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풋사랑인가? - (1)
문승협은 간밤에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노곤한 몸으로 점심을 먹으며 TV를 보았다.
레슬링국가대표 ‘양정모’ 선수의 몬트리올올림픽 금메달획득뉴스가 몇 날 며칠 이어졌다. 양정모가 몽골선수‘제베그오이도프’를 제치고 금메달을 따내자 대한민국이 온통 흥분에 휩싸였었다. TV는 정규방송을 중단한 채 긴급뉴스를 계속 내보냈고 신문들도 호외를 찍어내기 바빴다. 이후 ‘대한민국 최초 올림픽금메달 획득’이라는 타이틀로 국가영웅에 등극한 양정모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하였다. 수많은 국민들의 환영 속에 김포공항에서 시청까지 카퍼레이드하는 장면을 전국에 생중계했다. 연일 반복되는 소식으로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이 한층 고조되었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반나체시위사건으로 여성노동자 70명이 부상하고 72명을 연행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중국탕산대지진’으로 사상자만 최소 50만에서 100만 명이 발생하여 인류역사상 최악의 재해라는 해외토픽도 며칠째 반복되었다. 충무로대한극장과 종로세기극장에서 ‘로버트태권브이’가 동시개봉되었다는 문화계뉴스만큼은 문승협의 귀를 솔깃하게 하였다.
문승협은 그제밤잠을 설친 데다 어제 오랜 시간 배를 탄 여독에 다시 낮잠을 청했다. 눈꺼풀이 감길 즈음 할머니가 다급히 작은 고모를 불러댔다.
“오매오매 으짜쓰까잉, 이러다 전쟁 나겄네. 아야 희경아, 이거 봐라잉, 큰일 났어야.”
“뭔 일인디 그라요?”
“북한 놈들이 나무 자르는 미군들을 도끼로 죽였다 안 하냐, 으짜까잉.”
방송에서 북한군의 판문점도끼만행을 긴급뉴스로 타전하였다. 군전투준비태세 데프콘3이 즉각 발령됐다. 난데없는 북한군의 판문점도끼만행사건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순식간에 한반도를 일촉즉발 전쟁공포로 몰아넣어 모든 뉴스를 삼켜버렸다. 미국방부와 합참의장은 공대지핵미사일 AGM-69 SRAM을 탑재가능한 F-111 전투기 20대를 아이다호주 마운틴홈기지에서 대구비행장으로 전진 배치시켰다. 괌에서 B-52 전략폭격기 3대가 발진하자, 군산비행장에 주둔한 미공군 F-4와 대한민국공군 F-5, F-4 전투기가 엄호하였다. 오키나와 가데나공군기지에서도 F-4 전투기 24대가 발진했다. 바다에서는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해군 제7함대 미드웨이급항공모함과 순양함 5척이 서해안으로 이동하였다.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미해병대 1,800명을 포함한 12,000명을 증파요청하고, 미육군 정예병력으로 20여 대차량과 813명 규모의 태스크포스 비에라를 편성했다. 165mm M135파괴포를 갖춘 미군 M728공병전차가 자유의 다리를 조준함과 동시에, 미육군공병부대가 임진강 도하준비를 위해 다리를 설치하였다. DMZ근처에는 미육군방공포병부대가 호크지대공미사일을 배치했고, 한미연합군은 보병부대와 자주포를 출동대기시켰다.
박옥춘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을 겪어봐서 걱정스러워했다. 전쟁 이후 태어난 문희경과 문승협은 막연한 걱정일 뿐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문승협은 할머니의 전쟁걱정에 동조했다가 작은 고모의 무슨 일 있겠냐는 태평함에 설득되었다. 하지만 잔인한 만행을 저지른 북한은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문희경이 옆에 와 앉아있는 문승협머리를 헝클어트리며 한마디 하였다.
“얼만큼 쏘다녀야 이러코롬 까매진대? 방학이라고 아조 신나게 놀아부렀그만?”
