먹으면서도 문현아입 주변에 묻은 짜장을 닦아주기 바빴다. 이자연이 동생을 챙기는 문승협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세 사람이 든든히 배를 채우고 식당을 나서니, 태양이 자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태양열을 밀어내며 대지의 열기를 식히려 안간힘을 썼다. 사택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 아직 더운 공기가 남아있어 창문이 열려있었다. 청량감 있는 시원한 바람은 아니어도 견딜 만했다. 시간에 이끌려 내려앉은 땅거미와 함께 사택으로 돌아왔다.

문승협남매는 씻은 후 이자연의 도움을 받아 방학숙제를 하고 밀렸던 일기를 풍성하게 채웠다.

“외항선에는 모레 간다 했은께, 내일은 뭐 하끄나? 방학숙제 남은 거 있냐?”

“곤충채집하고, 식물채집이요.”

“그라믄, 사택 뒷산에 올라가서 하믄 되겄다.”

세 사람은 피곤에 못 이겨 일찍 잠들었다.


이자연이 문승협남매를 깨워 아침을 먹였다. 설거지를 미루고 문승협남매와 사택 주변을 오가며 식물채집을 했다. 점심으로 시원한 열무국수를 만들어 먹고 밀린 아침 설거지까지 해치웠다.

곤충채집도구를 준비해 뒷산에 올랐다. 여전히 무더운 여름날씨였다. 다른 점이라면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이 종종 태양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땀을 식혀줘 고마웠다.

이자연과 문승협은 잠자리채를 하나씩 나눠 들고 여기저기 들쑤시거나 나무를 흔들어 곤충을 쫓아갔다. 문현아는 곤충채집통을 들고 따라다녔다. 한참 곤충을 쫓아 산을 오르다 조그만 동굴을 발견하였다. 이자연이 앞장서 들어갔다. 문승협은 지쳐가는 문현아손을 잡고 따라갔다. 세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넓이에 열 걸음 정도되는 깊이의 넓지도 깊지도 않은 동굴이었다. 동굴입구 바위에서 경치를 바라보자 가슴이 탁 트였다. 좌측으로는 도안광산과 세관, 직원사택마을이 있었다. 앞쪽 선착장 쪽으로 여객선과 외항선들이 넓은 바다 위에 떠있었다. 우측으로 보길도와 섬 사이를 오가는 통통배들이 보였다. 열두 살 문승협눈에 처음 들어온 신세계였다. 동네친구들과 유달산 이등바위나 일등바위에 올라가서 봤던 목포의 동서남북경치와는 또 달랐다.

이자연이 물통을 꺼내 문승협에게 건네고 어딘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문승협은 물을 마시고 이자연시선을 따라갔다. 선착장 근처 산자락 끝 대나무에 묶여 나부끼는 깃발이 보였다. 이자연의 집이었다. 문승협은 평소와 다르게 비장한 이자연표정을 보았다.

“누나, 무슨 생각해요?”

“응? 그냥저냥. 저그가 우리 집이어, 울엄니가 있는, 울엄니 마음의 고향.”

이자연은 뭔가 생각을 정리하는듯하였다. 그러고도 한동안 더 내려다보다 산을 내려가자고 하였다.

동굴까지 오를 때는 힘들고 오래 걸렸는데 내려갈 때는 금방이었다. 위치에너지와 심리의 마술이었다.

이자연이 사택에 도착해 오전에 모은 꽃들을 펼쳤다. 손바닥만 하게 자른 도화지에 하나하나 붙여 꽃이름을 썼다. 그것을 책사이에 넣어 문현아에게 주었다. 이어서 투명한 플라스틱통을 가져와 바닥에 알코올솜을 넣었다. 오후에 사냥한 곤충을 그물망에 고정하여 알코올솜 위에 세우고 뚜껑을 닫았다. 통 바깥 면에 곤충이름을 써 붙여 문승협에게 주었다. 방학과제인 식물채집과 곤충채집이었다.

“현아는 이대로 뒀다가, 학교에 내기 전날 책에서 빼갖고, 스케치북에 그대로 붙여서 내믄 된다잉.”

“네. 근데 언니, 나팔꽃 하고 도라지꽃 색이 비슷해 보여요.”

“그란다잉, 나도 오늘 첨 알았다야. 승협이는 이 통 간수 잘해서 이대로 학교에 내믄 되겄다. 매미, 장수풍뎅이, 잠자리, 메뚜기, 이거믄 되겄제? 으째, 좀 빈약해 보이냐? 나비를 한 마리 더 잡으까?”

“아녜요, 이거면 충분해요. 근데 이거 너무 잘해서, 선생님이 보면 진짜 네가 했냐고 뭐라 할 것 같은데.”

“좀 거짓갈로 니가 했다 해도 암시랑 안 해, 같이 곤충을 잡았으믄 된 거여.”

“하하, 알았어요.”

“그라고 있냐, 나 오늘 엄마랑 할 야그가 있어갖고, 집에 좀 일찍 갈란다. 내일 외항선 보러 출발하기 전에 오께, 그래도 되겄제?”

이자연이 무슨 일인지 다른 때와 다르게 서둘러 집으로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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