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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허쉬타운에서

밀튼 허쉬가 만든 초콜릿 마을

by 보현


해리스버그에는 밀튼 허쉬(Milton Hershey)가 세운 유명한 허쉬타운이 있다.

‘위대한 미국 초콜릿 바’를 탄생시킨 밀턴 허쉬가 세운 마을이다. 지도상의 이름도 허쉬타운이다.


나는 <사피엔스의 식탁>이라는 책을 쓰면서 기호식품으로서의 초콜릿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당연히 초콜릿을 대중화한 밀턴 허쉬(Milton S. Hurshey)와 포레스트 마스(Forrest Mars)가 등장하였다. 그러니 내가 펜실베이니아를 여행할 때 얼마나 허쉬랜드를 가 보고 싶었겠는가! 전설적인 초콜릿 제국을 이룬 인물이 세운 전설적인 마을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니 여행 계획을 세울 때부터 내 마음이 흥분되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헬렌도 몇몇 여행 가이드들도 허쉬타운은 어린아이들이나 가는 곳이지 어른이 가면 볼 것도 없다고 나의 여행계획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허쉬타운으로 가고 싶은 이유는 한 사람이 이룬 위대한 업적을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어서였지 놀이기구를 타기 위함이 아니었다(허쉬타운에는 놀이기구가 있는 허쉬파크가 유명하다).


밀턴 허쉬가 만든 세계, 허쉬타운

밀턴 허쉬는 1857년 9월 13일 펜실베이니아의 데리에서 태어났다. 독일계 스위스인인 밀턴의 증조부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1700년 초 펜실베이니아주로 이주해 왔다. 펜실베이니아를 개척한 윌리엄 펜이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펜실베이니아주의 주요 2대 이민자 그룹이 독일계와 아일랜드계였다.

부친 헨리 허쉬는 끊임없이 새 사업을 구상하며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으나 늘 사업에 실패하였고 따라서 허쉬일가의 생활은 가난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허쉬는 초등학교 4학년을 최종으로 학교를 중퇴하게 되었다.

공부에 별로 뜻이 없어 보이던 허쉬는 다만 사탕 사 모으는 일에 탐닉하였다. 이에 그의 어머니는 14세가 된 아들을 한 제과사의 도제로 들어가게 하여 과자제조법을 배우게 하였다. 그 후 부친을 따라 서부로 간 허쉬는 덴버에서 캐러멜을 만드는 한 제과업자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허쉬는 고급 캐러멜을 생산하던 그 제과업자의 비밀을 켜기 위해 열심히 탐구하였다. 그 비밀은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파라핀 대신 신선한 우유를 사용하여 캐러멜을 제조하는 것이었다.

그 제과업자의 비밀을 캐낸 허쉬는 다시 동부로 돌아가 은행대출을 이용해 펜실베이니아의 랭커스터에 랭커스터 캐러멜사(Lancaster Caramel Company)를 설립하였다(1886). 이것이 허쉬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다. 어느 날 한 영국인이 허시의 캐러멜에 반해 영국으로 대량의 주문을 발주하면서 허쉬는 벼락부자가 되었다. 허쉬의 캐러멜은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호주, 그리고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나이 서른셋(1890년)에 허쉬는 부자가 되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콜롬비아 만국박람회가 열렸는데 그곳에서 초콜릿 제조 기계들을 대면하자 허쉬의 마음속에 불꽃이 일어났다. 당시 스위스 약제사 앙리 네슬레가 카카오 고형분에 우유를 혼합하는 방법을 이용해 밀크 초콜릿이라는 새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허쉬는 이제 남의 기술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기만의 기술로 밀크 초콜릿을 만들고 싶었다. 당시 초콜릿은 비쌌으므로 아무나 사 먹을 수 있는 과자가 아니었다. 허쉬는 이를 대중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판형으로 만들어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들고자 했다.

랭커스트 공장 한편에 랑케스트 캐러멜사의 자회사로 허쉬초코렛사(HERSHEY'S Chocolate Co)를 창립한 것이 1894년이었다. 세계의 초콜릿 왕국이 될 허쉬초콜릿사의 탄생이었다. 이곳에서 초콜릿 제조 실험을 계속하던 허쉬는 1900년 판형 밀크초콜릿을 성공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이것의 성공에 힘입어 허쉬는 초콜릿 사업에 전념하기 위하여 캐시 카우인 랭커스터 캐러멜사를 과감하게 매각하였다. 그에게는 사업가로서의 네비게이터가 장착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허쉬의 예상대로 그의 밀크 초콜릿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가 밀크 초콜릿을 대량 생산하면서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그 달콤한 맛은 미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오늘날 한국의 슈퍼에서도 여전히 구매할 수 있는 그 제품이다.