“조금 탔어요, 햇볕이 너무 강해서.”
“조금이 아니고, 흑인멩키로 시커멓게 변했단께. 이거 봐라, 팔에 껍질 벗겨진 거, 원래의 내 조카를 돌리도.”
“고모는 방학 동안에 뭐 했어요?”
“이 고모는 책하고 씨름하느라, 공부는 못하고 씨름기술만 늘어부렀다. 아참, 지난주에 철종인가? 니 친구라믄서 집에 찾아왔드라. 너 어디 갔냐고 묻길래, 도안광산에 놀러 갔다고 했어.”
“다른 말은 안 해요?”
“선경인가? 집에 여러 번 전화했는디,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해서 찾아왔다고.”
“또 다른 말은요? 선경이는 괜찮데요?”
“다른 말은 없었고, 또 오겄다믄서 갔어. 선경이가 누군디? 어디 아프대?”
“아 아녜요.”
“여자친구냐? 내 조카한테 여자친구가 있는갑네?”
“아녜요 그런 거.”
문승협은 잠깐 나갔다 오겠다면서 그 길로 김철종집으로 갔다.
최선경상황이 어떤지 궁금하고 걱정되었다. 이렇게 가까웠나 싶을 정도로 금세 도착한 김철종집은 잠겨있었다. 문을 좌우로 힘껏 열어보기도 하고 두드려도 보았으나 인기척이 없었다. 남강아버지가 가게에 들어가려다 문승협을 발견했다.
“승협이냐?”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잉. 철종이네는 지금 이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아침에 바리바리 싸 들고 해수욕장에 갔단다야. 이따 저녁 전에나 올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근데, 박현이 형네 가게는 웬 사람들이 저렇게 많아요?”
“전쟁 난다고 저 난리여, 라면이랑 생필품 같은 거 산다고 아까부터 줄 섰어.”
“그럼, 사재기하는 거예요?”
“잉, 아까까정 우리 쌀가게도 북적대다 인자 좀 한산하다. 참나, 손님이 달란디 안 팔 수도 없고 말이어.”
문승협은 김철종을 기다려야 할지 고민하다 최선경집 앞으로 갔다.
최선경네 약국과 병원도 문이 닫혀있었다. 거리와 시장통도 사람이 없어 한산했다. 날씨가 더워서라기보다는 판문점도끼만행사건 때문이었다. 하는 수없이 그냥 집으로 갔다.
할머니 박옥춘이 선풍기를 쏘이며 계속 TV를 보고 있었다. 작은 고모 문희경은 도서관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동생 문현아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문승협은 읽다 만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꺼내 들고 거실로 나갔다. 배를 깔고 엎드려 남은 열 페이지를 마저 읽어갔다. 책을 거의 다 읽을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유선동입니다.”
“문승협씨 계신게라?”
“네, 전데요?”
“아니, 전데요씨 말고 문승협씨 없소?”
“네? 제가 문승협인데요, 누구세요?”
“아 그라요, 난 또 이름이 전데요인 줄 알고. 여그는 목포경찰선디라, 판문점도끼사건 땜시 와서 조사 좀 받아야 쓰겄소.”
“네? 제가 왜요?
“뭔 말이 그리 많소, 와서 조사 받으라믄 받제. 깜방에 가야 정신 차릴라요?”
“누구냐? 승협아 누구 전화냐?”
“할머니, 경찰서라는데요?”
“아녀 승협아, 나여 철종이어. 아따 장난친건디.”
“할머니, 제 친구예요 친구.”
“아야, 니는 내 목소리도 모르냐?”
“야, 목소리를 변조하면 내가 어찌 알겠냐.”
“큭큭큭, 감쪽같제? 내가 시방 집으로 갈 텐께, 집에 있어라.”
“아냐, 내가 너네 집으로 갈게.”
문승협은 집을 나와 김철종집으로 뛰어갔다.
“날씨도 더운디, 뭐더러 뛰어 댕기냐?”
“아까 왔었는데, 집에 아무도 없더라.”
