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무슨 감정일까? - (13)
다음날 아침, 문승협이 잠결에 시원한 바람을 느껴 눈을 떴다. 이자연이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모기장을 한쪽으로 걷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세상 모두 우리 거라면, 이 세상 전부 사랑이라면, 날아가고파 뛰어들고파, 하지만 우리는 여고 졸업반, 아무도 몰라 누구도 몰라~’
“누나, 일찍 왔네요?”
“아야 해가 중천이다, 언능 인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왜야?”
“콧노래도 부르고, 표정도 밝아 보여서요.”
“어허, 원래 나는 밝은 사람인디 왜 이러시까잉.”
“근데, 눈은 왜 퉁퉁 부었대요?”
“내 눈이 으쨌다고 그냐, 숙녀한테 그리 말하믄 신사가 아니제.”
문승협은 당황한듯한 이자연에게서 즐겁고 밝은 기운을 감지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연했다.
이자연의 재촉에 문승협남매는 서둘러 준비했다. 아침을 다 먹을 즈음 지프차기사가 데리러 왔다.
이자연과 문승협남매가 지프차를 타고 선착장으로 가 통통배에 옮겨 탔다. 수출과장과 세관계장을 비롯한 몇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배가 통통거리며 외항선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하였다.
어제 산에서 내려볼 때는 손톱만 했던 외항선이었는데 통통배를 타고 가까이 갈수록 거대했다. 접안하려는 통통배와 비교되자 바다에 떠있는 거대한 우주선 같았다. 통통배가 거세게 출렁이는 파도와 잘 어울려보려고 노력하였으나 큰 파고에 맥을 못 췄다. 금방이라도 외항선과 부딪혀 산산조각 날 것 같았다. 반면 외항선은 미동도 없이 딱 버티고 있어 오히려 무서웠다. 외항선 배꼽아래쯤에서 작은 문이 열렸다. 통통배가 외항선에 줄을 걸어 꽁꽁 묶었다. 그럼에도 일렁이는 거센 파도에 외항선에서 내려진 줄사다리로 옮겨가기가 여간 힘들었다. 어린 문현아는 외항선에서 내려온 외국선원에 업혀갔다. 문승협과 이자연은 다른 외국선원의 도움을 받아 아찔한 줄사다리로 건넜다. 흔들리는 줄사다리를 기듯이 힘겹게 올라갔다. 문승협남매를 보살피려 따라온 지프차기사가 마지막으로 외항선에 승선하였다. 외항선 선체 중간 아래쪽 비상출입구에서 하얀색 마도로스옷을 입은 남자가 일행을 반갑게 마중하였다. 문승협이 통통배를 내려다보니 낭떠러지처럼 아득했다. 마도로스를 따라가는 길마다 둥그런 철망에 씌워진 등이 켜져 있었다. 좁은 미로 같은 공간과 계단을 한참 지나갔다. 어둠침침한 장소에 갇혀있는 폐소공포증이 생각날 때쯤, 세상과 통로를 알리는듯한 돔모양의 한줄기 빛이 나타났다. 빛을 따라 세상의 문을 통과하니 갑판이었다. 외항선에서 바라본 섬들과 도안광산의 풍경은 여객선과 별차이 없었다. 무심코 갑판난간에서 통통배가 있는 바다를 내려보다 오금이 저려 반쯤 주저앉았다. 조금 전 비상출입구에서 느꼈던 아찔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까마득한 높이에 비명을 지를뻔해 입을 막고 철렁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도로스복장의 남자가 씩 웃었다. 윙크를 하며 다시 따라오라고 손짓하였다. 일행을 인솔하여 선수갑판으로 안내했다. 문승협일행은 선수갑판에 도열하여 동서남북을 배경으로 외항선 승선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자연이 겁도 없이 게양대에 섰다. 문승협에게 사진 찍자며 오라고 손짓하였다. 문승협은 망설이다 가슴 졸이며 올라갔다. 일행이 선미갑판과 선실을 구경하고 항해실과 조타실로 들어갔다. 정복을 입은 선장과 항해사를 비롯한 다수의 선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소개와 인사가 끝나고 사브리나 3만 톤급 벌크선이라며 외항선에 대해 설명했다. 선장이 문승협에게 모자를 씌어주며 배키를 잡아보라고 하였다. 문승협이 자신보다 커 보이는 키를 잡고 돌리는 시늉을 하자,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사진도 찍었다. 선장이 배를 방문하는 특별한 손님에게만 주는 선물이라며 상자를 하나씩 건넸다. 러시아민속공예품 마트료시카였다. 어머니의 인형이라는 뜻으로 다산과 다복, 부유함과 행운을 가져온다며 통역을 통해 알려주었다. 수출과장과 세관계장을 비롯한 몇 사람은 선적일정과 통관에 관한 업무협의를 위하여 회의실로 이동했다. 이자연과 문승협남매는 식당으로 갔다. 주방장 특선이라며 준비해 준 식사와 후식을 맛있게 먹었다. 햄버거스테이크와 아이스크림도 처음 먹어본 맛이었지만, 파이는 난생처음이었다.