1903년 허쉬는 자신의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의 데리 타운십(Derry Township)에 초콜릿 공장을 세웠다. 고향이기도 했지만 그의 초콜릿에는 신선한 우유가 필수 원료였고 그곳에는 목장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7년 그가 만든 키세스는 허쉬사를 완전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서 1908년에는 아몬드 밀크 초콜릿이 탄생하여 변화를 더했다.

그에게는 수많은 성공신화들이 이어졌다. 특히 이차대전 시 미군에게 제공된 레이션에 허시 바(bar) 형 초콜릿이 공급되었는데, 1940년에서 1945년 사이에 총 30억 개 이상 생산되어 전 세계의 미군 병사들에게 보급되었다. 이제 허쉬 사는 세계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이 성장하였다. 1963년에는 리세사를 인수하여 땅콩버터컵 초콜릿인 리세스(Reese's)를 생산하고 있다.


허쉬타운의 건설에 집념을 불태우다

허시는 뉴욕의 사탕가게에 캐러멜을 배달하러 갔다가 사탕가게 점원이던 캐서린 키티(Kitty)를 만나게 되었고 둘의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졌다(1898년).


밀턴 허쉬와 그의 아내 캐서린 키티


허쉬부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이들 부부는 자신의 아이 대신 수많은 고아들을 돌보기로 하였다. 허쉬부부는 신탁기금을 조성하여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허쉬의 자선사업의 시작이었다(1909년). 이 학교가 현재의 밀턴 허쉬 스쿨(Milton Hershey School)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내 키티가 1915년 원인 불명의 질병으로 사망했다. 허시는 회사 경영권을 포함한 자기 자산 대부분을 허쉬학교 신탁기금에 넘겼다(1918년).


당시 유럽에서 초콜릿 사업을 주도하던 사람들은 영국의 퀘이커교도들이 많았다.

처음 신대륙에서 온 카카오를 이용하여 유럽인들은 코코아를 마셨다. 코코아를 제조할 때 가장 큰 문제가 카카오의 지방 부산물 처리였다. 이때 네덜란드의 쿤라드 요하네스 판 하우턴이라는 사람이 카카오 원두에서 지방을 분리하는 기계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유럽인들은 판 하우턴 덕분에 지방을 제거한 깔끔한 코코아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코코아 버터는 쓸모없이 버려지는 잔사에 불과했다.

이 코코아 기름을 살린 이가 영국 퀘이커교도인 브리스톨의 의사 조지프 프라이(Joseph S. Fry)였다. 그는 버려지는 카카오 버터에 카카오 고형분과 설탕 등을 넣고 섞어 틀에 부여 성형하여 근대적인 판형 초콜릿을 만들어내었다. 그의 제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이어서 또 다른 퀘이커교도인 존 캐드베리(John Cadberry)가 경쟁자로 나타났다. 캐드베리 가문은 특히 마카팅 능력에 뛰어나서 한입에 베어 먹을 수 있는 크기의 초콜릿을 만들어 예쁜 포장지에 담았다. 그들은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먹는 마케팅에다 부활절 달걀 초콜릿을 판매했다.

조지프 프라이의 회사는 후일 조지프 라운트리가 경영하는 19세기말에는 초콜릿 드롭스 등을 만들며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조지프 라운드리는 퀘이커교도의 정의를 향한 열정이 있었다. 그는 종업원의 삶을 향상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공장에 도서관을 짓고 17세 미만의 노동자들에게는 교육기회를 제공하였으며 무료 진료와 퇴직연금까지 지급하였다. 노동자 복지를 위한 최초의 행위였다.