“알어, 남강이 성네 아부지한테 듣고 전화한 거여. 근디, 너는 완전히 깜시가 돼갖고 왔다잉.”
“너도 만만찮게 탔는데?”
“이 난리만 아니믄 더 놀다 올 것인디, 점심 묵다 방송 듣고 바로 왔어. 놀러 온 사람들도 다 짐 싸드라.”
“이 상황에서 더 노는 것도 이상하지, 빨리 돌아온 게 잘한 거야.”
“인자 본론으로 들어가보까? 뭣부터 야그 해주까?”
“너는 다 좋은데, 알면서 꼭 애간장 태워, 그거 나쁜 거야.”
“그래? 그라믄 뭐, 나쁜 놈은 말 안 할란다.”
“아, 죄송합니다 철종씨.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사과드립니다.”
“큭큭, 진작 그럴 것이제.”
김철종말에 의하면, 최선경은 한 달간 연세대학병원에 입원해 치료와 정밀검사를 하였다. 다행히 수술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어서 심각한 상황은 면했다.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될 때까지 계속 약을 복용하면서 관리해야 하고, 심장에 무리가 가는 활동은 모두 금지되었다.
“선경이가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겠다.”
“뭔 소리 다냐, 니가 잘못한 게 뭐 있다고.”
“그때 내가 축구만 안 했어도, 그런 일 없었을 텐데.”
“염병 걱정도 팔자라드만, 그것이 무슨 니 죄냐? 그런 걸 불가항력이다, 그러는 것이어.”
“선경이는 만나 봤어? 어때?”
“한번 봤는디, 좋게 말하믄 더 하얘지고 예뻐졌제.”
“나쁘게 말하면?”
“얼굴에 핏기가 없어갖고 창백해 보여서, 쪼까 안쓰럽드라. 그래도, 성격은 똑같어.”
“움직이는 거는 괜찮아?”
“그런 건 괜찬해. 선경이한테 전화 한번 해 보까?”
“전화해도 괜찮을까?”
“으짠대, 선경이 엄니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암시랑 안 해야.”
김철종이 수화기를 집어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문승협 심장이 쿵쾅거렸다. 신호가 몇 번 가더니 통화가 연결되었다. 김철종이 계속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선경이가 잠들어갖고, 전화받기 어렵단다야. 일어나믄 전화 왔었다고 전해주겄대.”
“아직도 많이 안 좋은가?”
“곰방 일어날 때 됐단께 기다려보자, 일어나믄 전화하겄제.”
“선경이 엄마 셔?”
“잉. 그라고, 선경이가 서울서 와갖고, 너랑 통화가 안 된다믄서 답답해했어야. 선경이가 하도 너를 찾길래, 내가 느그 집에 갔다가 고모만 만나고 왔어.”
“응, 작은 고모한테 들었어.”
“나랑 재잘이 민주랑 같이 가서 니 소식을 전해줬는디도, 직접 봐야 궁금증이 풀릴란가, 엄청 애달아 하드란께. 니 성격에 허벌나게 걱정할 거 라믄서, 선경이가 심난해하드라.”
문승협은 자기 병치례에도 불구하고 염려해 준 최선경에게 미안했다. 자신만 너무 태평하게 방학을 보낸 것 같아 죄책감마저 들었다.
문승협은 전화를 기다리다 저녁시간이 되어 집으로 갔다. 김철종어머니가 같이 저녁 먹자고 했지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았다. 밥때를 지나 들어가면 호통칠 할머니가 무서웠다. 불안해하며 기다릴 동생도 걱정되었다.
문승협이 손 씻으러 목욕탕에 들어간 사이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나 하여 다급히 씻고 나갔다. 할머니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힐끗 흘겨보면서 부엌으로 갔다.
“아까도 오더니 또 왔네, 뭔 가시나들이 밤늦게 남자집에 전화하고 난리까잉. 쬐깐한 것들이, 쯧.”
