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풋사랑인가? - (3)
미국이 북한의 판문점도끼만행사건을 보복하기 위해 저돌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먼저 군전투준비태세를 데프콘3에서 데프콘2로 한 단계 격상시켜 전군에 탄약을 지급하고 부대편제인원을 100% 충원했다. 이와 동시에 사건 원인인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폴버니언작전’을 전개하였다. 한국 또한 박정희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육군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대원들로 64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미육군공병들을 엄호했다. 육군 제1보병사단수색대는 그 일대에 매복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는 북한의 반응에 따라 수위를 조절하겠다는 미국의 계산이 있었다. 북한이 두려워하며 침묵으로 무대응 하자 더 이상 보복 없이 종결했다. 군관계자의 판문점도끼만행사건에 대한 한미보복작전브리핑이 일요일 저녁 늦게까지 계속 반복하여 방송되었다.
문승협은 늦잠을 잔 데다 동생 문현아까지 챙기느라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무슨 조화인지 방학 내내 아침 일찍 눈이 떠졌는데 2학기 개학날 아침은 천근만근이었다. 방학이 끝날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이번 여름방학도 유독 짧게 느껴졌다. 여름방학숙제를 챙겨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등굣길에 나선 학생들의 어두운 표정과 무거운 발걸음이 개학을 실감케 하였다. 여름방학이 끝났다는 아쉬움과 다시 공부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야 하고, 앞으로 일상에서도 딱히 즐거울 일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다들 방학 동안 많은 일이 있었을 텐데도 이상하게 무더위와 싸운 지루한 기억만 또렷했다.
학교에 가까워질수록 2학기개학첫날을 알리는 동요가 떠들썩하게 들려왔다.
‘발맞추어 나가자 앞으로 가자, 어깨동무하고 가자 앞으로 가자~. 흰구름 꽃구름 시원한 바람에, 양 떼들 풀 파도 언덕을 넘는다~. 미루나무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놓고 갔어요~’
어떻게든 등교하는 학생들 기분을 띄워 발걸음이라도 가볍게 해 보려고 교정구석구석 울려 퍼졌다. 교실로 들어서는 아이들 표정을 보면 허사만은 아니었다. 안간힘을 쓴 동요효과인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설렘임인지, 다들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반가운 인사와 방학 동안 안부를 묻느라 교실이 떠들썩하였다.
“아야 문승협,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응? 응, 넌 잘 지냈어?”
“잉, 나야 잘 지냈제. 근디, 니는 뭐 했는디 그렇게 시커멓게 타부렀대?”
“하하, 섬에 놀러 갔는데 좀 탔어.”
“아야 아그들아, 이 서울놈 좀 봐라잉, 깜시가 돼서 왔어야?”
“어디 갔는디? 아프리카 갔다 왔냐, 하하하.”
문승협은 뜻밖에 강덕구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와 놀랐다. 다른 아이들도 손을 흔들거나 웃음으로 반가움을 표시하였다. 문승협은 어색하고 서먹하던 1학기 때와 다르게 다들 반겨줘서 좋았다. 그러나 김용남과 강모세 등 경계하고 적대적이던 아이들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김철종이 교실을 돌며 떠들썩하게 일일이 인사 나누는 사이, 박진숙이 소리소문 없이 들어왔다.
“안녕, 잘 있었어?”
“잉, 승협이 니도 잘 있었냐? 그란디, 니는 몰골이 으째 그라냐? 이빨만 하얗다잉.”
“진숙이 니는 몰랐는가 본디, 승협이 원래 고향이 아프리카란다야.”
“느그 둘이 비까비까 한디, 철종이 니도 고향이 아프리카여?”
“음마, 그라믄 승협이랑 나랑 동향인갑네? 허허허.”
“반갑네 고향친구. 하하하.”
“와따메, 여그서 고향친구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그만잉. 허허허.”
셋은 햇볕에 검게 그을린 피부를 화제 삼아 오랜만의 인사를 나눴다. 교실 여기저기서 무용담 같은 방학이야기로 웅성거렸다. 담임선생이 교실로 들어서자 조용해졌다.
“열중쉬어, 차려, 선상님께 경례.”
“안녕하셨어라우?”
“잉, 잘들 있었냐?”
반아이들이 반장 김용남구령에 따라 반가운 마음을 담은 우렁찬 목소리로 안부인사를 하였다. 고삼랑선생도 기분 좋게 제자들을 반겼다.