“외국사람을 본 적은 있는데, 이렇게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에요.”
“긍께 말이어, 러시아사람도 있고, 아까 본께 중국사람도 있던디? 음식들도 다 신기하고.”
“그래서 견문을 넓혀야 하나 봐요, 대화하려면 외국어 공부도 필요하고.”
“오빠, 나는 이렇게 큰 배가 바다 위에 떠있는 게 너무 신기해.”
“큰 배도 배지만은, 이러코롬 넓고 큰 배가 다니는 세계는 얼마나 넓으까잉?”
이자연과 문승협남매는 식당을 나와 선미갑판 그늘에 앉아 상자를 열었다. 크기가 점점 작아지며 계속 나오는 인형이 신기했다. 이자연이 보았다던 중국인 선원이 봉투를 들고 다가왔다.
“이거 Note and pencil, 선물. Good 좋아, 미국 거 USA. 나 중국 China, 친구 OK?”
“Thank you. Friend OK. What’s your name?”
“ChenChun, 한국이름 진춘. Call me 봄, spring.”
중국인 선원이 서툰 한국말로 미국산 공책과 연필을 선물이라며 주었다. 이자연이 친구 하자는 말에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영어를 총동원해 대화를 시도했다. 중국인은 ‘봄’이라고 부르라며 수첩을 꺼내 필담을 하였다.
“나이는 23세, 집은 상하이, 펜팔로 계속 연락해서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 인상 좋고 귀여운 남자동생이면 좋겠다, 당신 이름이 뭐냐?”
“이름 문승협, 나이 12세, 지금 집은 목포, 펜팔에 동의하고 좋은 동생이 되겠다.”
이자연이 영어를 섞은 필담으로 통역역할을 하였다. 문승협 주소를 받아 적은 후 중국인 선원에게 전했다. 봄의 주소와 필담한 종이를 문승협에게 주었다.
“누나, 이 형은 누나 주소가 필요한 거 아닐까요?”
“나도 혹시나 했는디, 나한테는 별 관심 없다야.”
“서운해요?”
“아조 서운해서 이 배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됐냐?”
중국인 선원 봄이 문승협에게 영어로 편지 쓰기 어려우면 한글도 무방하다며, 자기가 알아서 읽어볼 테니 신경 쓰지 마라고 하였다. 문승협이 꼭 편지할 테니 답장이나 잘하라고 하자, 봄이 문승협머리를 쓰다듬었다.
수출과장과 세관계장이 하선하자고 찾아왔다. 중국인 선원 봄이 아쉬워하며 문승협과 악수했다.
하선은 승선 때와 반대로 갔다. 외항선 비상출입구에서 줄사다리를 타고 통통배로 내려갔다. 마치 TV에서 봤던 해병대원들이 훈련하는 것처럼 어렵고 무서웠다. 문승협이 통통배로 옮겨 탄 뒤 손바닥을 보았다. 내려오면서 줄사다리를 얼마나 꽉 쥐었는지 시뻘겋고 아팠다. 이자연도 손을 쥐락펴락하여 비비고 펴보았다. 문승협손을 가져다 살펴보고 어루만져 주었다.
“아프지잉?”
“조금 아프긴 한데, 참을 만해요.”