할머니가 들으라는 듯 짜증스럽게 혼잣말을 하였다. 문승협은 남자집에 전화한다는 말에 꽂혔다. 평상시 집에 남자는 자신뿐이어서 자기 전화였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무슨 야단을 들을지 몰라 묻지 못했다. 저녁상 차리는 할머니를 도우러 주방으로 가는데 또 전화벨이 울렸다. 재빨리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유선동입니다.”
“승협아 나여, 철종이.”
부엌에서 할머니가 퉁명스레 누군지 물었다. 김철종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 손으로 수화기를 막았다.
“제 친구예요 할머니.”
“아까 그 가시나냐?”
“아뇨, 남자친구예요.”
더 이상 할머니의 질문이 없자 통화를 시작했다.
“여보세요, 철종아 말해.”
“아야, 느그 할무니는 뭐가 그리 싸납대?”
“왜, 무슨 일 있었어?
“아까 선경이가 느그 집에 두 번 전화했는디, 엄청 혼났다드라.”
“그래?”
“잉. 첨엔 집에 없다고 탁 끊드만, 나중에는 가시나가 밤늦게 남자집에 전화한다고, 막 뭐라 했는갑서.”
“선경이가 그래? 선경이 많이 놀랐겠다.”
“선경이가 그렇게 말했겄냐? 너 우리 집에서 간 뒤로 선경이한테 전화와 갖고, 너 곰방 갔다고 했는디, 아마 맘이 급해서 니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연속 전화 했는갑드라. 그래갖고, 느그 할무니가 밤늦게 여자가 전화하는 걸 싫어하시는 것 같다 함시로, 또 전화하기 무섭다믄서 나더러 좀 전해달라 하드라고.”
“그랬었구나, 내가 나중에 선경이한테 설명할게. 그래서 선경이가 뭐래?”
“잉, 내일 12시에 교문 앞에서 만나자고. 그라고, 뭔 책을 줬는디, 다 읽었으믄 갖고 오라드라.”
“그래 알았어, 고마워.”
문승협은 전화를 끊고 후회했다. 가끔은 친구집이니까 민폐 끼치며 저녁 좀 얻어먹도 되는데, 그놈의 예의 지키려는 강박에 최선경전화도 못 받고 봉변까지 당하게 했다며 스스로를 원망하였다.
최선경과 한 달여 만의 만남이라 설레어 밤잠을 설쳤다. 약속시간 10분 전에 도착하였으나 만나기로 한 교문이 강당에 가까운 교문인지 운동장 쪽 정문인지 헷갈렸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면서도 혹시 몰라 정문 쪽을 계속 응시했다. 다음 주 개학인데도 학교 주변이 한산하였다. 역시 판문점도끼만행사건 때문인지 오가는 아이들이 두세 명뿐이었다.
학교시계탑의 시침과 분침이 정확히 12시를 가리켰는데 최선경이 나타나지 않았다. 문승협은 긴장하여 목을 쭉 빼고 교문으로 오는 세 갈래 길을 수시로 둘러보았다. 5분이 넘어가자 정문 쪽에 가보려고 막 두어 걸음 옮기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문승협 어디가? 여기야 여기.”
“뛰지 말고 거기 그냥 있어, 내가 갈게.”
문승협이 강당 쪽 3층 계단에서 다급히 뛰어내려오는 최선경에게 소리쳤다. 오지마라고 손짓하며 2층 계단까지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장난 삼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냥 가버리는 줄 알았잖아.”
“넌 앞으로 뛰지 마, 그냥 있어. 내가 뛰고 내가 갈 테니까, 알았지?”
“왜?”
“왜가 어디 있어?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러지.”
“왜 좋을 거 같아?”
“내가 너한테 가는 게 좋으니까.”
“왜 나한테 오는 게 좋아?”
“전에 그랬잖아, 좋은 건 이유가 없을 수 있다고.”
“나한테 그런 말 한적 없는데? 어떤 여자한테 했어?”
문승협은 최선경이 아닌 이자연에게 했던 말이어서 움찔하였다.
