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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Je me souviens: 퀘벡의 명세

이 명세는 진행형일까요?

by 보현


퀘벡을 여행하면서 가장 자주 볼 수 있었던 글귀가 바로 ‘Je me souviens’이었다. 영어로는 ‘I remember’ , 우리말로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뜻이라고 한다. 이 글귀를 자주 보았던 것은 퀘벡의 자동차 번호판마다 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이 글귀가 다시 떠오른 것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때문이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내걸며 세계의 지도를 재편하려는 욕심을 내고 있다. 미국에서 부동산업자로 떼돈을 번 트럼프는 이제 세계를 향한 부동산 매입에 나서려고 한다. 그는 그린란드를 구입하려고 하고 있고 가자지구의 팔레스테인인들을 주변국으로 소개하여 그곳을 지중해의 휴양도시로 개발할 구상을 내비치는가 하면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로 들어오라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그의 이런 발언으로 캐나다인들의 미국에 대한 반감이 거세어졌다는 뉴스를 접하며 캐나다인들이 퀘벡의 모토인 ‘Je me souviens’을 전국적으로 외치게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퀘벡 인들이 이 문장을 사랑하여 퀘벡의 모토로 정하고 자동차 번호판에 까지 세기며 기억하려고 하는 그 역사적 사연은 무엇일까?


"Je me souviens"라는 글귀는 1868년 외젠 에티엔 타셰(Eugène-Étienne Taché)라는 건축가가 의회 건축물을 지을 때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퀘벡 문장 아래 이 문구를 세기고 의회 정문 위에도 이 문구를 돌에 새기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세 단어의 이 글귀가 퀘벡 인들의 마음을 대변한 듯, 이 문장은 퀘벡정부에 의해 19세기말부터 공식적인 모토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978년부터는 퀘벡의 자동차 번호판에도 사용되게 되었다고 한다.


캐나다 퀘벡의 주의회 건물 퀘벡의 문장


타셰는 세 단어만을 세기고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캐나다인들은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역사학자 토마스 샤파이스는 “네, 기억합니다. 우리는 과거와 그 교훈, 과거와 그 불행, 과거와 그 영광을 기억합니다”(1895년)라고 했고, 어네스트 가농은 “연방에서 샹플렝과 메조뇌브의 캐나다가 별도의 지방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1896년)라고 썼다. 여기서 샹플렝(Champlain)은 : 퀘벡을 건설한 자이고 메조뇌브(Maisonneuve)는 몬트리올을 건설한 자이다.

샤파이스가 두루뭉술하게 표현하였다면 가농은 이 문장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캐나다인들이 퀘벡의 모토에 대한 의미를 고심하는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이는 캐나다를 발견하고 프랑스 식민지(누벨프랑스)를 개척한 사람들이 프랑스인들(샹플렝이나 메조뇌브 같은)이었으나,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 지면서 이 누벨프랑스가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 원인이 된 것이다. 퀘벡의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이 전쟁에 져 영연방에 속하게 된 역사적 치욕을 잊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얼마나 수모가 컸으면 의회 건축물과 심지어 자동차 번호판에도 세기고 다니겠는가.


퀘벡의 자동차 번호판


프랑스와 영국은 오랜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다.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불과 34km의 거리에 유럽의 두 강대국이 마주 보며 서유럽의 패권을 다투었으니 양국민 사이가 좋을 리가 없다. 양국은 100년 전쟁(1337~1453년), 나폴레옹전쟁(1803~15년), 7년 전쟁(1756~63년) 등에서 서로 싸웠다. 특히 북미지역에서의 식민지 쟁탈전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패배하면서 북미지역에 구축된 누벨프랑스(프랑스 식민지)를 잃게 되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는 미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대립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양국의 국민감정은 여전히 날이 서 있다. 이것의 표출이 퀘벡의 ‘Je me souviens’이라고 생각된다.


누벨프랑스의 건설

누벨프랑스(Nouvelle-France)는 북아메리카에 있던 프랑스 식민지였다.