“잘 구경했냐?”
“네, 아주 좋았어요. 기회가 된다면, 어른이 돼서 또 와보고 싶어요.”
“으째서야?”
“어른이 된 봄형도 궁금하고, 내가 어른이 돼서도 배가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지도 궁금하고.”
“그 중국인 선원 봄오빠는 뭔 사연이 있는 거 같어, 근디 인상은 좋드라. 그냥 내 느낌이여.”
“봄형하고 펜팔 하면, 누나가 맘에 들어한다고 전해줄게요.”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귀공자상이여. 선원 할 사람이 아닌 것 같드란께.”
“누나도 엄마한테 관상을 배운 거예요? 아니면, 누나의 이상형?”
“너 시방 무슨 질투 같은 거 하는 것이제? 너 나 좋아하그만?”
“뭐래, 누나랑 나랑 나이차이가 얼만데 이러실까?”
“얼마 전에 옆집 언니가 연하남 이야기 하던디, 나도 진중하게 한번 생각해 보까?”
“그 니나놋집 누나요?”
“잉, 나보다 가슴 크다고, 승협씨를 유혹한 그 언니.”
“아 진짜, 별말을 다하네.”
“으짜스까잉, 승협씨 얼굴이 빨개졌어라우, 호호호.”
통통배가 선착장에 도착해 모두 하선하였다. 문승협은 세관계장과 수출과장에게 외항선견학을 시켜줘서 감사하다며 인사했다. 이자연이 사택에 가서 밥 먹기에는 너무 피곤하다며 자기 집에서 저녁 먹자고 하였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잉, 울 애기들 왔냐. 잘 있었냐, 별일 없었제?”
“네.”
“어여 손 씻고 밥묵자.”
문승협이 손을 씻으면서도 그러더니 밥을 먹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식당이 이전과 달라 보였다. 그릇으로 가득했던 찬장이 여기저기 비어있고, 이런저런 잡동사니로 가득한 식탁 위도 깨끗했다. 마치 장사를 끝냈다고 정리한 느낌이었다.
“전에 왔을 때랑 식당이 달라진 거 같아요.”
“잉, 인자 장사 안 한께 정리했제.”
“네? 장사를 안 해요?”
“아 아니, 그런 것이 있어. 자, 이것도 묵어봐라. 톳 무침인디, 새콤달콤해서 맛나야.”
“감사합니다.”
문승협은 이자연어머니가 장사를 안 한다고 했다가 이자연눈치를 보고 말을 돌리는 것도 이상했다.
“모레, 화요일에 간다고?”
“네.”
“아심찬해서 으짜까. 으짜든 어른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야 써, 건강도 잘 챙기고잉?”
“네, 아줌마도 항상 건강하세요.”
“잉. 안 그래도 가기 전에, 밥 한번 해 먹여야 맘이 편할 것 같았는디. 그라고, 고맙다 아가.”
문승협은 알듯 모를듯한 이자연어머니말에 저녁 먹는 내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사택으로 가는 길에 이자연에게도 물었지만 시원한 대답은 없었다.
“내일은 나도 일이 있어서 못 온께,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어. 긍께 오늘은 여그서 자고 내일 오전에 갈란다.”
“내일 무슨 일인데요?”
“잉, 내일은 울엄니랑 할 일이 좀 있어갖고.”
이자연은 무슨 일인지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오늘 자고 내일 아침에 헤어지면 끝이에요?”
“으째, 서운하냐? 끝이라는 말은 하지 말고, 다음을 기약하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자.”
문승협은 그동안 있었던 일과 앞으로 계획 등 이자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밤새울 작정이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외항선에 다녀오면서 긴장하고 피곤한 탓이었다. 문승협은 이자연이야기를 듣다가 비몽사몽 간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말하면서 내려오는 눈꺼풀을 버텨내려 눈을 치켜떴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이자연은 그런 문승협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내일이면 기약 없는 이별을 한다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났다.