“너, 많이 당황한다?”
“당 당황은 무슨, 네 말투가 옛날과 너무 달라서 그런 거지.”
“방학 동안에 새로운 여자라도 생겼나 봐?”
“에이 새로운 여자라니 뭔 소리야, 나한테 여자가 어디 있다고. 그럼 옛 여자는 누군데?”
“나.”
“네가 왜 옛 여자야? 무슨, 말도 안 돼.”
“네가 딴 여자를 만나는 순간, 난 옛 여자가 되는 거야, 알았어?”
“난 네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어.”
“그래? 그럼 내가 물어볼게. 좋은 건 이유가 없다면, 싫은 건 이유가 있겠네?”
“그 그렇겠지.”
“그럼, 내가 뛰면 걱정되고 싫지?”
“응.”
“왜?”
“네가 또 아플까 봐 그러지.”
“왜?”
“…….”
“동정이야?”
“아니야 그런 거.”
“동정이 아니면 뭐야? 시시껄렁하게 우정이라고는 하지 마라, 오늘 죽는 수가 있다.”
“우 우정은 아닌 것 같은데, 나도 이런 감정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어.”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 그 감정을 알아내기 전까진, 다른 여자는 금물이야.”
“너 전에 내가 부탁하면 하나 들어주기로 했는데, 기억해? 그거 쓸게.”
“딴말 말고 대답해라. 다른 여자는 금물.”
“알았어, 금물.”
“부탁이 뭔데?”
“앞으로 절대 뛰지 않기로 약속해.”
“그 정도는 그냥 들어줄 테니까, 부탁으로 쓰지 말고 아껴둬.”
“아 진짜? 고맙다, 들어줘서.”
“고맙긴, 다 나를 위한 거구만 무슨, 내가 다 고맙지. 책은 가져왔어?”
“응, 여기.”
최선경이 읽은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와 문승협이 읽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교환했다. 둘 다 점심 먹기 전이라 최선경이 근처 분식집으로 문승협을 데려갔다. 떡볶이와 순대를 주문하였다.
“나는 특히 순대랑 같이 나오는 간을 좋아해, 잘 기억해 둬.”
“나도 좋아해.”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있어? 오늘은 내가 살게.”
“이거면 됐어, 괜찮아.”
“이 정도는 나 혼자도 먹는데 무슨 소리야, 다른 거 더 시켜.”
“그럼, 만두 하나 시킬까?”
“남자가 말도 좀 시원하게 하고, 당당하게 하고픈 대로 해라 좀.”
“선경아, 너 같지 않아서 좀 이상해.”
“내가 하던 대로 하니까, 우리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서 그런다. 나도 용기 내서 이러는 거라고, 너 기다렸다간 내가 속 터져 죽을 거 같아서. 너, 나 아픈 거 알지?”
“아 알았어, 너 하고픈 대로 해 그럼.”
“너는 남을 생각해 주느라, 너 자신을 잊고 살아. 지금도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사이의 틀을 깰 수가 없어. 그럴 필요 없어, 남보다도 너 자신을 먼저 배려해. 넌 그래도 잘할 거고, 네 인간성이면 그래도 돼. 물론 이 말이 쓸데없다는 것도 알아, 넌 원래 그런 아이니까. 하지만, 절대 널 놓치지는 마. 자신을 먼저 잘 돌보고 사랑해 주라고.”
“알았어, 노력할게.”
“근데, 나만 먼저 배려하는 건, 괜찮을 거 같긴 하다.”
“응, 그럴게.”
최선경은 미리 준비한 말도 아닌데 술술 나왔다. 말하면서도 문승협을 많이 연구하고 생각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순한 양처럼 수긍하면서 받아들이는 문승협모습에 흐뭇하였다.
문승협은 최선경의 저돌적인 태세에 자못 놀랐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라는 것도 뜻밖의 낯 설음이었다. 아프다는 위협과 자신만 먼저 배려하라는 귀여움도 있었다. 공감 가는 말만 해서 어른스러워 보였다.
