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는 멸종하는가?
2024년의 파리올림픽도 이제 끝났다. 언제나처럼 각국의 선수들은 기량을 마음껏 자랑하였고 세계인들은 선수들이 만들어 내는 드라마에 열광하였다.
그중에서도 나는 탁구의 신유빈 선수가 시합 중간중간에 바나나를 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신유빈 선수는 귀여운 외모와 함께 바나나를 하도 예쁘게 먹어 그 모습이 나뿐만 아니라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며칠 전에는 아들 내외가 이제 막 이유식을 시작하는 손자의 바나나 먹는 동영상을 보내왔다. 손자는 첫술에는 얼굴을 약간 찡그렸으나 곧 바나나를 좋아하게 된 듯, 어서 달라고 손을 뻗치고 발을 굴러서 동영상을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입가에 미소를 띠게 만들었다.
바나나는 암 수술 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남편에게도 매우 중요한 식품이다. 다른 음식은 잘 못 먹는 남편이지만 바나나는 비교적 쉽게 삼킨다. 그래서 남편의 외출 시 꼭 바나나 도시락을 챙겨가게 된다. 말하자면 바나나는 우리 집 주요 상비 식량의 하나가 되었다.
바나나는 운동선수나 어린이, 노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홍익 식품이다. 우선 영양적으로 조성이 우수하다. 바나나는 칼로리가 높아서(100g당 93㎉) 조금만 먹어도 쉽게 배고픔을 느끼지 않으며 오래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운동선수들이 경기도중에 바나나를 먹는 이유도 이것 때문일 것이다. 바나나에는 식이섬유(100g당 1.9g)와 탄닌 함량이 높아 변비 예방에도 좋기 때문에 다이어트하는 젊은 여성들에게도 추천되는 식품이다. 게다가 나트륨 함량이 매우 낮고 칼륨 함량이 높아 체내의 나트륨 배설에도 도움을 주므로 고혈압 환자에게도 좋다. 바나나는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을 만드는 원료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먹는 사람에게 행복감을 부여할 수도 있다. 그 무엇보다 바나나는 먹기가 간편하고 수월하다. 노랗게 잘 익은 바나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껍질을 벗겨 입에 넣기만 하면 그만이다.
남북전쟁 직후 바나나가 미국 사회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여성들이 바나나를 먹는 모습이 외설스럽게 보인다고 하여 바나나를 잘게 잘라 포일에 싸서 먹었다고 한다. 이제는 누구나 공공연히 바나나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시대가 참 좋아진 것이다.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바나나의 품종이 ‘캐번디시(Cavendish)’라는 것이다. 캐번디시는 어떤 경로를 통해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흥미로워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캐번디시 이전에 세계를 지배하던 바나나 품종은 ‘그로 미셀(Gros Michel)’이라는 품종이었다. 그로 미셀이 서방(정확하게는 미국)에 소개되기까지도 엄청난 세월과 우여곡절이 있었다.
동남아시아 및 폴리네시아 지역에서 자생하거나 재배되던 바나나가 서양 세계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초반 프랑스의 박물학자 니콜라 보댕 덕분이었다. 보댕은 동남아시아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먹어본 바나나가 너무 맛있어서 카리브해의 섬 마르티니크의 식물원에 이 바나나를 옮겨 심었다. 이것을 ‘보댕의 바나나’로 불렀다.
이 바나나를 다른 프랑스 식물학자 장 프랑수아 푸야가 자메이카로 가지고 갔다. 그로부터 40년 뒤 그 바나나는 자메이카 전역으로 퍼졌다. 이 바나나가 그로 미셀 종이었다. 그로 미셀은 캐번디시보다 더 크고 질감도 부드러운 데다 맛도 진하고 풍부했다.
이 바나나를 미국 시장에 가져간 사람이 케이프 코드의 선장 베이커였다. 그가 배의 수리를 위해 우연히 자메이카에 들렀다가 바나나를 발견하고 이를 실어 미국 시장에 내놓은 것이 1870년이었다. 6년 뒤인 1876년 필라델피아 100주년 박람회에 바나나가 출시되면서 미국인들이 바나나에 열광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바나나 산업이 큰 돈벌이가 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자 바나나를 지배하기 위한 탐욕과 착취가 중남미 사회를 병들였고, 1930년 경부터 번지기 시작한 파나마병이라는 곰팡이병으로 1960년대에 이르러 그로 미셀 바나나는 거의 멸종하고 말았다.
바나나 산업계는 그로 미셀을 대체할 수 있는 바나나 품종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고, 파나마 병에 면역이 있는 새 품종을 찾았으니 그것이 캐번디시종이었다. 바나나 시장은 캐번디시로 신속히 교체되었다.
그러면 캐번디시 바나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바나나는 중국 남부지방의 호젓한 숲에서 홀로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다윈시대에 이르러 영국을 중심으로 외부 세계의 동식물 채집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면서 이 바나나도 영국까지 이르게 되었다.
찰스 에드워드 텔페어(Charles Edward Telfair (1778-1833)는 아일랜드 출신의 의사이자 아마추어 탐험가였다. 그는 영국 해군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면서 식민함대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녔다. 텔페어도 당시 유행에 따라 수백 종의 동식물을 모았다.
영국은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던 모리셔스를 빼앗아 영국 영토로 삼았고 텔페어는 퇴역한 후 이 섬의 관리자가 되었다. 그는 모리셔스에 여러 식물원을 만들었다. 1826년, 이곳에 중국으로부터 온 바나나 한 종이 입수되었다. 후일 캐번디시로 명명될 바나나였다.