이 식민지의 시작은 1534년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가 세인트로렌스강을 탐험하면서 시작되었다. 자크 카르티에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원주민인 이로쿼이족이 살고 있었다. 카르티에의 선원들이 괴혈병으로 쓰러져갈 때 원주민인 인디언 주술사가 침엽수 즙을 내어 이들을 치료하였다는 이야기는 영양학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실리는 풍경이다. 카르티에는 1535년 두 번째 아메리카 탐험에서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몬트리올에 도착하였다. 그는 1541년에도 캐나다 여러 지역을 탐험하였다.

이러한 카르티에의 보고에 따라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는 사뮈엘 드 샹플랭을 파견하여 프랑스인 첫 정착지인 퀘벡을 건설하게 하였다(1604년). 샹플랭은 몬트리올섬에 모피 무역소도 설치하였다(1611년). 1642년에는 몬트리올에 빌 마리 (Ville-Marie)라는 정착지가 세워졌고 메종뇌브가 첫 총독으로 추대받았다. 빌 마리의 주요 성장원도 모피교역이었다.

모피는 카르티에의 항해에서부터 주요 교역품이었다. 특히 비버털이 유럽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므로 모피교역은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를 위해 많은 유럽인들이 누벨프랑스로 이주하였다. 1712년의 전성기 때의 누벨프랑스의 영토는 뉴펀드랜드에서 로키산맥까지, 그리고 허드슨만에서 멕시코만에 이르렀다. 이들은 주로 5 대호와 미시시피강을 따라 인디언들과 모피거래를 하였다. 프랑스인들과 인디언들 사이는 서로 교역을 하는 호의적인 관계였다.


전성기의 누벨프랑스 지역(푸른 색 지역): 사진 출처 Wikipedia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누벨프랑스의 상실

그런데 오하이오강 유역은 모피 무역과 농경에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북동부에서 오하이오강 유역으로 진출하려는 영국인들과 서부 일대에서 인디언과 모피 거래를 하고 있던 프랑스인들 간에 경제적 이익을 두고 자주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된 갈등이 유럽의 7년 전쟁과 함께 북미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식민지쟁탈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프랑스가 알곤킨족, 휴런족 등의 원주민 부족들을 세력권으로 끌어들여 전쟁을 벌이자 영국도 이로쿼이 연맹과 협력하며 전쟁에 나섰다. 처음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원주민들이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여 영국군과 영국 개척민들을 공격하면서 전세는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듯 보였다. 그러나 영국의 새 총리 윌리엄 피트(William Pitt)가 전쟁을 적극 지원하며 나서자 압도적인 우위를 가진 영국 해군에 밀려 프랑스는 점차 고전하게 되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승패는 퀘벡의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갈리게 되었다.

1759년 9월 13일 퀘벡 요새 밖에 있던 아브라함 평원(평원이라고 하지만 언덕 위에 있다)에서 영국 육해군과 프랑스 육군의 사이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 중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영국은 누벨프랑스의 수도 퀘벡시를 점령하면 프랑스를 북아메리카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집요한 공격을 퍼부었다. 영국군은 3개월에 걸쳐 세 방면에서 퀘벡을 포위, 공격했으나 언덕 위의 요새 도시 퀘벡을 점령할 수 없었다.