“똑똑하니까, 내 말 잘 알아 들었으리라 믿을게. 그런데, 방학 때 뭘 했길래 이렇게 탔어?”
“할아버지가 있는 도안광산에 갔거든. 거기가 바닷가라서 탔나 봐. 이렇게 많이 탄 줄 몰랐어.”
“내 생각 안 났어? 난 네 생각 많이 했는데.”
“생각했지, 왜 안 했겠어.”
최선경이 서울에서 치료와 검사를 받는 동안 제갈민주와 김철종을 통해 소식을 들었다고 하였다. 걱정할까 싶어 여러 번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아 답답했다며 째려보았다. 퇴원하면 빨리 목포에 가서 너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만 했다고 푸념하였다.
문승협은 최선경만큼 생각하지 않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도안광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도 혹시나 민감하게 반응할까 봐 이자연과 관련된 부분은 말하지 않았다.
“다른 일은 없었어?”
“응, 뭐 특별히 다른 일은 없었어.”
“엄마의 촉을 무시하다, 봉변당하는 우리 아빠를 가끔 봤어. 여자의 촉을 무시하지 마.”
“어 없어, 정말이야.”
최선경은 말하지 않은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문승협은 이자연이야기를 할까 망설이다 타이밍을 놓쳐 못했다.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려줄 테니까, 전화하고 싶으면 해도 돼.”
“그래, 알았어. 그리고, 할머니가 좀 고지식하셔서 그런가 봐, 미안해.”
“괜찮아, 지난 일인데 뭐. 근데 좀 무섭긴 하더라.”
“글피 뒤면 개학인데, 방학숙제는 다했어?”
“그냥 방학공부만 받아서 했어. 다른 건 엄마가 못하게 하고, 할 시간도 없었어. 너는?”
“독후감만 빼고는 대충 했어, 아무튼 독후감만 마무리하면 다한 거 같아.”
“그럼, 내일은 독후감을 마무리하고, 모레 시간되면 전화할래?”
“응, 그럴게.”
문승협은 최선경을 집에 바래다주고 집으로 향했다. 갑자기 붕 뜬 기분이 들면서 이런 게 데이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손에 든 소설책 소나기를 보고는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소설 속 여주인공이 아파서 죽는 줄거리 때문이었다. 소설은 소설일 뿐 소설이 현실처럼 되어서도, 현실이 소설처럼 돼서도 안 된다며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최선경의 건강상태와 병에 대해 묻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정작 걱정하며 알고 싶었던 걸 빼고 딴짓만 한 것 같아 자신이 불만스러웠다.
저녁식사 후 방에 들어가 배를 깔고 엎드려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 서론을 써 내려가다 최선경이 써준 집전화번호를 펴보며 자신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문현아가 문승협을 보고 의아해하였다.
“오빠, 무슨 좋은 일 있어?”
“어? 왜?”
“오빠가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봐.”
“내가 웃었어? 언제?”
“방금.”
“아, 이것만 마무리하면 방학숙제 끝이거든.”
문승협이 동생에게 대충 둘러대고 드러누웠다. 천장에 최선경얼굴이 나타났다.
새초롬하게 째려보는 얼굴, 뾰로통한 얼굴, 투정 부리는 얼굴, 똘망똘망 쳐다보는 얼굴, 환하게 웃는 얼굴, 무표정하지만 밝은 얼굴, 단호한 얼굴, 걱정스러워하는 얼굴, 눈물 맺힌 슬픈 얼굴, 최선경의 환영이었다.
문승협은 마지막에 떠오른 눈물 맺힌 슬픈 얼굴은 지워버리고 싶었으나, 행여 다른 얼굴들도 함께 지워질까 봐 그대로 기억 속에 간직하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즐거운 기분이었다. 눈을 감자 최선경의 눈물 맺힌 슬픈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괜히 신경 쓰이고 목에 뭔가 걸린 것처럼 찝찝한 기분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