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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캐나다 메이플 로드(Maple Road)를 가다

단풍이 아쉬웠어요.

by 보현


나이아가라 폭포 구경에 나선 김에 캐나다 퀘벡까지 가게 되었다.

마침 10월 초여서 캐나다의 단풍이 절정을 이룰 때라고 하였다. 특히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퀘벡까지 이어지는 800㎞의 길을 ‘메이플 로드'(Maple Road)’라고 부를 정도로 화려한 단풍이 혼을 빼놓는다고 하였다. 나는 진작부터 캐나다의 불타는 가을 단풍 속에 빠져보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남편의 건강이었다. 뉴욕에서 나이아가라 폭포까지도 자동차로 8시간을 달려왔는데, 나이아가라에서 토론토를 거쳐 천섬, 몬트리올을 지나 퀘벡까지가 또 800km라니 그 여정이 결코 만만치 않아 보였다. 딸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아내의 버킷리스트를 이뤄주고 싶었던지 “죽으면 죽으리다”라며 나의 캐나다행 여행길에 동반하였다.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말을 즐겨 쓰게 된 경위는 중국의 어떤 효자 이야기 때문이다. 그 효자는 창밖으로만 바깥세상을 보고 있는 노모를 위해 리어카에 노모를 싣고 중국 천하의 주유에 나섰다. 노모는 아들의 걱정에 대해 “길 위에서 죽어도 좋다”라고 하며 기꺼이 그 여행길에 따라나섰다고 하였다. 이후 아픈 남편과 걱정스러운 여행길에 나설 때면 우리도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말을 잘 쓰게 되었다.


단체여행에 나서면서

캐나다의 불타는 단풍을 보고 싶다는 열망은 나만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날 아침 캐나다 측 나이아가라에서 토론토로 가는 우리 여행사의 한국 여행객 버스가 무려 일곱 대가 출발한다고 하였다. 서울의 여러 관광회사에서 모객 한 단체 관광객들도 모두 현지 프로그램에 합류시키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캐나다를 먹여 살리는 것이 한국인 관광객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여의도나 진해에서 벚꽃놀이를 즐기던 한국인들이 이제는 캐나다의 단풍을 보러 나선다. 어디 캐나다의 단풍뿐이겠는가! 구경거리가 된다고 소문난 곳이라면 세계 어디든지 한국인들로 붐빈다. 지금 한국인들은 놀라운 호기심과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경쟁심에 불타고 있다.


새벽 다섯 시에 버스에 오르자 우리 가이드는 모든 여행객들에게 번호를 부여하였고 여행 시의 주의 사항을 마치 군인처럼 엄격하게 읊었다. 일곱 대의 버스가 같은 곳을 향해 가고 비슷한 곳에서 식사를 하고 비슷한 수준의 숙소에서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스케줄이 엄격하게 짜여있었고 시간의 준수가 그만치 중요한 것 같았다.


광대한 지역을 짧은 시간에 휙 둘러보는 이런 일정은 한국여행사만의 특징이다. 한국 여행객들만이 이런 일정에 기꺼이 따른다. 고객들이 원하기 때문에 아직도 이런 여행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리라. 저렴하고 안전하다는 면에서 단체여행의 장점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힘든 여정이었다.


나는 그래도 견딜만했지만 뱃줄식사로 버텨야 하는 남편에게는 무척 고생스러운 여행이었다. 특히 식사시간으로 주어진 짧은 시간은 남편이 뱃줄식사를 마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남편은 한 끼 500칼로리의 한 봉지의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버스에서 남은 튜브식이를 매달자 가이드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행여나 장애인이 있어 이 일사불란의 여행에 지장을 줄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남편의 사정을 설명하며 여행일정에 지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가이드를 안심시켰다.

가이드가 앞자리 좌석을 비워 우리 부부에게 제공하였다. 맨 앞자리에는 LA에서 온 노부부가 앉았으므로 앞 두 좌석이 고정석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같이 간 사람들에게 누가 되기 싫어 앞자리를 사양하였으나 가이드가 엄격한 얼굴로 좌석을 지정하였다. 앞 좌석에 앉으니 식사시간을 약간 더 벌 수 있어 좋았으나 뉴욕에서부터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함께 여행하며 친해졌던 김박사 내외와 정사장 내외, 애리조나에서 공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는 명랑한 영미 씨와 헤어져 앉게 되어 심심한 여행길이 되었다. 그 대신 식당에서나 차에서 내려 관광에 나설 때는 자연히 우리끼리 만나 회포를 풀었다. 우리끼리의 친교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뉴욕에서 온 사람들은 꼴 보기 싫어”라고 누가 그랬단다.