텔페어는 3년 후 표본 몇 종을 영국의 로버트 바클레이(Mr Barclay of Burryhill)에게 보냈다. 바클레이는 전 세계 식물 채집 원정대에 자금을 댈 정도로 유명한 식물애호가였다. 그가 텔페어의 식물을 받고 일 년 만에 숨지자 아들 아서가 아버지의 식물원을 데번셔(Devonshir)의 6대 공작인 윌리엄 캐번디시에게 팔았다. 캐번디시 공작은 바클레이의 식물을 자신의 온실에 옮겨 심었고 공작의 수석 정원사 조셉 팩스턴(Joseph Paxton)이 온실에서 이 바나나를 살렸다.
1836년 데번셔 공작 가에 속하던 한 식물학자가 이 바나나와 같은 중국의 오래된 바나나 그림 하나를 런던 린네협회에 공개하면서 이 바나나에 ‘무사 캐빈디시’라는 학명을 부여하였다.
데번셔의 캐번디시 가문(Cavendish family)은 16세기 이후 영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강한 명문 귀족 가문이었다.
이 가문의 시작은 하드윅의 베스(Bess of Hardwick)로 알려진 엘리자베스(Elizabeth Talbot, 1527~1608)로부터 시작이 된다. 베스는 데본셔의 채스워스 지역에 살던 한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는데 4번의 결혼을 통해 귀족 칭호와 함께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왕의 재정을 담당했던 윌리엄 캐번디시였다. 그녀는 자기 고향에 영지를 구입하고, 남편의 근거지를 데본셔로 옮기게 하였다(1549년).
그녀의 어마어마한 재산은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윌리엄 캐번디시에게 상속되면서 제1대 데본셔 백작의 시대가 펼쳐진다.
그 후 캐번디시 가문은 4대 백작 시기에 스튜어트 왕조의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 여왕의 왕위 집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데본셔 공작으로 승격이 되었고 채스워스의 건물 및 정원을 오늘날의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다.
4대 공작은 영국 수상을 지내기도 하였다.
5대 공작부인 조지아나 스펜서는 아름다운 외모와 인맥으로 영국 사교계를 주름잡았으나 복잡한 사생활로 인해 지금도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남편인 캐번디시 공작은 아내의 친구와 불륜을 저지르고 한집에 동거하는 등 수많은 염문을 뿌리며 부자 귀족의 일탈을 마음껏 누린 인물이었다.
조지아나 스펜서와 5대 캐번디시 공작 사이에 난 아들 윌리암 캐번디시가 6대 공작이 되었는데, 이 공작은 집안의 분위기 탓이었는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캐번디시 바나나와 관련이 있는 공작이 바로 6대 윌리엄 캐빈디시였다. 6대 공작은 가문의 예술 및 서적 소장품을 늘이고 건물을 증축하는 등 캐번디시 가문의 영지를 단장하는데 열정을 쏟았고 특히 식물을 사랑하여 정원 돌보기에도 열정을 쏟았다.
그는 이국적인 식물들을 키우기 위해 인도와 미국으로 팀을 파견할 만큼 열심이었고 해외에서 들여온 진귀한 식물을 구입하는데 아낌없이 돈을 써 나중에는 파산할 지경에 이른다. 그는 영국 치직하우스의 정원사이자 영국왕립원예협회 소속의 조셉 팩스턴을 수석 정원사로 임명하여 바위정원을 위시한 다양한 정원을 디자인하게 함으로써 오늘날 관람객들에게 아름다운 유산을 남겼다. 또한 팩스턴은 공작을 위해 여러 개의 온실을 지었는데, 철과 유리로 만든 거대 그린하우스는 그의 재정을 파산시킬 정도였으나 이곳에서 캐빈디시 바나나는 자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캐번디시 가의 채스워스 하우스(Chatsworth House)는 오늘날에도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역사적 건축물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캐번디시 가의 또 다른 유명인사로 화학자인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1731~1810)가 있다. 그는 데번셔 2대 공작 윌리엄 캐빈디시의 삼남 찰스 캐빈디시의 아들이었다. 그는 캐빈디시 가의 아들로서 부친의 사후 물려받은 재산으로 당대 최고의 부자였으나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과 수줍음 탓에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렸다. 그는 화학 및 물리학에 관한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지구의 질량을 계산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연구 업적을 꽁꽁 숨겨두어 그의 사후 제임스 맥스웰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1874년 세워진 캐번디시 연구소는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캐번디시 바나나는 실제로는 그로 미셀보다 크기도 작고 맛도 못하며 운반 도중 상하기도 쉬웠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시작된 파나마 병으로 그로 미셀이 거의 멸종상태에 이르자 그로 미셀의 대체 품종을 찾던 바나나 회사들이 캐빈디시를 눈여겨보기 시작하였다.
처음 그로 미셀 대신에 캐빈디시를 심은 회사는 스탠더드 사였다(오늘날의 돌 dole사). 1939년 처음 온두라스에 상업적으로 심어진 캐빈디시는 10년 후 수출이 가능할 정도로 수확되기 시작하였다. 잘 익은 캐번디시는 그로 미셀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파나마병에 대한 내성이 있었고 만족스러울 정도의 맛을 내었다.
1960년 캐번디시 품종 실험에 돌입한 UFC도 60년대 중반 품종 전환이 완료되었다. 미국에서 그로 미셀이 마지막으로 팔린 것이 1965년이었다. 이후로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거의가 캐번디시 품종이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케번디시에 다시 바나나병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타이완 농장의 바나나들이 까맣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신종 파나마병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병의 원인균은 토양에 있는 푸사륨 곰팡이의 변종임이 밝혀졌다. 과학자들은 지금 캐번디시종이 멸종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곰팡이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자꾸만 더워지는 지구 온도와 함께 우리의 식탁에도 스산한 기운이 몰려오고 있는 것 같다.
사진: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