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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롱우드 가든에서

푸아브르의 흔적을 찾아서

by 보현


마침내 롱우드 가든에 가게 되었다.

‘마침내’라고 쓴 이유는 이 롱우드 가든이 나의 여행 버킷 리스트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허쉬타운의 방문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던 헬렌도 롱우드 가든에 대해서는 그 아름다움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롱우드 가든이 헤리스버그에서 헬렌의 집이 있는 워싱턴 DC로 가는 도중에 있었으므로 우리는 짐을 챙겨 롱우드 가든으로 향했다. 사전에서 롱우드가든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케네트 스퀘어의 브랜디와인 크릭 밸리(Brandywine Creek Valley)에 있는 1,100 에이커 이상의 정원, 숲, 초원으로 구성된 공공 정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정확히는 1,077 에이커라고 하는데 이를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약 132만 평에 해당하니 단일 식물원의 규모로서는 엄청나다. 과연 넓은 땅 미국임을 실감 나게 하는 크기이다.


내가 롱우드가든에 꼭 가보고 싶은 이유는 그곳이 미국 최고의 정원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의 정원사 피에르 푸아브르의 정신을 이어받았는지 알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피에르 푸아브르에서 롱우드 가든까지의 연관성을 찾기는 좀 멀긴 하지만 그래도 나의 이야기의 시작은 프랑스인 피에르 푸아브르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피에르 푸아브르와 왕귤나무 식물원

피에르 푸아브르는 원예학자이자 식물학자로 소개되는 인물이다. 그의 인생 여정에서 식물과의 인연이 가장 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푸아브르는 1719년 프랑스 리옹에서 잡화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교사의 꿈을 품고 프랑스외방전교회에 들어간 그는 20대 초반인 1739년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그는 광동과 마카오, 코친차이나까지 폭넓게 여행하였다. 이때 그는 이국에서 생산되는 작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관심이 미션보다 딴 것에 있다고 생각한 수도원장은 그를 수도회에서 제명시키고 조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프랑스동인도회사의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푸아브르가 탄 배가 영국 사략선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사략선이란 국가의 허가를 받은 해적선을 말한다. 당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중이었으므로 프랑스와 영국은 교전국이었다. 사략선은 적대국 배를 공격해 상대의 물품을 빼앗을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탄환이 푸아브르의 오른쪽 손을 통과하면서 그는 오른팔을 잃은 장애인이 되었다.

영국 사략선 선원들은 압수한 배를 바타비아(오늘날의 자카르타)에서 팔고 여객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한쪽 팔을 잃고 버려진 푸아브르는 누가 보아도 불쌍한 이방인이었다. 그래서였던지 푸아브르는 종교단체의 도움을 받아 겨우 자유인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당시 바타비아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다. 후추, 정향, 육두구 같은 향신료 값이 금값보다 높을 때였는데, 정향과 육두구는 인도네시아의 깊은 섬에서 생산되어 바타비아로 집하되고 있었다.


바타비아에서 네덜란드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향신료 무역을 목격한 푸아브르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의 프랑스 식민지인 퐁디세리로 가게 된다. 그곳에 머물면서 그는 프랑스의 동인도회사를 설득하여 인도네시아의 반다제도에서 정향과 육두구를 빼낼 계획을 세웠다. 황금알을 낳는 향신료 무역에 프랑스도 참여하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거기서 친하게 지내던 동인도회사의 한 직원이 프랑스령 식민지인 모리셔스로 가게 되자 푸아브르도 그를 따라 모리셔스로 가게 되었다. 모리셔스는 인도양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으로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해상 무역 루트의 주요 요충지였다. 이 섬을 1721년 이후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공식 위임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이렇게 푸아브르와 모리셔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푸아브르는 모리셔스의 기후가 인도네시아의 향신료 섬과 유사하고 유럽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곳이야말로 정향과 육두구를 키우기에 최적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금알을 낳는 향신료를 네덜란드인들이 호락호락하게 내줄 리가 없었다. 그들은 향신료 나무는 물론이고 씨앗을 외부로 반출할 수 없도록 철저히 감시하였다. 그러나 푸아브르는 네덜란드인들에게 반감을 가지는 본토인 및 영국인들을 매수하여 천신만고 끝에 향신료 식물 몇 그루 및 씨앗을 빼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모리셔스에 이들 향신료 식물을 키우기 위한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이것이 푸아브르의 가드닝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푸아브르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인들의 방해가 통했던지 대부분의 식물들이 죽고 말았다. 살아남은 몇 그루의 나무들도 질투심에 불타는 프랑스동인도회사 동료들의 고의적인 방해로 다 죽고 말았다.