한 번은 식사를 하고 왔더니 가이드가 지정석으로 배정해 둔 우리 자리에 누군가가 가방과 모자를 던져두었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으려니 손자를 데리고 여행길에 나섰다는 한 남자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가방을 채어갔다. 45인석의 버스는 만석이었고 그래서인지 차 안에 묘한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좁은 공간 안에 쥐를 넣어두면 서로 잡아먹는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퀘벡의 시가를 구경할 때 LA에서 온 두 노인은 언제나 뒤처져 허둥거렸다. 여든이 넘은 노인들의 어눌함은 단체여행에 맞지 않아 보였다. 아무도, 심지어 가이드조차도 뒤쳐진 두 노인의 행방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아서 내 마음이 초조하였다. 나는 앞서가는 팀과 두 노인 사이를 이으려고 은근 애를 썼다.

신문에서 읽은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한국인의 특징은 신경질이다’라고. 전에 어느 글에서 나는 ‘한국인의 특징은 히스테릭하다’라고 썼는데 그 말이 그 말인 게 아닌가 싶어 쓴웃음이 나왔다. 한국인의 특징은 ‘여유가 없다’라는 말을 하나 더 덧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멀리 캐나다까지 왔으면 좀 더 여유롭고 너그러워졌으면 어떨까 하고 아쉬워해 보았다.


온난화 때문인지 예년 같았으면 단풍이 절정을 이룬다는 10월 초순인데도 캐나다 단풍은 아직 제대로 물들지 않았다. 가이드가 “캐나다 단풍이 점차 예년 같지 않아 진다”라고 말하였다. 그럴지도 모른다. 지구가 이렇게 몸살을 앓는데 어떻게 캐나다 단풍인들 늘 같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이제나 저제나 메이플 나무의 붉은 단풍을 기대하였건만 천섬을 지나도 몬트리올을 지나도 심지어 퀘벡에 도착할 때까지도 불타는 단풍나무 숲은 볼 수 없었다.


첫날: 토론토-천섬-몬트리올

토론토

첫날의 여행 스케줄은 토론토를 거쳐 천섬을 찍고 몬트리올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토론토는 미국에 가까운 도시로서 영국계 캐나다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고 지금은 캐나다 최대도시로서 금융과 비즈니스의 허브라고 한다. 즐비한 고층건물들이 토론토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갈 길이 멀었으므로 우리는 시청 앞 광장 앞에 있는 토론토라는 커다란 글자가 적힌 분수대 앞에서 사진 하나를 찍고 토론토의 랜드마크인 CN타워를 쳐다보고는 도시를 휙 지나 바로 천섬으로 갔다.


토론토 신시청 앞 분수대

천 섬

천 섬(Thousand Islands)은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천여 개의 섬들이 아기자기한 풍광을 자랑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는 1,864개의 섬들이 흩어져 있다고 한다. 원주민들이 이곳을 ‘신의 정원(Garden of Great Spilits)’으로 불렀다고 하니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짐작이 된다. 이곳에 처음 정착한 캐나다인들은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원주민들과 모피교역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비버털이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천 섬에는 비버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로크포르(Rockfort)에서 크루즈를 타고 천섬 관광에 나섰다. 캐나다와 미국의 부자들이 이곳의 섬들을 사서 아름다운 별장을 짓고 여가를 즐긴다니 서울의 한 칸 아파트에 목을 매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저 별천지를 보는듯한 광경이었다.


