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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해리스버그와 전쟁박물관

펜실베이니아의 주도

by 보현


해리스버그(Harrisburg)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수도이다.

포코노 마운트에서 2시간여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었으므로 우리는 해리스버그를 방문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캐빈을 떠났다. 2024년 11월에 미국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펜실베이니아는 경합주(swing state)의 하나로 언론에서 자주 거론하는 곳이었다. TV에서 펜실베이니아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비춰주는 곳이 바티칸의 초록색 돔을 닮은 아름다운 주의사당 건물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의사당 건물의 하나라고 하니 꼭 가 보고 싶었다. 아름답기로야 매사추세츠의 황금색 돔을 가진 주의사당 만할까 보냐고 생각하면서도 기대가 되는 나들이였다.

게다가 펜실베이니아에는 필라델피아같이 미국 건국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도 있고 게티즈버그같이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결정적 승기를 잡은 곳도 있다. 이곳에 국립남북전쟁박물관(The National Civil War Musium)이 세워져 있으므로 미국 남북전쟁의 역사도 공부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내가 헬렌에게 남북전쟁이 벌어진 전장(war field)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헬렌이 우리 여행의 스케줄에 넣은 곳이 바로 해리스버그였다. 나의 쓸데없는 관심이 헬렌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나 보았다. 헬렌은 나 때문에 지리공부, 역사공부를 많이 하였다며 웃었다. 나 때문에 남편도 그레이스도 꼼짝없이 미국 남북전쟁 공부를 하게 생겼다.


그런데 펜실베이니아 지역에는 ~버그(burg)라고 이름 붙여진 도시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해리스버그, 게티즈버그(Gettysburg) 뿐만 아니라 피츠버그(Pittsburgh), 루이스버그(Lewisburg)니 햄버거(Hamburg), 스트라우즈버그(Strousdburg), 블룸즈버그(Bloomsburg), 쉐펜스버그(Shippesburg), 챔버스버그(Chambersburg) 등등 나열하기도 벅찬 ~버그(burg)라고 이름 붙여진 지명들이 많았다.

그 이유를 알고 보니 독일계 이민자들이 펜실베이니아에 많이 정착하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였다. 독일에서 ~berg는 산이나 언덕을 의미하고 ~burg는 성 또는 요새를 의미한다고 한다.

또 하나, 사족이지만 헤리스버그라는 이름은 존 해리스 2세(John Harris Jr.)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의 부친인 존 해리스(John Harris) 1세는 1719년 현재의 해리스버그 지역에 처음 정착하고 무역업을 시작하였고 존 해리스 2세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지역 사회를 발전시키고 도시를 조직적으로 설계하였다고 한다.


펜실베이니아의 주의사당 방문

우리는 먼저 펜실베이니아 주 의사당(Pennsylvania State Capitol)을 찾았다. 1906년, 이곳의 개관식에 참석한 루스벨트대통령이 ‘가장 멋진 의사당’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치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 의사당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의사당 입구에는 기마상 동상이서 있었는데 동상의 주인공은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장군이자 펜실베이니아의 주지사를 지낸 존 하트랜프트 (General John Hartranft) 장군이었다. 장군의 기마상을 보자 이곳이 남북전쟁의 주요 전장이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존 하트랜프트 (General John Hartranft) 장군의 기마상


주의사당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간단한 검색을 통과한 후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 웅장한 돔과 화려한 내부장식의 로툰다(rotunda)가 펼쳐져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유럽의 어느 신전이나 궁궐을 연상시키는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꽉 채운 모습이 주의사당 건물로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견학온 학생들과 역시 선거철이어서 그런지 이곳에서 정치행사가 있는 듯 사람들로 북적였고 가이드 요원들의 눈초리가 예리하였으므로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과 벽화, 스테인드 글라스 등으로 치장된 로툰다(rotunda)를 중심으로 돌다가 밖으로 나와야 했다. 얼핏 보기에도 정성을 다해 치장한 모습이 일명 ‘예술의 궁전’으로 불려도 하나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미국인들이 지향한 유럽에 대한 향수를 실감할 수 있었다.



방문객들로 시끌벅적한 로비


건물 밖으로 나오니 보자르 양식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주 의사당 모습이 더 분명하게 보였다. 이 건물이 세워진 것이 1906년이라고 하였다. 1900년대 초 미국이 얼마나 강대한 부자가 되었는지를 여지없이 나타내는 곳이 바로 해리스버그의 주의사당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부자나라 미국을 실감하고 있었다.


해리스버그의 역사 거리에서 바라본 주의사당


주의사당 앞으로는 서스쿼해나 강(Susquehanna River)이 흐르고 있고, 그 사이에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는 역사거리(Historie State Street)가 있었다. 19세기에 건립된 성 패트릭대성당과 침례교회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아메리카라는 새나라를 건설할 때 항상 종교가 최일선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특히 윌리엄 펜이 영국에서 종교탄압을 받고(그는 퀘이커교도였다) 펜실베이니아를 건설할 때 종교의 자유를 이상향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펜실베이니아에는 퀘이커교도뿐만 아니라 개신교도들이 많이 이주해왔다고 한다. 우리는 서스쿼해나 강가에 서서 애팔래치아 산맥이 만들어 내는 대자연의 모습을 잠시 즐겼다.


