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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오리 Aug 30. 2024

초조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예전부터 나를 괴롭히던 녀석들에 대해 알아가기 (1)

초조함


나에게 있어서 초조함은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찾아온다.

초조함이 찾아오면 감정소모가 심해져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입은 바싹바싹 말라가고 민감한 장은 계속 화장실로 나를 보내려 한다.


예전에는 왜 이런걸까? 내가 초조함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

이래서는 안되는데 너무 답답하네? 이런 느낌을 가졌다.

어떻게든 해소하려고만 했었다.


해소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조언도 들으려고 했지만

주변에 있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조언은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그들의 조언이라는 것은 '네가 그냥 급한거지, 마음 편하게 하는 연습을 해봐'

이런 결과론적인 이야기 였으니까.

아니 나는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니까 방법을 물은건데...


그렇게 초조함이 찾아올 때마다 꽤나 애먹고 있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계기가 찾아온다.


심리상담사와의 만남이었다.

만나게 된 원인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지만, 금세 나는 그 일에 대해서는 회복하고

조금 남는 상담 타임을 이용해서 내가 평소에 가졌던 의문점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가지는 감정에 대해서는 잘 들여다봐야 해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작 해소를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든 없애려고만 하는 것은 회피이자 외면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내 나름대로 초조한 상황이 올 때마다 이것이 어디서 오는가를 꾸준히 생각해왔다.

내가 먼저 한 것은 초조함이라는 단어 분석 부터 였다.


한자로 보면 초는 그슬릴 초(焦)를 쓴다.
화 발 위에 있는 새 추 (隹)를 보면 새를 불태우는 것에서 단어가 만들어 졌음이 느껴진다.


조는 마를 조 (燥)를 쓴다.

왼쪽 변에 불 화가 있고, 오른쪽에는 나무위에 올려진 물품이 보인다. 뭔가를 불태워서 말리고 있는 것이다.


한자를 보면 초조함이라는 것은 불태우고 말려질 만큼 쥐어 짜여지는 감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동아시아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특정한 감정에 저런 단어를 붙인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이 그런 감정을 만드는 걸까?


내 마음이 불태워지는 느낌은 욕망에서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열망, 다른 것을 집어삼켜서라도 타오르고 싶은 그 마음

불로 희생자인 불쌍한 새를 태워버려서 먹어버리겠다는 그 욕망을 표현한 것이 그슬릴 초(焦)가 아닐까


내 마음이 비쩍 쥐어 짜일만큼 말리는 느낌은 조급함에서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건이 자연스럽게 바람에 마르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열을 가해 빠르게 물기를 없애거나 하고 싶은 그 마음이다.

시간이 아깝고 빨리 끝내고 싶으니까, 이 지루한 고통의 시간을 생략하고 성취감을 얻고 싶은 마음

그런 조급함을 표현하기 위해 마를 조 (燥)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


타오르는 욕망과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부하고 당기려는 조급함이 초조함을 만든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떤 인생의 시험대에 올라 결과를 기다릴 때 드는 초조함은 욕망과 조급함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초조함을 알고 보니 감정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나를 잘 달래줄 수 있었다.

'네가 지금 안된다고 해도 하고 싶은게 잘 안된 것 뿐이지 망한게 아니야'

'그리고 지금 성과를 내지 못해도 다음에는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게 쌓아가고 있는 과정이지 않니?'


이렇게 내 마음에 이야기를 해주면, 내 마음 녀석도 조금 탐탁지 않지만 마지못해 이렇게 대답해준다.

'뭐 그렇기는 하지... 그렇지만 아쉽네'


그런 내 마음을 보고 귀엽게 봐주고 '그래 아쉽기는 하다' 라고 토닥거려주면 확 풀리는 그 느낌이 든다.

그렇게 조금 감정을 조율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참 큰 성취감이 들었다.


아 물론 한 때는 조절이 잘 되었어도 초조함은 또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불쑥 나를 찾아온다.

같은 방법으로 처리하려고 하는데 뭔가 잘 안될때도 있다.

그렇다 해도 핵심적인 방법을 조금씩 변용시키고 타이밍을 바꿔가면서 달래다 보면

예전에 아예 다루는 방법을 몰랐던 것보다는 상태가 낫다.


아직 초월적인 깨달음에 다다르지 못한 수행자는

이렇게 반복되는 고뇌에 대해 잘 대처해가면서
점차 마음의 진폭을 좁혀나가는 것만해도 잘하고 있는거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앞두고 있는 평가에 당장 직면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도 또 초조함은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나는 초조한 나 자신을 잘 다독거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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