문승협이 깜박 졸았다고 생각해 아차 하며 눈을 떴다. 그러나 이자연은 곁에 없고 해가 중천이었다. 이리저리 가보고 베란다에 나가봐도 이자연이 없어 허탈하였다. 세상모르고 여전히 자고 있는 문현아만 있을 뿐, 이자연이 보이지 않아 왈칵 슬픔이 몰려왔다. 잠에서 덜 깨어 슬픔 가득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할머니 박옥춘이 책가방과 짐을 잘 챙기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옷가방을 꾸리다 이자연집에 가보고 싶었다.
“현아야, 음료수 좀 사 올게, 혼자 조금만 있을래?”
“응 알았어, 빨리 갔다 와.”
문승협은 단숨에 달려 이자연집으로 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문도 잠겨있었다. 니나놋집 누나에게라도 물어보려고 옆집을 들여다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뒤쪽 사당으로 가 대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인기척이 없었다. 잠시 서성이다 음료수를 사러 상점에 가서 아주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오늘은 이자연의 그림자도 못 봤다고 하였다. 혼자 있을 문현아 때문에 하는 수없이 사택으로 돌아왔다.
문승협남매는 저녁을 먹고 책가방을 쌌다.
“오빠 이거 봐, 자연언니가 쓴 쪽지야.”
“뭐? 진짜? 어디 줘봐.”
문현아에게 쓴 쪽지였다. 같이 지냈던 시간이 즐거웠으며, 오빠말 잘 듣고 예쁘게 커서 훗날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문승협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문승협은 자신에 대한 내용도 없고 자신에게는 이런 쪽지도 남기지 않은 이자연에게 마음 상했다.
“현아야, 이 쪽지 어디에 있었어?”
“필통에 들어있었어.”
문승협이 책가방을 풀어 다급히 필통을 찾아 열어보았다. 쪽지가 없어 실망스러운 마음에 혼잣말로 푸념하였다.
“치사하게, 나한테는 이런 쪽지 하나도 안 남겼냐.”
잠이 오지 않아 밤새 뒤척였다. 그러나 아침 해는 여지없이 떠올랐다.
선착장에는 방학과 휴가기간이라 여객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문승협이 지프차에서 내려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어디에도 이자연은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사람조차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이자연이 배웅 나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자신을 바보 같다며 자책했다. 배웅 나온 할아버지말에 잠깐 나갔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다음 달 추석에 갈 텐께, 할무니말 잘 듣고, 공부 잘하고 있어라잉.”
“예 할아버지, 추석에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
통통배에 타고 있는 남자가 삐 소리를 내며 확성기를 켰다.
‘후후, 다들 잘들으쑈잉. 지금 여객손님이 많아갖고 무자게 위험해라우, 먼저 탈라고 서둘다가 까딱하믄 바다에 빠질 수도 있은께 다들 주의 하쑈. 그래서, 두 번 나눠갖고 여객선에 승선토록 하께라우. 1차로 특실손님하고, 나이 드신 노인분이랑 아그들 먼저 태울랍니다. 언능 먼저 배에 타쑈’
운전기사가 짐을 챙겨 문현아손을 잡고 통통배로 올라갔다. 박옥춘과 문승협은 뒤따랐다.
통통배가 여객선에 접안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운전기사가 특실에 짐을 내려놓은 뒤 인사하고 갔다. 문승협남매는 박옥춘을 따라 좌석번호 앞에 앉았다. 승선하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선내가 정리되어 갈 즈음, 여객선이 출발을 알리는 뱃고동소리를 저음으로 굵직하고 웅장하게 뿜어냈다.
여객선이 쉼 없이 망망대해를 달리는 동안, 문승협남매는 선내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뒹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박옥춘이 싸 온 삶은 계란과 김밥을 먹었다. 목포항에 도착하려면 한 시간여 남았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문승협은 선내에만 있어서 좀이 쑤시고 답답하였다.