실망한 채 프랑스로 돌아간 푸아브르는 그 후 10년 간 중농정책과 관련된 책을 쓰며 지냈다. 47세가 된 푸아브르는 17세 연하인 프랑소와 로뱅(Francoise Robin)과 결혼하게 된다. 로뱅은 푸아브르의 부인이자 동료로서 푸아브르의 식물사업을 후원하였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로부터 모리셔스의 통치권을 회수해 직접 관할하게 된 프랑스 정부는 이곳을 경영할 적임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푸아브르가 띈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푸아브르는 모리셔스와 레이니 옹 섬의 식민지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1767년). 그의 젊은 아내는 기꺼이 그를 따라 모리셔스로 향했다.

푸아브르는 모리셔스와 레이니 옹 식민지를 정비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모리셔스에 수도 포트 루이스를 건설했고 두 섬이 완전히 자급자족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또한 앞의 작은 정원을 확대해 거대한 식물원인 왕귤나무식물원(팜플무스가든, the Gardens of Pamplemousse)을 만들었다.

그의 집념으로 인도네시아의 몰루카제도에서 구한 향신료 묘목들과 씨앗들이 속속 이곳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푸아브르가 직접 묘목들을 돌보았으므로 식물들은 잘 자랐다. 이곳에서 재배된 향신료들을 아프리카의 잔지바르나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식민지로 보내는 식민지간 식물 교환 시스템도 구축되었다. 푸아브르의 꿈이 이루어졌던 것이었다. 푸아브르의 이러한 노력으로 네덜란드의 향신료 독점은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푸아브르와 아내 로뱅은 팜플무스 식물원에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지에서 가져온 희귀한 식물들을 심고 세심한 정성과 사랑으로 돌보았다. 이 팜플무스식물원은 그 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물원 중 하나로 성장했는데 오늘날은 모리셔스의 총리를 지낸 시우사구르 람굴람의 이름을 따 the Sir Seewoosagur Ramgoolam(SSR) Botanic Garden으로 개명되어 운영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자이언트 워터 릴리라는 거대 수련이 유명하다.


모리셔스의 Sir Seewoosagur Ramgoolam Botanic garden에 세워진 푸아브르의 흉상


Seewoosagur Ramgoolam Botanic garden의 자이언트 워터 릴리


1772년 모리셔스에서 임무를 끝내고 프랑스로 돌아온 푸아브르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브에 리옹에서 평안하게 죽었다(1786년).


푸아브르의 미망인 프랑소와 로뱅과 듀퐁 가의 인연

푸아브르가 죽고 젊은 미망인인 프랑소와 로뱅(Francoise Robin)이 남았다. 1748년 리옹에서 태어난 그녀는 1765년, 17세 연상인 피에르 푸아브르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상당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들이 모리셔스에서 도착하였을 때 한 작가가 그녀를 열렬히 사모하여 열정적인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는 에피소드가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녀는 상당한 미모로 추정된다.

프랑소와 로뱅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식물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남편의 활동을 정서적, 지적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남편이 모리셔스의 감독관으로 있을 때 그녀도 모리셔스의 식물원 조성과 농업개혁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편 사망 후 그녀는 열정적으로 남편을 알리고 기념하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남편 사후 10년 뒤에 로뱅은 남편의 친구이자 전기작가인 피에르 사뮤엘 듀퐁 드 느무르(Pierre Samuel du Pont de Nemours)와 재혼하였다. 듀퐁은 푸아브르의 전기를 쓰기 위하여 푸아브르의 삶과 관련된 모든 증언들을 수집하고 있던 참이었다. 푸아브르와 로뱅 사이에는 세 딸이 있었고 듀퐁은 전처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듀퐁 드 느무르는 프랑스 대혁명 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듀퐁은 중상주의자로서 프랑스와 영국 간의 자유무역 협정에 관여하였고 프랑스 대혁명 시의 테니스코트에서의 명세에도 관여했으나 급진적 공화당에 반대했다. 프랑스혁명 시 테러와 투옥을 당한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1800년).


