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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하 Jul 19. 2024

'우마무스메'의 가르침

‘우마무스메’라는 영화를 아시는지? 일본어 까막눈인 내게는 그저 외계어로만 들리는 아리송한 말. 딸아이의 설명대로라면 우리나라에서는 ‘말소녀’, ‘말딸’, ‘망아지 소녀’ 등으로도 불린다던데, 뭐 어쨌거나. 그렇다면, 영화 ‘인사이드 아웃 2’는 아시는지? 물론, 개봉관 수가 ‘우마무스메’보다 훨씬 많은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난 2주간 딸아이와 두 영화를 모두 보았고, 한없는 오만함과 겸손함을 모두 경험했다는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 2’의 개봉 소식은 오래전부터 들었다. 사춘기 아이의 감정 변화를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호평이 자자했다. 모처럼 극장을 찾은 부모들도 특정 장면에서는 아이들보다 더 눈물을 쏟는단다. 그러니 중학생 딸을 둔 내가 안 볼 수 있나. (부모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는 딸은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은 것 같긴 하다만!) 마침 기말고사도 끝났겠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남편과 딸아이와 셋이 본 영화는 역시, 훌륭했다. 이상적인 가족의 하루를 보낸 나는 그래서 한껏 우쭐해졌다.     


 영화가 끝나자 딸아이가 말했다. 영화 시작 전에 본 다른 애니메이션 영화의 예고편도 좋았다고. 제목은 ‘우마무스메’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으로 만들었다고, 그러니 극장에서 꼭 보고 싶다고. ‘우마무스메’? 그제야 예고편 화면에 한 무더기의 소녀들이 등장했던 것이 가물가물 떠올랐다. 그래, 기왕 이상적인 가족으로 자리매김한 김에, 그 영화도 함께 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단, ‘아이와 나’ 조합 말고 ‘아이와 남편’ 조합으로!       


 일주일 후, 아이는 한껏 들뜬 채로 남편과 ‘우마무스메’를 보고 왔다. 딸아이는, 그 영화는 15년 인생 중 최고의 영화였다며, 또 보러 가면 안 되겠냐고 했다. 평소에 무엇인가를 또 하고 싶다는 표현을 별로 한 적이 없는 아이라, 낯설었다.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 이번엔 내가 가서 보고 싶어졌다. 결국 다음 날 표를 예매한 내게 남편은, ‘영화 시작하면 그냥 조용히 자.’라며 찡긋 웃었다.     


 일요일 밤 아홉 시 영화 관람이 대체 웬 말인가. 이 얼마나 지독한 모성애인가. 비현실적인 상황에 다소 몽롱한 기분으로 상영관에 들어섰는데 극장 안의 관객은 나와 딸아이를 포함한 네 명. 혼자 온 듯한 남자 두 명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이 묘한 분위기를 알기나 하는지, 딸아이는 ‘인생 첫 영화 N회차 관람’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되자 나는 당황했다. 소녀들의 수는 엄청나게 많은데 생김새는 죄다 비슷해서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뾰족한 귀는 머리띠처럼 달려 있고, 걸을 때 꼬리는 대롱대롱 흔들렸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켄타우로스와 13인조 소녀 그룹 ‘모닝구 무스메’의 결합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소녀들은 관중이 가득한 경기장에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다 1등을 한 아이는 갑자기 활동을 중단했다. 혹시나 약물 중독일까? 서사를 따라가 보고자 했는데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말꼬리가 달린 소녀들은 다음 경기에서 달리고, 또 달렸다. 이건, 도무지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완전히 낯선 세계였다.      


 숨 가쁘게 소녀들이 무한 질주하는 장면을 보자니 내 몸이 더 피곤해졌다. 누울 수도 없는 극장 의자에서 몸을 비틀다 보니 옆에 앉은 딸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럴 수가, 화면을 뚫고 들어간다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거였다. 이틀 연속으로 같은 영화를 보고 있는 아이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형형했다.      


 그때였다. 내가 아이와 같은 세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말이다. 물리적 공간에 함께 있지만 우리는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 아이의 우주는 나의 우주와 다르다는 사실. ‘인사이드 아웃 2’의 원형성은 함께 나눌 수 있지만, 아이에겐 내가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우마무스메’의 개별 세계도 있다는 사실. 내 몸에서 나온 아이지만, 분명히 독립된 인격체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사실.      


 며칠 후 마음을 다잡고 ‘우마무스메’를 검색해 봤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검색엔진인 ‘나무위키’의 정보에 정신은 더 혼미해졌다. ‘경주마를 의인화했다’는 문장에 이어, 해독하기 어려운 방대한 내용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실제로 활약한 말들의 이야기가 주구장창 나왔다. 혈연관계, 식습관, 달리는 방식까지. 딸아이와 마찬가지로, 그 한 무더기 소녀 떼는 개별성을 지닌 존재였다. 그 세계를 파악하려면 초등학생이 ‘포켓몬 대백과 사전’을 끼고 살 듯, 지금부터 한 명씩 공부해야 했다. 역시, 무리였다. 무리데쓰.     

 

 오늘도 딸아이는 우마무스메의 음악을 흥얼거렸다. 영화의 어떤 부분이 유독 좋았냐고 물으니, 끝도 없이 달리는 모습을 보면 속이 시원해진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영화 감상평에도 비슷한 내용이 속속 나왔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모든 색감이 완벽했다고, 이 돈만 내고 봐도 되는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역시, 내가 속하지 않은 거대한 우주가 있었다.      


 한집에 산다고 해서 어찌 모든 취향을 공유하겠는가. 애초에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마무스메 종족과 인간 종족처럼, 나도 딸아이와 평화롭게 공존하기로 했다. 우리 모녀는 남다를지도 모른다고, 나는 딸의 모든 부분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인사이드 아웃 2’ 관람으로 극대화되었던 나의 오만함은, 결국 ‘우마무스메’로 인해 겸손함으로 바뀌었다. 어쩌면 취향은 우주와도 같은 것이어서 아이와 나의 취향이 빅뱅을 일으키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음에도 감사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 영화도, 이제는 나의 인생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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