로크포르 선착장 앞에서


배를 타고 고요한 강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가면서 듣는 조지 볼트(George Boldt)와 그 아내 이야기는 아름답고도 슬펐다. 시중에는 조지 볼트와 뉴욕의 대부호 월도프 애스터의 만남을 미화하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지만 진실은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조지 볼트는 뉴욕에서 주방 종업원으로 시작했고 25세에 필라델피아의 한 클럽에서 식당 운영자로 고용되었다. 호텔 운영에 관심을 가졌던 볼트는 필라델피아에서 작은 호텔을 운영하였는데, 20년 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큰 호텔을 인수해 키울 정도로 경영능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능력이 소문이 나서인지 뉴욕의 대부호인 윌리엄 월도프 애스터(William Waldorf Astor)가 뉴욕에 월도프 호텔을 짓고 그 경영을 볼트에게 의뢰하였다. 한편 월리엄 월도프 애스터의 친척인 존 제이콥 애스터 4세(John Jacob Astor IV)가 월도프 호텔 인근에 애스토리아(Astoria Hotel) 호텔을 지었다. 볼트는 적대적인 백만장자 사촌들 사이를 중재하여 두 건물을 합쳐 월도프 애스토리아 호텔(Waldorf-Astoria Hotel)로 만들고 이를 뉴욕 최고의 호텔로 키웠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일에 매달려있던 볼트는 어느 날 아내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내를 위해 천 섬 위의 한 섬을 구입해 동화나라 같은 멋진 성을 짓기 시작하였다(1900년). 그러나 볼트의 아내는 이 성의 완공을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1904년). 아내를 잃은 후 슬픔에 빠진 볼트는 성의 건설을 중단한 채 다시는 이 섬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Thousand Island Bridge Authority에서 볼트를 설득하여 이 성을 구입하였고 1977년부터 공사를 재개해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오늘날은 세계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볼트부부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람들이 모두 뱃전에 나가 천 섬의 여기저기를 카메라에 담으며 즐거워할 때 유독 영미 씨와 같이 애리조나에서 온 노부인만 자리를 뜨지 않고 배 안에서 고요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부인이 얼마 전 남편과 사별하였다는 영미 씨 말을 들었던지라 함께 뱃전에 나가보자고 일부러 말을 붙여 보았다. 그 부인은 “보면 뭐해요?”라고 하며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본인도 당뇨병을 심하게 앓고 있고 아들마저 당뇨병으로 먼저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를 들었던지라 마음이 짠하였다.


세인트로렌스강 위에서 그 옛날 이곳에 도착한 유럽 이민자들이 원주민들이 잡은 비버 털을 사들이던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마치 내가 17,18세기의 역사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다만 날씨가 흐려 푸른 강물을 볼 수 없었고 기대했던 붉은 단풍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조지 볼트가 아내를 위해 지은 볼트성: 천 섬의 별장 중 가장 아름답다.


세인트로렌스강 바깥에서 바라보는 천섬 풍경


몬트리올

이윽고 몬트리올에 도착하였다.

몬트리올은 1535년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가 방문하면서 프랑스에 알려지게 되었다. 자크 카르티에는 세인트로렌스강 안쪽의 스타다코나(Stadacona: 오늘날의 퀘벡)에 도착한 후 현지에 살던 인디언들에게 그곳의 지명을 물었는데, 원주민들은 그들의 언어로 "마을(카나타; Kanata)"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이것이 나중 캐나다(Canada)라는 국명이 되었다고 한다. 스타다코나를 떠나 세인트로렌스강 안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던 카르티에 일행은, 어떤 섬 위의 마을 오슐라가(Hochelaga)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곳을 탐방한 뒤 근처의 산을 몽 루얄(Mont Royal 왕의 산)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것이 뒷날 몬트리올이 되었다. 그러니까 몬트리올은 섬 도시인 셈이다.


카르티에에 의해 오슐라가와 세인트로렌스강이 프랑스에 알려지자 1604년, 프랑스왕 앙리 4세는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을 파견하여 캐나다의 프랑스 정착지를 건설하게 하였다. 샹플랭은 1608년 퀘벡을 건설하였고, 1611년에는 몬트리올을 방문해 모피 교역소를 세웠다. 그 후 그는 퀘벡의 총독으로 지내며 누벨프랑스(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 후 제롬 르 루아예르 드 라 도베시에르(Jérôme le Royer de la Dauversière)라는 사람이 이곳의 원주민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하고자 1639년, 몬트리올 노트르담회(Notre Dame Society of Montreal)를 설립하고, 몬트리올 섬 남쪽에 정착지 빌 마리(Ville-Marie : 마리아의 도시)를 세우고(1642년), 고위 군인이었던 폴 쇼메데 드 메조뇌브(Paul Chomedey de Maisonneuve)를 빌 마리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마리아의 도시인 이곳에 1829년, 노트르담 대성당(Basilique Notre-Dam)이 완공되었다. 이 성당은 완공 후 50년 동안 북미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고, 내부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보다 더 화려하다고 하였다. 몬트리올 관광 일 순위인 이 성당을 웬일인지 우리 여행팀에서는 들르지 않아 아쉬웠다.


우리는 몬트리올의 구도심의 중심지인 자크 카르티에 광장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자크 카르티에 광장에는 자크 카르티에라고 쓴 커다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자크 카르티네 광장


광장 한쪽에는 몬트리올의 옛날 마을 빌 마리(Ville Marie)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범선과 막 건설되기 시작하는 도시 모습이 당시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어 흥미로웠다.


자크 카르티에 광장 끝머리에 빌 마리(Ville Marie)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다.