할머니에게 바람 쐬고 오겠다며 갑판 위로 나갔다. 짠내 나는 시원한 바닷바람과 서로 봐달라며 몸부림치는 만국기가 문승협을 맞이했다. 대한민국태극기와 미국성조기에 이어 중국오성홍기가 손짓하였다. 외항선에서 만났던 중국인 선원 봄형이 생각났다. 문득 여객선이 얼마나 빠른 속도인지 궁금해 바다를 내려보았다. 거침없이 돌진하며 갈라놓은 물결과 출렁이며 멀어지는 파도를 보다 어지러움을 느꼈다. 난간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 먼 발취로 시선을 돌렸다. 섬과 섬 사이를 다리로 연결하면 이런 여객선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갈매기가 부리를 바다에 쳐 박더니 어느새 머리 위를 돌아 멀리 날아갔다. 지치면 쉴 곳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를 날아다니는 게 신기하였다. 저러다 지쳐 바다에 빠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했다. 여객선이 무인도 옆을 가까이 지나갈 때, 백 년은 더 된듯한 고목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졌다. 문승협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청정지역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와, 자연이 아름답다.”
“그래, 아름답제?”
문승협은 누군가 맞장구치는 소리에 무심코 뒤돌아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자연이 밝게 웃고 있어 깜짝 놀랐다.
“뭐예요?”
“자연이에요. 나 모르겄소, 자연이어라. 뭘 그렇게 넋 빼놓고 있냐?”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여기에 있어요? 어디 가요?”
“오메 숨 넘어가겄다, 하나씩 질문해야 답하제.”
이자연은 거듭 고민한 끝에 엄마와 함께 광주로 가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이왕 결심한 거 서둘러서 지금 광주에 기거할 곳을 정하러 간다고 하였다.
“그럼, 집이랑은 다 정리된 거예요?”
“아니, 그릇이랑은 대충 했는디. 광주에 집 구하는 것이 급한께, 나중에 봐서 정리할라고.”
“언제 결심한 거예요?”
“그날, 우리 곤충채집함시로 산꼭대기 동굴에 갔던 날. 그날 저녁에 엄니랑 야그 했어.”
“아, 그래서 그날 일찍 집에 간 거구나? 축하해요 누나, 누나는 꿈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자연이네요. 제가 봐도 아름다워요.”
“아따 남사스럽게 으째 그라냐. 인자 그만해야, 좀 거시기하다.”
“누나가 쑥스러워하다니, 웬일이대? 이런 사람이 나중에 유명한 가수 되면 모른척한다니까.”
“호호, 연설하네 진짜. 그런 일은 없을 것인께, 걱정 붙들어 매.”
“뭐예요, 가수가 안 되겠다는 거예요, 모른 척을 안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가수 하고 싶다고 될 리도 만무한께, 모른 체끼 할 일도 없겄제?”
“그 말은, 가수가 되면 모른척할 수도 있다는 거네? 와, 배신감.”
“알았다 알았어, 내가 맹세하께, 절대로 문승협을 배신하는 일은 없다. 인자 됐냐?”
“누나 엄마도 엄청 좋아하시겠다. 감쪽같이 속이시다니, 좀 따져야 하는데.”
“울엄니가 무자게 고마워했어야, 다 니 덕분이라고.”
“참, 누나도 섭섭해요. 현아한테는 쪽지라도 남겼지, 나한텐 아무것도 없고.”
“잉? 방학공부에 넣어놨는디 못 봤냐, 집에 가서 찾아 읽어봐.”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엄청 서운했는데. 그래서 혹시나 하고 선착장에서 목이 빠져라 찾았어요.”
“아, 그래서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었냐?”
“봤어요? 봤으면서도 왜 아는 체 안 했어요?”
“아따 사장님하고 사모님 계신께 그랬제. 긍께 시방 너를 찾아서 여그 온 거여.”
여객선에서 울리는 뱃고동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유달산이 보이고 목포항여객터미널이 눈에 들어왔다.
문승협과 이자연은 작별인사를 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서로 갈 길이 다르기에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 했다. 진한 아쉬움을 안고 헤어졌다.
문승협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가방을 풀고 방학공부를 폈다. 이자연의 편지를 읽었다.
이자연이 문승협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낌부터 공부를 결심하기까지 생각이 간략히 쓰여있었다. 문승협에게 건강과 공부를 당부하며 편지하겠다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문승협은 이자연에게 주소를 써준 기억이 없었다. ‘주소도 모르면서 도대체 어디로 편지하겠다는 거야?’라고 푸념하였다. 배에서 만났을 때라도 주소를 써줬어야 했다며 후회막급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