“선상님, 시방 나라가 껄쩍지근한 상황인디, 동요가 거시기하던디요?”
“뭔 소리 다냐?”
“판문점도끼만행사건이 엊그제그만, 미루나무꼭대기에 노래가 나와 분께, 쪼까 거시기합디다.”
“염병, 동요는 동요일 뿐이어.”
“뭔 귀신 씻나락 까묵는 소리하냐, 그것 땜시 동요를 없애믄 쓰겄냐?”
“그라믄, 모세 니가 가사를 바꿔 부러.”
“모세 니 말이 뭔 말인지는 알겄는디, 느그는 느그 나이에 맞게 생각해야 써, 알겄냐?”
“예.”
강모세가 등굣길에 틀어놓은 동요‘흰구름’ 가사를 문제 삼았다. 아이들 몇 명이 강모세를 타박하였다. 담임선생이 강모세와 반아이들을 다독이고 둘러보다 문승협에게 시선이 멈췄다.
“승협이만 방학이었는갑다? 다들 까무잡잡하긴 한디, 유달리 탔다잉. 얼마나 재밌었으믄 그러까?”
“도안광산에 다녀왔는데, 거기가 바닷가라서 많이 탔어요.”
“아니어라우 선상님, 승협이 고향이 아프리카인디, 고향 갔다 와서 그래라우.”
장난 섞인 억지스러운 김철종놀림에 담임선생과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도안광산에는 누가 있는디?”
“할아버지요.”
“할아버지 혼자 가 계시냐?”
“다른 광산을 돌아가면서 들리는데, 이번에 방학기간이랑 겹쳐서 다녀왔어요.”
“그랬냐. 참, 할무니께 내가 감사드린다고 전해라.”
“네?”
“아니다, 이따 수업 끝난 뒤에 나 좀 만나고 가그라.”
고삼랑선생은 이후에도 아이들 몇 명을 지목해 방학생활을 물었다. 그리고 개학일정을 알려주었다.
오늘은 2학기 교과서만 나눠주면 수업 끝이었다. 내일은 강당에서 시청각 반공교육, 모레는 짝꿍 재 배정, 금요일에 2학기 반장선거, 다음 주 수요일에는 전교학생회임원을 선출한다고 하였다.
반아이들이 1학기 때처럼 교과서를 배부받고 하교하였다. 문승협은 김철종을 데리고 새 교과서를 받고서 감당 못할 문현아에게 갔다. 김철종에게 잠깐 문현아를 부탁하고 교무실로 담임선생을 찾아갔다.
“잉, 왔냐.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 학교대강당에 있는 것들을 싹 다 새것으로 갈았어야. 그 벽 쪽에 유리창을 가리는 암막커튼이랑 조명시설하고, 단상 위 무대 커튼하고 대형시계도 바꿨어. 그라고 음향기기랑 비품도 샀는디, 비용이 솔찬이 들어갔을 거여.”
“네?”
“아, 니는 모른갑다잉? 그거를 박동후회장님이 육성회를 통해 기증했단다. 교장선상님이 말씀하시믄서, 승협이 할무니께도 감사인사를 전하라고 하시드라.”
“우리 할머니는 왜요?”
“박동후회장님이 문승협하고 문현아가 내 여동생손주인디, 우리 학교 다닌다믄서 교장선상님께 말씀하셨다드라. 긍께, 교장선상님이 느그 할무니한테도 감사하다고 한 거제.”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잉, 담임선생하고 교장선생님이 할무니께 감사하다고 전해달랍디다, 라고 하믄 돼야. 아마 느그 할무니도 알고 계실 것이다.”
“네.”
문승협이 교무실을 나와 서둘러 교문 앞으로 뛰어갔다. 하교하는 아이들을 사이에서 문현아와 김철종을 찾았다. 분식집에 있던 김철종이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문승협을 보고 큰 소리로 불렀다.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다.”
“안녕?”
“오랜만이다. 호호, 진짜 까맣다잉.”
“어, 안녕. 같이 있었네?”
“현아랑 학교 앞에 있는디, 선경이랑 재잘이를 만났어. 같이 기다리다 배도 고프고 해서 이리 왔어.”
문현아가 만두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 포크로 순대 옆에 있는 간을 찍어 문승협에게 주었다.
“오빠, 이거 먹어 봐, 고소하고 맛있어.”
“응, 알아.”
“알아?”