침례교회(왼쪽)과 가톨릭 성 패트릭 대성당(오른쪽)


국립남북전쟁박물관 방문

다음에 우리가 찾은 곳은 국립남북전쟁박물관(The National Civil War Musium)이었다.

전쟁박물관은 해리스버그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해리스버그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국립남북전쟁박물관


박물관 입구에는 적군에게 물을 건네는 군인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곳 박물관의 취지를 한눈에 드러내는 것 같았다. 이곳은 남북 전쟁이 일어난 이유나 전개과정을 남군과 북군의 양 입장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적군에게 물을 건네는 한 병사


손님은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국인들도 잘 찾지 않는 곳을 동양인 네 명이 들어가자 안내계의 사람이 좀 놀라는 얼굴을 하였다.

입구에는 북부연합의 국기가 걸려있었는데 왼쪽 것이 전쟁 전의 북부의 15개 주를 상징한다면 오른쪽 것은 전쟁 후의 주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임을 단적으로 천명하는 모습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이에 대해 남부 연합은 ‘별과 막대’의 국기를 사용하였는데 역시 별은 남부연합에 참가한 주의 수를 가리켰다.

남부연합의 국기: 왼쪽(1861~63), 오른쪽 1863년 이후


남북전쟁의 원인은 노예제도에 대한 첨예한 갈등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박물관 측의 패널을 따라가다 보면 미국에서 1860년이 얼마나 중요한 해였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마도 1860년에 에이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남북전쟁이 1861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1860년대의 미국은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고 있었다.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독립한 이후 미국은 훌륭한 정치지도자들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힘을 합쳐 국력을 키워나갔다. 그 힘을 바탕으로 미국은 루이지애나 땅을 매입(1803년)하였고, 텍사스를 병합(1845년)하였으며, 멕시코 영토를 병합(1848년)하였다. 1867년에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땅을 매입하면서 미국의 영토는 남부와 서부로 팽창하여 태평양 연안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엄청난 영토확장이었다(오늘날 트럼프 대통령이 캐나다와 그린란드까지 탐내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영토가 확장되자 운하와 철도를 건설하여 나라를 하나로 묶는 대변혁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북부에서는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강력한 산업경제가 발전하고 있었고 남부에서는 농업 플랜테이션 경제가 확립되었다. 남부지방에서는 담배, 인디고, 쌀 등이 주로 재배되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생산물은 코튼이었다. 코튼은 바로 캐시 카우였다. 그 캐시 카우를 위해 남부에서는 플랜테이션 경제의 일손을 노예로 충당하고 있었다.


남부지방에서 재배된 코튼(king cotton): 남부지역의 가장 중요한 캐시 카우였다.


남북전쟁이 일어날 즈음인 1860년이 되자 남북의 경제규모가 확연히 차이가 지기 시작하였다. 북쪽 19 주의 인구는 2천2백만 명이었다면 남부 노예주 15개 주의 인구는 1천2백만이었는데 그중 1/4이 노예였다. 전쟁직전 남부지역에서는 1만 개의 공장에서 노동자 10만 명이 근무했다면 북쪽지역에는 10만 개의 공장에서 100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였다. 이렇게 되자 북쪽에서는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남부지방에 노예로 묶여있는 노동력을 탐내기 시작하였다.


노예제도는 인류가 만든 가장 흉측한 범죄행위임에 틀림이 없었다. 일찍이 노예제도의 잔학성에 분노하며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 나선 인물들이 많았다. 이 박물관에도 그런 활동에 나선 인물들에 대한 조명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술로(프레데릭 더글라스 Frederick Douglass <한 미국 노예의 이야기>), 연설로(에이브러햄 링컨), 활동가로(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노예제도의 잔혹성을 고발하였다.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William Lloyd Garrison)은 신문 <리버레이터>를 통해 급진적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였고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는 유명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써서 일반대중의 반노예 정서를 끌어내었다. 존 브라운(John Brown)은 급진적인 무장론자로서 하퍼스 페리(노예반란) 사건을 주도하였다.