프랑스 정규군 부대와 캐나다 민병대는 영국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세인트로렌스강에서 몽포랑시 폭포까지의 9km의 길이에 걸쳐 있는 요새와 포대에 배치되었다. 이 몽프랑시 전투에서 영국군은 450명의 사상자를 내며 퇴각하였다. 프랑스는 이에 자국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자 영국군의 지휘자 제임스 울프(James Wolfe) 장군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울프 장군은 약 4,400명의 병력을 도시 서쪽에 위치한 랑세-오-포울롱으로 상륙시키기로 했는데, 이곳은 아브라함 고원으로 이어지는 53m의 높은 절벽 아래에 있었고, 프랑스 대포로 보호를 받고 있는 곳이었다. 영국군은 은밀하게 절벽을 타고 올라가 해가 뜰 무렵에는 아브라함 평원에 탄탄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평원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이 절벽을 타고 올라가 아브라함 평원을 점령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허를 찔린 프랑스 측의 몽칼름(Louise-Joseph de Montcalm) 장군은 즉시 퀘벡 인근에서 징집한 병력 4,500명을 이끌고 총진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미 방어진을 구축하고 대기 중이던 영국군이 정밀한 일제사격(volley fire)을 퍼부었으므로 이 전투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고 끝이 났다.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영국의 울프 장군은 전투가 벌어진 지 불과 몇 분 뒤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고 프랑스의 몽칼름 장군 또한 하복부에 총알을 맞아 다음날 아침 사망했지만, 아브라함 전투가 벌어진 5일 후인 9월 18일, 퀘벡시는 영국에 항복하였다. 1760년에는 몬트리올 마저 영국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는 영국, 스페인과 파리조약(1763년)을 체결하면서 전쟁의 종결을 고했다. 프랑스는 퀘벡 등 캐나다의 영토와 미시시피강 이동의 루이지애나를 영국에 할양하고 미시시피 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 할양했다. 스페인은 그 대가로 플로리다를 영국에 양도하였다.

이로서 프랑스의 누벨프랑스는 완전 해체되었다. 프랑스는 인도의 식민지도 완전 포기해야 했다. 프랑스로서는 뼈아픈 패배였고 영국은 기적적인 승리를 차지하게 된 셈이었다. 또한 퀘벡과 몬트리올에 남은 프랑스계 후예들에게는 잊지 못할 치욕이 되었다.


아브라함 평원은 구도심의 샤토 프롱트낙 호텔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상으로도 바로 구도심과 연결되어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전쟁 후 평원은 평범한 들판으로 남았다가 1908년, 퀘벡시가 기념 공원으로 만들고 캐나다 최초의 국립 사적지로 선포하였다. 공원은 약 12만 평으로서 서쪽으로 세인트로렌스강 위의 고원을 따라 퀘벡 시타델과 퀘벡 성벽까지 뻗어 있는데, 현재는 퀘벡의 센트랄파크가 되어 퀘벡인들이 휴식과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아브라함 평원의 위치와 1784년 아브라함 평원의 모습


우리가 샤토 프롱트낙 호텔 앞까지 관광을 나섰기 때문에 그곳에서 아브라함 평원이 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일 내가 개인적으로 퀘벡을 방문하였다면 일순위로 가보고 싶은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 아브라함 평원이었다. 언젠가(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또 다시 퀘벡을 갈 기회가 있으면 아브라함 평원과 시타델(프랑스와 영국이 만든 요새)을 보고 싶다.


몬트리올의 카르티에 광장 입구에는 나폴레옹 전쟁을 물리친 영국의 해군 제독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의 기념탑이 높이 서 있었다. 넬슨의 기념비는 영국인들이 프랑스인들에게 “이날을 잊지 마라”라고 선언하는 것 같아 보였다. 이에 대해 몬트리올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프랑스인들은 영국인을 싫어하여 이 기념탑에 분풀이를 해대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현재 넬슨의 기념탑은 높이가 상당하였고 그 아래에는 철책으로 둘러싸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처음에는 굳이 몬트리올에 넬슨의 기념탑을 세운 영국의 저의가 가혹하다고 생각했으나 두 나라의 경쟁관계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했다.


몬트리올 카르티에 광장에 세워진 넬슨 제독 기념탑


퀘벡을 세운 사뮈엘 드 샹플랭의 조각상(퀘벡 어퍼타운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각 나라마다 아픔이 있다. 누벨프랑스를 빼앗긴 프랑스인들의 후예들은 영연방의 일원이 되어있지만 치욕의 그 역사를 잊지 말자며 차 번호판에 까지 "Je me souviens"을 새기고 다닌다.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시키려는 트럼프의 야심이 절대 먹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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