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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손택수

by 민휴

오늘의 시 한 편 (35).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손택수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몇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

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

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생을 함께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이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는 거라

나무 그늘 이저리 흔들리는 데 넋을 놓겠네

병에게 정중히 병문안이라도 청하고 싶지만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찬찬히 살펴보고 싶지만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멀쩡하게 겨울이 지나갈 때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아파트 마당에 귀한 향이 날 때 고개를 돌리면 하얗게 빛나는 은목서가 있었다. 그런 은목서에는 마음을 줄 수밖에 없다. 마침, 꽃말도 '유혹'이라서 나조차 끌림을 당했다고 해야하나... 아파도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살아야 할 만큼,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향기와 나뭇잎 흔들거리며 반짝여 쉼을 주는 은목서가 이렇게도 고마운 나무라는 것 이 시를 읽어나니 더 잘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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