그리고 그 앞의 작은 정원에는 붉게 단풍 든 나무들이 있었고 강 건너편의 올드 포트에도 붉은 단풍이 보여 캐나다 단풍에 대한 갈증을 약간 풀어주었다.


쟈크 카르티에 광장에 있는 소공원



몬트리올의 올드 포트(old port)


이곳의 식당에서 우리 여행팀은 바닷가재 요리를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 관광객들로 숨 쉴 틈도 없는 식당이었지만 그동안 허술한 중국뷔페에서 점심을 때우던 아쉬움을 이곳에서 바닷가재 요리를 실컷 먹으므로서 해소하였다(물론 선택사항이었다).


둘째 날: 퀘벡에서

다음날은 퀘벡으로 갔다.

퀘벡에 가기 전에 먼저 캐년 세인 안과 몽포랑시 폭포를 구경함으로써 캐나다의 자연을 조금 맛보았다.

이곳에도 이제 막 단풍이 내려앉고 있어 단풍의 붉은 농염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던 나에게는 많이 아쉬웠지만 캐나다의 때 묻지 않은 깨끗한 자연을 느낄 수 있어 그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캐나다 단풍이 문제가 아니라 여행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캐년 세인 안의 정경


나이아가라보다 1.5배가 더 높다고 하는 몽포랑시 폭포가 퀘벡 도심에서 단 몇 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놀라웠다. 이곳은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맞붙어 싸운 배틀 필더(battle field)로 유명한 곳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드라마 <도깨비>에 소개된 장소라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곳인 듯했다. 드라마 속의 도깨비인 김신이 자신의 운명을 되새기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라고 하였다.

산의 정상에는 고운 단풍이 내려오고 있었고 정상 근처의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니 저 멀리 세인트로렌즈강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몽포랑시의 고요한 숲에서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캐나다의 가을 풍경을 호흡하였다.


몽포랑시 폭포의 전경


몽포랑시의 가을


퀘벡에서

퀘벡은 북미의 파리라고 불리는 곳이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도시이기도 하다. 인구의 90%가 프랑스인이고 언어도 불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퀘벡 성벽 바깥쪽에 위치한 주의회건물을 먼저 둘러보고 세인트로렌스강이 내려다보이는 어퍼 타운으로 갔다.

어퍼 타운의 언덕 위에는 아름다운 샤토 프롱트낙 호텔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고 그 앞에는 퀘벡을 개척한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의 조각상이 서 있었다. 샤토 프롱트낙 호텔과 샹플랭의 조작상은 퀘벡시의 상징적인 랜드마크의 하나라고 하였다.


샤토 프롱트낙과 그 앞에 서 있는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의 조각상


그 후 퀘벡의 노트르담 성당을 둘러보았다.

캐나다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영향으로 유명 성당들이 즐비하다고 하였다. 특히 성모 마리아와 관련하여 중요한 순례지와 성당이 유명하다고 하였다. 그중에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녀 안네를 기리는 성 안느 보프레 대성당(수많은 치유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성 요셉 대성당(성 안드레 브쌍드르의 기적이 일어난 곳), 몬트리올의 노트르담 대성당(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노트르담 뒤 캅 대성당(성모마리아상이 돌아보았다는 곳) 등이 유명하다고 하였다.


퀘벡의 노트르담 성당은 그런 전설을 가지고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성전이 열려있어 잠시 들어가서 기도를 할 수 있어 좋았다. 성전 안은 금으로 된 장식으로 뒤덮여 있어 화려하고 멋져 보였다. 예수님은 가진 것을 다 팔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셨지만 세계 곳곳의 유명 성당들은 금을 너무 사랑하는 것 같다. 이것이 하느님에게 드리는 인간의 최대의 공경의 표현인가 싶다가도 기분이 씁쓸해짐은 어쩔 수 없었다. 성당의 위용에 경외의 마음이 저절로 들기는 하였다.


퀘벡의 노트르담 성당 내부 모습


세인트로렌스강을 끼고 있는 로어 타운에는 퀘벡에서 가장 예쁜 거리인 쁘티 샹플랭이 있다.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이 이곳에서 최초로 퀘벡 도시를 건설한 것을 기념하는 지명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는 퀘벡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대형 프레스코 벽화가 5층 건물 높이로 그려져 있는데 마치 실제처럼 보일만큼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12명의 아티스트가 2,550시간 동안 작업하여 완성하였다고 하는데, 그림 속에는 퀘벡의 역사에 중요한 16명의 인물이 거리의 풍경 속에 녹아있어 과거와 현재가 그림 속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퀘벡의 모습을 그린 프레스코 벽화: 퀘벡의 역사에 중요한 16명의 인물이 녹아있다.