캐트베리 가문도 19세기 영국 공장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공장을 전원으로 옮기고(1878년) ‘본빌’이라는 마을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캐트베리 가문은 본빌을 꽃과 녹지로 만들고 식당에서는 건강식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영국 퀘이커교도들의 초콜릿 업체의 도덕적 경영이 밀턴 허쉬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허시는 그의 초콜릿 공장의 울타리 안에 공장 근로자들이 사는 쾌적한 마을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데리마을 근처의 수백 에이커의 옥수수 밭을 사들였다(1903년). 그리고 쾌적한 주택, 깨끗한 거리, 병원, 학교, 공원, 문화시설이 있는 이상향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의 중심에는 초콜릿 공장이 들어서고 넓은 도로와 드넓은 잔디밭이 있는 저택이 노동자들을 위해 지어졌다. 집마다 전기, 온수시설이 포함되었고 임대료는 매우 저렴하게 책정되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실험이었다.

1906년에는 직원들과 지역주민들을 위한 놀이공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허쉬타운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허쉬파크로 성장하였다. 1933년에는 커다란 대리석 로비를 갖춘 대극장을 지어 문화를 선사하고자 하였고 1937년에는 장미로 가득한 아름다운 허쉬 가든을 개설하였다. 이 장미가든은 그의 아내 키티를 위해 만들어 주고 싶었던 정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위한 교육과 문화공간으로서 허쉬 커뮤니티 센터와 허쉬 도서관도 만들었다. 이외에도 이곳에는 웬만한 호수 크기의 수영장과 야외 음악당, 골프 코스, 노동자들을 위한 병원과 교회 및 이웃마을과 연결되는 노면 전차까지 있다. 직원들은 건강보험과 퇴직연금의 혜택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였고 수십만 명의 관광객들이 부러운 눈길로 이곳을 방문하였다.

나중에 이 마을은 허쉬 시가 되었고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부러운 마을의 하나로 남아있다.


하지만 허시가 아무리 사내복지정책을 잘해 주어도 시대의 흐름은 노동조합 결성이었다. 허쉬초콜릿 사의 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의 결성을 요구하였다. 노동자들을 위해 사심 없이 자산을 부어온 허쉬로서는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에 그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불허했다. 이에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에 나서자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측과 사용자 측을 지지하는 다수 노동자들 사이에 폭력사태가 일어났다(1937년).

허시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허쉬는 자신이 그렇게 잘 해준 노동자들이 왜 그런 요구를 해오는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노동운동에 큰 충격을 받은 허쉬는 1944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이듬해인 1945년 10월 13일 폐렴으로 허시 병원에서 죽었다. 향년 88세였다.


허쉬 초콜릿 월드 방문

허쉬타운이라는 방대한 장소로의 견학은 잠시 미루고 우선 초콜릿 월드(Chocolet World)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허쉬사의 대표적 제품인 허쉬 밀크 초콜릿과 키세스, 리세스가 양팔을 벌려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초콜릿 왕국에 들어온 느낌이 확 났다.

초콜릿은 인류가 가장 사랑하는 기호식품의 하나이다. 이 갈색의 코코아를 얻기 위해 지금도 적도의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이 하루 1불도 채 받지 못한 채 카카오 노동에 내몰리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인류는 이 달콤 쌉싸름한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초콜릿의 대중화에 앞장선 이가 밀턴 허쉬였다.


허쉬랜드의 초콜릿 월드 입구에서


실내로 들어가자 여러 종류의 초콜릿이 판매되고 있었지만 나는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밀턴 허쉬의 모습에 먼저 눈길이 갔다. 이 벽화에는 허쉬사의 최초의 초콜릿 공장 앞에 서 있는 밀턴 허쉬의 온화한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참으로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서의 풍모가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벽면에 그려진 밀턴 허쉬의 모습


허쉬스 초콜릿 월드(Hershey’s Chocolate World)의 한편에는 기네스 북에 오른 세계 최대규모의 허쉬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허쉬 초콜릿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캔디 바를 직접 만들어 보고, ‘키스 공장(Kiss Factory)’에서 일하고, 초콜릿 제조 과정을 모두 체험해 볼 수 있다.


허쉬스 초콜릿 월드 조감도


나는 한쪽 벽면에 기록되어 있는 허쉬초콜릿 사의 역사를 흥미 있게 읽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노란색 셔츠를 입은 한 직원이 동양인들에게 밝은 미소를 띠며 관심을 표명했다. 헬랜이 나의 책에서 밀턴 허쉬를 언급했다는 것을 설명하자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친절히 밀턴 허쉬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그 자신 허쉬가 세운 학교 출신이라고 밝혔다.


