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오늘의 시 한 편 (36).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마지막에 대하여
이정훈
마지막, 소리 내면
지금도 목울대에 등자 같은 게 솟아오른다
아버지만 해도 그렇지,
건빵 한봉지가 다였다니
나는 밤나무 꼭대기의 저녁 햇살이
성 엘모의 불이었다고 기억한다
폭풍 속 배의 마스트에 환했다던 그 불덩이
아버지는 건빵 한봉지를 쥐여주고
마당 속으로 가라앉은 거다
마지막이란 말은 그러고 보니,란 말 뒤
안장에 매달린 건빵 자루처럼 덜렁거린다
건빵을 하나씩 꺼내 먹으며
막막한 마당 밖으로 밀려가는 중이다
단단하고 물기라곤 하나 없는 막
막의 한끝을 혀로 녹여
수프처럼 물렁하게 만드는 게 여정의 끝
마지막은 넓고 황량해
줄 게 건빵뿐인 이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겠지
그러나 얼마나 멋지냐
산맥을 타넘어도, 들판을 가로질러도 좋고
키클롭스와 세이렌의 바다를 떠돌아도 좋고
좋은 것을 찾아 더 멀리 헤매는 사람의 운명
마지막,
말하고 나면 금방이라도
힘센 말이 나를 싣고 떠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다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단단하고 물기라곤 하나 없는 막
(막막, 막강, 막대, 막말, 막둥이, 막바지, 막창, 막걸리, 막간, 막국수, 막급... 막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908개나 된다고 검색이 되었다. 내가 아는 단어가 이렇게 빈약한가? 생각이 많이 나지 않는다. 그것도 그닥 좋은 의미들은 아닌 것 같다. 정말 시어처럼 막막하다. 그렇지만, 마지막이라는 단어처럼 슬픈 느낌의 단어가 또 있을까 싶게 목이 메인다. 이정훈 시인은 등단 당시 “언어의 구체성과 밀도를 획득”하면서 “요즘 우리 시단에서 보기 힘든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를 보여준다”는 심사평을 들었다고 한다. 마지막, 다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