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넷, 꿈을 찾다.
일반 병실로 간다지만 아빠는 깨어있는 시간보다 자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가끔 의식이 돌아와 가족들을 알아보실 때도 있었다. 가족을 보면 마음이 놓이는지 웃음을 짓기도 하셨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잠들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이제 그만 좀 자, 아빠! 많이 잤잖아!"
하고 불러도 보지만 사실 깨어나셔도 걱정인 건 매한가지였다.
이제 본인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을 거라는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되면 또 얼마나 좌절하실지, 어쩌면 지금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못된 생각도 종종 머리를 스쳐갔다.
아빠는 혼자서 돌아눕기는커녕 콜벨조차 누를 수가 없고, 어쨌든 그래서 우리는 간병인을 고용해야 했다.
딸이 오면 어~어~하고 소리도 내시고, 잠깐씩이나마 눈도 마주치고, 손을 잡아드리면 잡은 아빠의 손에 힘이 들어가던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냥 집으로 모실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민했다.
"그냥 내가 집으로 데리고 갔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툭 하고 튀어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동생과 나 둘 다 집에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선뜻 집으로 모시자! 할 수도 없었고, 엄마는 이미 본인 챙기기에도 버거운 연세였다.
어쨌든 그래서 간병인을 고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곧 간병비라는 폭탄을 맞아야 했다.
간병비는 보험이 안 되는 비용이다. 언뜻 이해가 안 되었지만 그렇단다. 원래 안되었고 앞으로도 언제 될지 모르는 비용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나라에서는 의료보험이라는 걸 꼬박꼬박 받아갔지만 그 돈만으로는 예산이 부족한 건지 간병비는 보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나라에서 관리하는 업체도 없다. 따라서 업체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도 없고, 간병인의 관리도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저 궁지에 몰린 보호자들이 하나하나 업체에 전화해 간병인을 부탁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간병비는 부르는 게 값이다. 어느 정도 시장 가격이 정해져 있기는 했지만, 분명 같은 회사에 전화를 했음에도 매번 전화할 때마다 간병인의 일당 급여가 달라졌다. 그래도 사람이 있으면 다행이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요청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에누리고 뭐고 싫으면 말라는 식으로 배짱을 부리면, 울며 겨자 먹기로 다들 계약을 한다고 한다. 그나마 좋은 간병인을 만나면 다행인 거라며..
계산을 해보니 한 달에 병원비 빼고 간병비만 400만 원 정도 나왔다. (이것도 가장 저렴한 곳을 찾은 거였다.)
휴일 수당은 따로였고 환자에게 사용할 물품도 사다 드려야 했고, 식비도 따로다.
물론 24시간 간병이 어려운 일이라는 건 인정한다.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 옆에서 24시간 내 생활 없이 대소변이며, 체위변경에 식사보조, 각종 위생관리까지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 나도 간호사였으니까.
그 정도 가격은 적절한 페이일 수 있다. 물론 그 모든 걸 충실히 했을 때 말이지만.
하지만 일반적인 가정에서(동생과 같이 부담한다고는 하지만) 생활비에, 아파트 대출금 갚아나가며 한 달에 병원비만 300씩..
웬만한 직장 아니면 그냥 회사도 그만두고 간병하는 게 낫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아빠를 집에 모셔서 내가 케어를 할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욕심이라는 걸 안다. 내 욕심 하나로 집에 있는 아이와 남편까지 모두 희생시켜야 한다는 걸 알지만 결국은 금전적 문제로 내가 모셔야 할 상황이 올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져만 갔다.
이런 걱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빠한테 미안했고, 그러면서도 네 살 아이 독박육아와 거동 못하시는 아빠 케어를 같이 할 자신은 없었고 남편에게는 뭐라 양해를 구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이래서 내리사랑이라고 하는 걸까? 만약 내 자식이 아파도 그렇게 망설여졌을까? 하는 갈등이 말도 못 했지만 결국 아빠를 집에 모시진 못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나 싶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후회되는 부분 중의 하나이긴 하다.
어쨌든 그래서 돈이 필요해졌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조급해졌다. 취직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시댁, 친정이 모두 멀어서 당장 아이를 맡길 곳도 없었고, 아빠 상태가 아직은 안정된 것도 아니었기에 수시로 병원에 가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시간제 일이나, 집에서 할 수 있는 걸 찾기 시작했다. 집 근처 편의점 알바며, 포장 알바며, 타이핑 알바까지 닥치는 대로 알아보고 불러주면 가서 일을 하기도, 집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나마도 일이 있으면 다행이고,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그만두어야 했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돈은 얼마 들어오지도 않으면서 몸은 힘들고, 생각은 점점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부업을 검색하다 데이터 라벨링이라는 일에 대해 영상을 보게 되었다.
세상에 저런 일도 있었구나.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AI관련된 부업이라며 설명을 해 주는데 참 신기하긴 했다. 늘 그렇듯 유튜브 속 영상은 세상 모든 일을 다 쉽게 할 수 있는 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돈 버는 일 중에 쉬운 일은 없다. 그래서 크게 기대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뭐라도 해야 했다. 평소 같았으면 더 알아봐야겠다. 할 수 있을까? 후기를 찾아보고 동향을 살펴보며 하루하루 도전하는 날짜를 늦췄겠지만, 정말 나는 뭐라도 해야 했다. 절박함이 용기를 준건지, 아니면 무모해진 건지, 나는 그날 즉시 내일 배움 카드를 신청하고, 크라우드 웍스의 작업자 교육과정을 신청했다.
이 날이 내가 데이터 라벨링을 만나게 된 첫날이었으며, 지금 생각해 보면 바로 그날이 나의 변화를 만들낸 첫날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번 돈은 써 볼 기회도 없이,
아빠는 나를 세상 밖으로 그렇게 살짝 밀어주시고는
혼자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