이 초콜릿 월드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놀이기구 같은 기차를 타고 초콜릿이 만들어지는 경로를 따라가 보는 투어프로그램이었다. 먼저 한 파운드의 초콜릿 생산을 위해서는 270알의 카카오 빈이 필요하다는 안내가 눈길을 끌었다. 어쩔 수 없이 아프리카의 최빈국에서 카카오 수확에 내몰리는 가난한 어린이들이 생각났다. 이런 허쉬사와 같은 거대 초콜릿 회사를 위해 수많은 어린이들이 노예처럼 아동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캐럴 오프기 쓴 <나쁜 초콜릿>의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IMG_7688.JPG


IMG_7695.JPG 초콜릿의 제조 공정


IMG_7698.JPG 초콜릿의 제조 공정

허쉬초콜릿사의 직원과의 만남으로 인해 더욱 의미 있는 초콜릿 월드 투어가 되었다.


트롤리 타고 허쉬타운 둘러보기

광대한 허쉬타운 전체를 둘러보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허쉬 월드 앞에 선 트롤리를 타고 허쉬타운의 여기저기를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돌아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있다가 버스에 올라탔다. 우리도 당연히 그 버스를 탔다. 놀랍게도 버스는 만석이었다.


허쉬타운을 돌아보는 관광 트롤리


허쉬의 키스(Kiss) 초콜릿 모양으로 장식한 가로등이 늘어선 도시로 트롤리가 출발하였다. 전직 교사였다는 가이드가 밀튼 허쉬의 감동적인 사업 이야기를 들려주며 허쉬랜드의 이곳저곳을 안내하였다. 1903년 허쉬는 이곳 옥수수밭 수백 에이커를 사들여 허쉬타운을 건설하였다. 허쉬가 아내를 추모하며 위해 만들었다는 허쉬가든을 통과해 허쉬 호텔이 저 멀리 보이고 최초의 허쉬 초콜릿 회사와 허쉬학교와 허쉬병원과 허쉬가 노동자들을 위해지었다는 저택과 무서운 놀이기구로 유명한 허쉬랜드를 지나는 약 한 시간가량의 투어프로그램이었다. 골프장, 커뮤니티 센터, 극장, 호텔, 동물원, 허쉬파크 아레나, 허쉬파크 경기장 등을 잇달아 지나갔다.


그중에서도 가이드가 가장 역점을 두어 설명하는 부분의 허쉬학교의 복지 수준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밀턴허쉬스쿨(Milton Hershey School)은 허시 부부가 1909년에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만든 것이 그 시작이다. 처음에 세워진 곳은 어릴 때 허쉬가 자랐던 농장 부지라고 하였다.

허쉬부부는 이 학교의 학생들의 복지를 최고 수준으로 만들어주었는데, 지금도 사회적,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을 선발해 최고의 지원을 해주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학교의 최대 주주는 허쉬기 때문에 자금력도 엄청나다고 한다. 현재 약 2천 명 정도의 재학생이 이 기숙학교를 다니는데, 그들에게 지급되는 최신 노트북하며 용돈 하며 기숙사의 시설하며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속에는 부러움이 느껴졌다. 세계 최고의 부자학교가 펜실베이니아 허쉬타운에 있었던 것이었다.


유머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인지라 우스갯소리를 섞어 밀턴 허쉬의 삶을 조망하는 가이드의 설명에 승객들을 무릎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무슨 소린지 몰라 그 분위기에 동참할 수 없는 나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책에서만 만나던 방대한 허쉬랜드를 직접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가이드는 설명 틈틈이 초콜릿 소쿠리를 관람객들에게로 돌렸고 우리는 흥겹게 초콜릿을 서너 개씩 주머니에 챙겼다. 마치 핼러윈 데이에 마을을 돌며 초콜릿을 얻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트롤리는 허쉬일가가 살던 저택 앞에 멈춰서 꽤 오래 머물렀다. 허쉬는 아내 키티의 사후 재혼하지 않고 이 집에서 혼자 살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허쉬를 위해 잠시 묵념하는 것 같았다. 나도 이 시대를 살았던 한 위대한 인물을 위해 잠시 기도했다.


허쉬타운에 있는 허쉬 저택: 이곳에서 아내 키티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밀턴 허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은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만큼 행복하다.


밀턴 허쉬의 위대한 이상의 실현장인 허쉬타운을 돌아볼 수 있어 나는 흡족했다.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 준 헬렌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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