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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Oct 05. 2024

41. 손기정의 참나무 대왕참나무인가 루브라참나무인가?

<양재천 산책>

가을이다.

나무들이 나뭇잎을 물들이며 작별인사를 할 준비를 한다.

대치우성아파트를 지나 대치유수지 쪽으로 걸어가다가 멋지게 뻗어 오른 나무 한그루를 새삼 인지하게 되었다. 붉은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나무는 대왕참나무였다. 나는 산책하던 길임도 잊어버린 채 그 자리에 서서 대왕참나무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큰 키에 줄기는 양 사방으로 고루 분지하여 퍼졌고 약간 성기에 보이는 나뭇잎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줄기에는 외눈 도깨비 같은 피목이 발달하여 마치 신화 속의 나무같이도 보인다.

이 길 입구에도 대왕참나무들이 심어져 있지만 이 한그루의 위용에 미치지 못한다. 이 참나무를 보자 요즈음 논란 중인 손기정 선수의 참나무를 보고 싶었다. 


양재천의 대왕참나무


손기정 선수의 참나무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기사를 읽은 참이어서 손기정기념공원을 다녀왔다.

손기정 선수라고 하면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에 참가하여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목에 건 한국의 자부심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라 손선수는 우리나라의 태극기 대신 일장기를 달고 대회에 출전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시상대 위의 손기정 선수는 승리자의 모습이 아니라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린 채 우울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 독일의 유명 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은 “가장 슬픈 올림픽 우승자”라는 제하의 기사로 당시 한국의 상황 등을 상세히 보도했다고 한다. 당시의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보면 마치 죄지은 사람이 벌서듯이 서있어 애처로움을 더한다.


당시 받은 이 참나무를 손선수의 모교인 양정고 교정에 심었다고 하는데, 8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나무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하길래 나무가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하였다. 참고로 이 나무는 1982년 이래 서울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공원의 정확한 이름은 ‘손기정체육공원’이다. 이곳은 1987년 양정고등학교가 목동으로 이전하고 난 후 손기정 선수를 기념하는 공원으로 조성됐다. 그러나 20여 년 넘게 동네공원으로 사용되며 공원조성의 취지가 퇴색되자 서울시는 2017년부터 ‘서울역 일대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이곳을 손기정 선수를 기념하는 기념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고 한다. 대표적인 시설인 ‘손기정기념관’에는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수상시 머리에 썼던 월계관부터 영상 다큐, 손기정 선수와 관련된 각종 기록물 등 다양한 전시물을 전시하고 있다.

    

옛 양정고교 건물에 세워진 손기정 기념관


손기정기념관 앞에는 손기정 님의 두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래서인지 이 두상도 슬픈 얼굴로 보였다.      


당시에 심은 참나무는 `월계수`라는 이름표를 달고 손기정 기념관 옆에 서 있었다.

나무의 형태를 살펴보니 나무줄기나 잎 모양이나 꿋꿋한 모습이 대왕참나무임에 틀림이 없었다. 심어진 정확한 연대를 아는 나무는 아주 귀하다. 그것도 사연이 있는 나무라면 더욱 그렇다. 손선수가 올림픽 우승으로 받은 나무가 86년간이나 살아 당당히 자라고 있으니 얼마나 감동스러운지 모른다. 대왕참나무의 잎이 붉게 단풍 들었을 때 이곳을 방문하려고 벼뤘었는데 아뿔싸 조금 늦었다.          


손기정 월계수인 대왕참나무


당시 독일 총통이었던 히틀러가 이 나무를 금메달리스트들에게 수여했기 때문에 이 나무는 `히틀러의 나무`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본래 올림픽에 우승한 선수들에게는 월계수로 만든 월계관을 씌우는 것이 관례였지만 독일에는 월계수가 없었기 때문에 참나무로 만든 월계관을 씌우고 부상으로 참나무 묘목 화분을 수여했다고 한다. 당시 130명의 올림픽 금메달 수상자 모두에게 참나무 월계관과 화분을 선물하였는데, 이들이 본국으로 귀국하여 부상으로 받은 참나무를 심어 현재 소위 ‘히틀러 참나무’라고 불리는 참나무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자라고 있다고 한다. 최근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은 세계 여러 곳에서 자라고 있는 ‘히틀러의 올림픽 참나무’에 관한 르포를 다뤘다. 그런데 이 ‘히틀러 참나무(Hitler oaks)’는 중부 유럽에서 자라는 루브라참나무(Quercus rubra)라고 한다. 그래서 루브라참나무를 흔히 ‘올림픽 참나무(Olympic oaks)’, 또는 ‘히틀러 참나무’로 부른다.


그런데 손기정 기념관에 심어진 ‘히틀러의 올림픽 참나무’는 루브라참나무가 아니고 대왕참나무여서 이 나무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특히 한국전통문화대 이선교수가 이 나무의 진위에 대한 의문을 논문으로  발표하자 더욱 의심이 커지고 있다. 이때 손기정이 받았던 참나무는 대왕참나무가 아니고 루브라참나무(red oak)였다는 의혹이다. 그 루브라참나무가 어떤 연유로 죽어버리는 바람에 대왕참나무(pin oak)를 대신해 심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왕참나무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한참 뒤라고 한다. 도대체 어찌 된 연유일까? 


나무가 말을 할 수 있으면 그날의 진실을 규명해 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무는 말이 없고, 지금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소식을 전해주는 나무는 대왕참나무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왕참나무의 씩씩하고 푸른 기상이 일제강점기의 고난을 극복하고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 선수의 기상과 맞닿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손기정기념관에 전시된 월계관은 루브라참나무가 맞고 손선수가 받은 참나무 묘목도 루브라참나무가 분명해 보인다.  

    

손기정 박물관에 보관 중인 월계관


대왕참나무와 루브라참나무는 기원이 다르다.

루브라참나무는 중부유럽지역에서 주로 자라고 대왕참나무는 북미에서 주로 자란다고 한다.

왜 우리나라의 올림픽 참나무만 대왕참나무인지 그 이면에 어떤 사연이 숨어있는지 알 수 없다. 이선교수의 주장처럼 손기정 선수가 받아온 참나무 묘목이 죽어버려 대왕참나무로 대체했는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손선수가 이 나무 묘목을 받아 우리나라로 가져올 때까지 시간도 많이 걸렸고, 사실 묘목 하나를 살려 어른 나무로 만드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서울역 뒤에서 중림동의 손기정기념공원으로 올라가는 도로 옆에는 대왕참나무들을 가로수로 많이 심어놓았다. 스토리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대왕참나무 가로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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