듀퐁의 둘째 아들인 엘뤼테르 이레네 듀퐁(Éleuthère Irénée E.I. Du Pont)은 프랑스 유명 화학자인 앙투안 라브와지에(Antoine Lavoisier)의 제자였다. 라브와지에는 프랑스혁명 중 혁명의 적으로 몰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학자였다. E.I. 듀퐁은 스승의 사형에 큰 충격을 받고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E.I. 듀퐁은 1802년 델라웨어주에서 화약제조 회사인 E.I du pont de Nemours and Company, Inc를 설립하여 화약을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미국에서 생산되던 흑색화약은 품질이 매우 낮아 광산, 건설뿐만 아니라 군대에서도 큰 문제였다. E.I. 듀퐁은 프랑스에서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고급 화약을 제조하면서 듀퐁 가문을 미국 최고의 부자 반열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부자로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화약은 1812년의 미영전쟁과 남북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피에르 사뮤엘 듀퐁은 부인과 함께 1802년 프랑스로 귀환했다가 1815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듀퐁 부인은 프랑스에 남았고 1817년 남편과 사별하였다. 로뱅은 1841년 파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듀퐁 일가가 이룬 롱우드 가든

한참 시간이 흘러 1870년, 펜실베이니아의 Delaware 주 Wilmington에서 롱우드 가든을 설립한 피에르 S. 듀퐁(Pierre S. du Pont)이 태어났다. 미국 산업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이 피에르 S. 듀퐁의 가계를 따라가 보면 맨 위에 미국으로 첫 이주한 피에르 사무엘 듀퐁 드 느무르가 있다. 그의 둘째 아들이 엘뤼테르 이레네(E.I.) 듀퐁이었다. 그는 고급 화약을 개발하여 미국 산업화의 핵심 기반을 만든 인물이다. 엘뤼테르의 손자인 앙리 알게넌 듀퐁(Henry Algernon du Pont)은 미국 상원의원을 역임하였다. E.I. 듀퐁의 또 다른 손자가 피에르 S. 듀퐁이었다. 피에르 듀퐁의 부친인 레무알 래못 듀퐁(Lammot du Pont)은 피에르가 14살 때 새로운 폭약인 다이나마이트를 개발하다 실험 중 사고로 죽었다.

피에르 S. 듀퐁은 가장의 짐을 지고 성장하였다. 그는 매사추세츠 공대를 졸업한 후 듀퐁의 회장과 제네랄모터스의 회장을 역임한 출중한 기업인이었다.


롱우드가든의 듀퐁하우스에 걸려있는 피에르 S. 듀퐁의 초상화


이 사람이 1906년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롱우드 정원을 사들이면서 그는 미국 제1의 정원 설계자가 되었다. 롱우드는 본래 1700년대 퀘이커교도였던 퍼스 가문(Peirce family)이 인디언으로부터 이곳을 사서 정원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는데 퍼스 가문은 이 지역에 많은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런데 200년 후, 이 수목원을 벌목공장에 팔려고 내놓자 피에르 듀퐁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이 부지를 사들인 것이었다.

듀퐁은 그의 아내인 엘리스 벨린 듀퐁(Alice Belin du Pont)과 함께 그 당시 6,000불이라는 거금을 들여 외국의 가든을 방문하며 배우고 노력하며 이 정원 조성에 엄청난 정성을 들였다.

엘리스 B 듀퐁은 E.I. du Pont의 먼 친척으로서 두 사람은 오랜 친구 관계였다고 한다. 엘리스 B 듀퐁은 원예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롱우드가든의 건설에 관여하였는데 특히 난을 사랑하여 이 정원에 희귀 난을 재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130만 평의 면적에 약 1만 3천 여종의 식물을 보유한 세계 최고의 수준의 식물원으로서 롱우드 가든(Longwood Gardens)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수목원 1위로 자리 잡았다.


롱우드가든의 듀퐁하우스에 있는 앨리스 B 두퐁의 소개 패널


롱우드 가든을 뛰어다니다.

우리가 롱우드 가든에 도착하였을 때는 마침 중앙 온실 앞의 거대 분수에서 아름다운 분수춤이 시작되고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중앙 온실의 베란다에는 분수춤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있었다. 사무엘 S. 듀퐁과 그의 아내 엘리스 벨린 듀퐁(Alice Belin du Pont)이 유럽의 정원들을 둘러보고 와서 만든 중앙 정원이다. 드넓은 확 트인 공간과 뒤를 둘러싸고 있는 키 큰 나무벽이 이곳의 명성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롱우드라는 명칭은 남북전쟁 때 퀘이커교도들이 남부에서 도망친 흑인 노예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던 지하철도의 한 역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펜실베이니아의 어디에서든 퀘이커교도들의 미담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IMG_7813.JPG 중앙 분수대