쁘띠 샹플랭 거리는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상업 거리 중 하나로, 샹플랭에 의해 퀘벡이 최초로 건설된 장소로 유명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인기 드라마였던 <도깨비 > 촬영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가이드는 샹플랭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고 우리에게 <도깨비>가 어느 곳에서 어떤 신을 찍었는지를 설명하는데 시간을 다 바쳤다.

이곳에 위치한 일명 목 부러지는 계단(Escalier Casse Cou)도 <도깨비>의 주인공들이 함께 걸은 곳이라고 하여 한국 여행객들에게는 인기 있는 장소라고 하였다. 급한 계단을 굴러 목이라도 부러질까 봐 남편과 손을 꼭 잡고 조심조심 내려갔다. LA에서 오신 노부부도 손을 꼭 잡고 우리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서로의 손이 필요하다.


인파로 가득한 쁘띠 샹플랭 거리


쁘띠 샹플랭 거리의 아름다운 가게들


남편과 나는 도깨비의 두 주인공들이 함께 기도하였다는 노트르담 데 빅투아르 교회에 들러 잠시 기도하였다. 이 성당은 1688년에 지어졌으며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교회 중 하나라고 하였는데 그 조촐한 모습이 우리나라의 어느 성당을 연상시켰다. 나는 남편에게 건강을 허락하여 여행에 나설 수 있도록 해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이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캐나다로 여행을 떠나오기 전 사위가 돼지 통장을 열어 캐나다 동전을 찾아 우리에게 주었다. 이 동전들이 성당에서 촛불을 봉헌할 때 요긴하게 쓰였다.


노트르담 데 빅투아르 교회


점심시간은 자유시간으로 주어졌다. 이번에도 뉴욕친구들과 함께 식사하기로 하였다. 내일이면 모두들 뿔뿔이 헤어진다. 모두들 각자의 길로 가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한참을 기다려 이름난 어느 이태리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였다. 그러느라고 퀘백시가지를 좀 더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을 놓쳤다. 그래도 우리는 오랜만에 좋은 식당에서 와인을 곁들여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담소의 시간이 너무 귀해서 쉬이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셋째 날: 미국 오조블 캐즘-레이크 조지-우드베리 아웃렛-뉴욕

마지막 날은 뉴욕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오는 도중 동부의 그랜드캐년이라고 불리는 미국 뉴욕주의 오조블 캐즘(Ausable Chasm)에 들렀다. 캐즘(chasm)이라는 말뜻은 땅이나 바위, 얼음 속 등에 난 아주 깊은 틈을 말한다. 오조블 캐즘도 계곡 속에 깊은 협곡이 만들어져 있어 붙여진 이름인 것 같았다. 무려 2억만 년 전에 형성된 협곡이라고 하였다.

이른 아침이어서 인지 공기는 청량하였고 바닥에는 솔잎 같은 나뭇잎들이 깔려 폭신폭신하였다. 계곡은 스케일이 그다지 커지는 않았지만 그랜드 캐년보다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계곡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갈 수가 있어서 층층이 쌓인 암벽을 만져보며 걷는 짜릿함도 느껴볼 수 있었고 계곡에서 래프팅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생생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미국 동부의 뉴욕주에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 바로 오조블 캐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조블 캐즘의 협곡


레이크 조지는 뉴욕으로 향하는 도중 잠시 쉬어가는 길목이었던 것 같았는데, 뉴욕시의 가까운 곳에 있는 거대한 호수여서 인지 미국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곳이라고 하였다. 시간에 쫓겨 데크까지 번개같이 갔다가 버스로 돌아와야 했다.


레이크 조지


밤이 되어서야 뉴욕 시내에 들어왔다. 맨해튼에 들어오기 전, 뉴저지에서 뉴욕 쪽 야경을 바라보았다. 뉴욕은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것 같았다. 끝없이 펼쳐지는 고층빌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지상 최고의 화려한 도시 뉴욕을 자랑스럽게 과시하는 듯 빛나고 있었다.


뉴저지에서 바라본 뉴욕의 야경


맨해튼의 코리아타운 앞에 투어 버스가 멈춰 섰다. 우리는 사흘의 강행군을 함께 한 정사장 내외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김박사 내외는 워싱턴 디씨로 가야 할 여정이어서 우드베리 아웃렛에서 먼저 떠났다.

투어 버스가 멈춰 선 곳에 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힘든 여정이었고 캐나다 단풍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되돌아보니 즐거운 추억이 많았다. 그래서 여행을 계속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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