노예출신으로서 노예해방 운동에 나선 프레데릭 더글라스와 지하철도의 ‘모세’로 불린 해리어트 터브먼


존 브라운(사진 왼쪽 위)과 그가 반란을 주도한 버지니아의 하퍼스 페리(사진 오른쪽 위)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라는 노예구조 활동을 벌인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지하철도라고 불리는 것은 비밀 탈출 루트로서 탈출 노예들은 자유세상으로 인도하는 경로를 일컬었다. 레비 코핀(Levi Coffin)은 약 3천 명의 탈출 노예를 자유 세계로 이끌어 지하철도의 대통령으로 불렸으며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은 그 자신 탈출한 노예출신으로서 수많은 노예를 지하철도를 통해 자유세계로 인도하여 ‘모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흑인들도 공동체를 만들어 저항하였는데 여기에는 <데이비드 워커의 항의문>을 적어 흑인들에게 직접 저항을 촉구한 데이비드 워커(David Walker)도 있었고 1831년 버지니아에서 노예반란을 주도한 나트 터너(Nat Turner)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노예제 폐지를 향한 중요한 움직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미국 남북전쟁은 흑인노예 해방을 위한 인권전쟁은 아니었다.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자(북부)와 확보한 노동력을 뺏기지 않으려는 자(남부)와의 경제 전쟁이었다. 인류는 자고로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거나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여왔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한 전쟁은 더욱 결사적이기 마련이다.


남북전쟁의 발화점은 노예폐지론자인 에이브러험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였다(1860년). 서부지역이 새로이 편입되면서 이 지역에서 노예제도를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이 증폭될 시점이었다. 링컨은 노예제 확산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에 남부 주들이 강하게 반발하였다.

전쟁의 포문을 연 것은 남부욘합 측이었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뒤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남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Fort Sumter)를 포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전세가 남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남군은 섬터 요새를 빼앗았고 그 후 3개월 뒤 벌어진 대규모 불런 전투(Battle of Bull run)에서도 승리하였다. 그러나 북구군이 전열을 가다듬자 1862년 4월에 벌어진 샤일로 전투(Battle of Shiloh)에서 북군이 승리하면서 서부 전선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그 후 메릴랜드 주 엔티텀에서 벌어진 전투(Battle of Antietam)에서도 북군이 승리하였고 결정적인 전투는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에서 북군이 승리하면서 남부는 방어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링컨대통령이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행하였다.

그 후 몇 번의 전투가 더 있었지만 남군이 1865년 앱퍼매톡스 전쟁(Battle of Appeomattox Court House)에 패해 4월 9일 남부 연합 장군 로버트 E. 리가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였고 5월 5일 남부연합 행정부가 해체를 선언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이로서 4년간의 내전은 북부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노예제도도 당연히 끝이 났다.


박물관에는 남북전쟁 당시 남, 북군이 입었던 복장과 소지품, 무기도 소개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이런 스타일의 복장은 처음부터 확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북군의 이상적인 군복은 진한 파란색 코트에 밝은 바지, 검은색 모자로 규정되었고 남군은 회색계열의 옷을 주로 입었기 때문에 ‘블루 앤 그레이 워(Blue and Gray War)’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북군 보병(왼쪽)과 남군 기병대(오른쪽)의 복장


북군의 복장 및 무기


북군 기병대(Union Cavalry)의 복장과 무기도 전시되어 있었다. 북군 기병대는 전쟁 초기에는 남군에 비해 약한 전력을 보였으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강력한 전력으로 성장하였는데, 특히 1865년의 피터즈버그 전투에서 남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북군 기병대 Union Cavalry의 복장 및 무기


북군 포병대(Union Artillert)의 복장도 전시되어 있었다. 포병대는 남북전쟁 동안 북군의 핵심전력의 하나로 전쟁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북부는 공업이 발달하여 포병 장비를 대량 생산할 수 있었던 점과 철도를 이용한 용이한 수송작전이 전투력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북군 포병대(Union Artillery)의 복장


게티즈버그 전투 직전에 남부군은 해리스버그를 침공할 대규모 전투계획을 세웠지만 해리스버그를 향해 북진하던 남부군은 게티즈버그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됨으로써 해리스버그에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해리스버그는 남북전쟁 당시 북부의 중요 군사거점이었고 펜실베이니아는 북군에 가장 많은 병력을 지원하였으며 해리스버그 출신의 많은 병사들이 전쟁에 희생되었다. 이곳에 전쟁기념관이 세워진 이유로 보였다.


전쟁기념관의 바로 앞 뜰에 캠프 커틴(Camp Curtin)이 있었다. 이곳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가장 중요한 군사 훈련 및 보급 기지 중의 하나였다. 전쟁기간 동안 30만 명 이상의 병사가 이곳에서 훈련을 받고 전장으로 이동했다. 전쟁 중에는 병원 및 포로수용소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전쟁기념관의 2층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서면 바라보이는 뜰에 대규모 캠프가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캠프 커틴이 있었던 장소: 저 아래에 해리스버그의 도심이 보인다.


박물관을 나와 밝은 햇살아래 서니 평화로운 시절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언덕 위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있었고 주민들이 개를 데리고 와 평화로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단풍 든 분수대 곁에서 우리는 헬렌이 만든 샌드위치를 먹었다. 남편은 벤치에 앉아 평화로이 뱃줄식사를 하였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 날이었다.


평화를 만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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