IMG_7832.JPG 분수대에서 바라본 거대 온실


나는 이 넓은 공원을 둘러보려는 욕심으로 마음이 바빠 뛰다시피 바깥 정원을 훑었다. 남편은 나의 스피드를 감당하지 못해 카페의 야외 벤치에 앉아 고요히 정원을 바라보거나 독서를 하기로 하였다. 내가 이 넓은 공원을 다 섭렵할 듯이 뛰어다니자 헬렌도 그레이스도 마음이 바빴다. 헬렌은 이곳을 사랑하여 전에도 계절마다 이곳을 방문하였다고 하였고 그레이스도 자녀들과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나만치 열정적으로 롱우드 가든을 탐구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숲 속을 뛰어다니자 그들도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가을이 내려앉은 미국최고의 정원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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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이 바빴지만 롱우드가든을 만든 피에르 S 듀퐁과 그의 아내 앨리스 벨런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는 듀퐁하우스를 건성으로 지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롱우드가든을 조성하기 위하여 세계 여러 곳을 30회 이상 여행하였으며 그중 유럽을 12차례나 여행하였다. 그들은 그 여행을 통해 얻은 유명 건축물들과 정원들을 본 영감을 이용하여 롱우드 가든을 만들었다. 그 노력의 과정이 감동적이었다. 나는 인간의 열성적인 노력을 보면 감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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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7842.JPG 듀퐁부부가 여행하며 영감을 얻었던 세계의 건축물과 정원들


롱우드 가든의 야외 정원에서 나는 완전히 마음을 잃었다. 홀로 우리를 기다리는 남편의 존재도 잊고 거대한 나무가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나무 아래에서 나무를 바라보느라고 고개를 꺾었다.


IMG_7872.JPG 거대하게 자란 메이플 단풍나무


나무 아래에는 사랑스러운 크로커스 꽃들이 꿈결같이 피어있었다.

IMG_7869.JPG 꿈결같이 핀 보라색의 크로커스 꽃밭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은 자꾸만 나를 유혹하였고 그 숲 속에는 동화책에서 나오는 통나무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통나무집의 양쪽으로 커다란 나무들이 받치고 있었다.


IMG_7921.JPG 숲으로 난 오솔길


IMG_7905.JPG 숲 속의 통나무집


나는 듀퐁부부가 세계의 유명 정원을 찾아다녔다면 틀림없이 모리셔스의 푸아브르가 만든 왕귤나무식물원에도 가 보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모리셔스의 왕귤나무식물원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자이언트 워터 릴리(Giant water lily:거대 수련) 정원이다.

나는 어디에선가 롱우드 가든에도 자이언트 워터 릴리가 심어져 있는 호수가 있다고 읽은 바가 있어서 헬렌을 독려하여 호수들을 찾아다녔다. 해가 어스름하게 지고 있고 숲에는 거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도 수련 호수를 찾지 못하였다. 피에르 푸아브르의 왕굴나무식물원이 미국 펜실베니어의 롱우드 가든에서 되살아난 데자뷔를 보려는 나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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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듀퐁 가문의 원예에 대한 관심은 프랑스에서 온 이민자 조상들에 의해 이어졌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니 그 내력이 어디서 왔을지 짐작이 간다. 내 눈에는 모리셔스의 정원을 가꾸던 피에르 푸아브르와 그 부인인 프랑소와 로뱅의 모습이 보이고 그녀를 사랑했던 피에르 사무엘 듀퐁 드 느무르가 보인다.

그래서 펜실베이니아를 가면 꼭 롱우드 가든을 가 보리라고 벼르고 있었더니 꿈은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부족하여 다 둘러보지 못하였다. 130만 평의 정원을 다 둘러보려면 며칠을 이곳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았다. 헬렌의 말에 의하면 봄의 롱우드 가든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였다. 아! 언제 또 오랴!


껌껌해져서야 남편이 기다리는 야외 카페로 돌아갔다. 남편은 홀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관리인들이 지나가다가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문 닫을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남아있었느냐는 타박이었다. 우리는 쫓기듯이 식물원을 나왔다. 뭔가 파티라도 있는지 성장한 사람들이 저녁의 롱우드 가든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나의 롱우드 가든과의 만남은 아쉽게 끝이 났다.


IMG_7927.JPG 그리하여 밤이 되었다.


롱우드 가든의 최고 관리인 듀퐁씨가 1945년 제2차 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의 해군정보장교로 우리나라에 파견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군정청은 한반도에서의 일본군의 축출과 전후 안정을 위해 미군을 우리나라에 파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듀퐁씨와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파견된 또 다른 해군정보장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였다. 그는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Pittston에서 태어났다. 펜실베이니아에 롱우드 가든이 있었음은 우연이겠지만,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어쩐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밀러가 우리나라의 태안에 천리포 수목원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귀화하여 민병갈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졌다.


IMG_8370.jpg 천리포 수목원에 있는 민병갈 원장의 조각


펜실베이니아에서 이 ‘펜의 숲의 나라’가 어쩐지 식물원들과 연관된 사람들을 배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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