“응, 얼마 전에 누가 사줘서 맛있게 먹었어.”
문승협이 받아 들고 말하면서 최선경을 쳐다봤다. 최선경이 피식 웃으며 라면과 떡볶이 국물을 비빈 접시를 문현아에게 건넸다.
“현아 매운 거 먹을 수 있어? 이렇게 먹으면 맛있다고 누가 해 줬는데, 아주 특별한 맛이야.”
제갈민주가 문승협에게 미소 짓는 최선경을 보았다.
“음마, 내 말은 씹어 불고. 아야, 나는 가야 쓸란갑다. 그 누구 둘은, 즈그 둘만 보이는 갑서?”
“아따 재잘이 너는, 내 동상 현아가 인자 좀 먹을라 한디 으째 심통이냐.”
“내가 왜 오빠 동생이에요? 우리 오빠는 여기 문승협인데?”
“현아야, 니 오빠친구는 다 니 오빠인 거여, 그건 성경책에도 나온단께. 철종이 오빠, 하고 한번 해봐.”
“싫은데.”
“하하하, 호호호.”
“오메 속 시원한 거, 현아가 엄청시리 똑똑다잉.”
“그라고 본께, 재잘이 너 아까 뭐라 했냐? 뭔 말을 씹고, 뭐가 둘만 보여야?”
“아니, 아까 선경이하고 니가, 승협이 깜시 돼서 왔다고 놀렸잖애. 그래서 내가, 승협이 온 거 보고 진짜 까맣다고 했는디, 니들이 쌩까분께 한말이제.”
“뭐, 선경이랑 철종이가 나를 놀렸다고?”
“승협이 너는 시끄럽고야. 그건 그렇다 쳐 불고, 둘만 보인다는 것은 뭐대?”
“철종이 니는 그렇게 눈치가 없냐? 맛나다는 간을 사주고 떡볶이 국물에 라면 비벼준 사람들이, 저 두 사람이잖애, 아니어?”
“뭐라고라? 그라믄, 우리 몰래 느그 둘이서, 그 데이또 한 것이어?”
“아니야, 데이트는 무슨. 철종이 너 잊었어? 승협이한테 전해달라고 내가 전화한 거.”
“그건 기억하제.”
“그때 둘이 만났던 거야, 그게 무슨 데이트냐?”
“하기사 선경이 아픈 후 궁금해서 만난 거고, 나도 둘이 만난 지 알고 있었은께. 그라믄 뭐 별 것도 아니그만.”
“아야, 관둬라. 오래간만에 껀수 하나 잡았다 했드만, 철종이 저시끼가 또 산통 깨부네.”
“재잘아 뭔 껀수야, 껀수 잡아서 으짤라고?”
“승협이하고 선경이 연애설 딱 만들어갖고, 그걸 무기 삼아 협박할라고 했제.”
“그렇게 협박해서 뭐 할라고?”
“선경이한테 한번 승협이한테 한번, 그러코롬 맛난 거 얻어먹으믄 누이 좋고 매부 좋제, 안 그냐?”
“야 제갈민주, 너 진짜 그렇게 생각한 거야?”
“호호호, 농담이어 농담, 아따 농담도 못하냐? 근디, 쪼께 아쉽긴 하다야.”
“민주야, 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거 아니지?”
“선경이는 이렇게 적극적으로다가 아니라고 한디, 승협이는 얼굴이 빨개 갖고 으째 가만있으까? 둘 중 하나는 거짓말하든가, 아니믄 표정으로 진실을 말하든가, 뭐 그런 것이어?”
“야 민주야, 너 진짜 계속 그럴래?”
“알았어, 알았단께. 그만하께, 됐냐?”
제갈민주의 의미 있는 추리는 맞았지만 표면상 그렇게 장난처럼 넘어갔다.
문승협은 동생과 집으로 가면서 제갈민주말에 극구 부인하는 최선경태도가 혼란스러웠다. 둘 사이의 관계를 친한 친구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싶은 것인지, 며칠 사이에 마음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생각이 그랬는데 혼자 오해한 것인지, 도대체 여자의 생각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에서 최선경을 만나면 어떻게 대하고 처신해야 할지 고민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로 자신을 맡기기로 했으나, 오늘 최선경태도로 보아 앞으로 어찌 대해야 할지 더욱 난감하였다. 또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명확히 정리할 수 없었다. 최선경을 생각하며 복잡한 심경으로 집에 도착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