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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마운트 버논에서

조지 워싱턴 생가

by 보현


마운트 버논(Mount Vernon)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gington)이 살던 곳이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 독립전쟁에서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고 초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미국 정부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순위에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이름을 올린다. 그의 이름은 워싱턴 D.C. 를 포함하여 워싱턴 주(Washington State) 같은 주의 이름에도 남아있고, 대학 이름(George Washington University), 도로 이름(George Washgington Memorial Parkway), 건물 이름(Federal Hall National Memorial) 및 수많은 거리, 공공시설 등 수백 곳에 남아있다. 미국인들이 국부로서의 그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운트 버논은 버지니아주 마운트 버논 근처의 포토맥 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남편과 나는 헬렌의 안내로 마운트 버논으로 가게 되었다. 워싱턴 D.C. 에서 조지 워싱턴 메모리얼 파크웨이(George Washington Memorial Parkway)를 타고 아름다운 강변도로를 달리다 보면 한 시간도 안되어 종점인 마운트 버논에 도착하게 된다.


조지 워싱턴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마운트 버논의 농가에서 나머지 인생을 보냈다. 그는 정원을 가꾸고 농사를 진두지휘하며 위스키를 만들었다는데 전성기에는 전체 영지가 8,000 에이커에 달했다고 한다. 이를 우리 식으로 환산하자면 약 970만 평이 넘는 아주 넓은 땅으로서 서울 여의도의 약 120배가 넘는 크기이다. 그는 대단한 영지의 영주였던 셈이다. 당시에도 이렇게 넓은 규모의 영지를 소유한 것은 매우 드물었다고 했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부인과 함께 살았던 마운트 버논은 매년 백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우리가 마운트 버논에 도착했을 때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미국인들의 죠지 워싱턴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죠지 워싱턴 대통령을 생각해 보았다.


조지 워싱턴이 결혼한 마사 D. 커스티스(Martha Dandridge Custis)는 부유한 미망인이었다. 커스티스 가문은 18세기 버지니아 식민지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가문 중 하나였다. 워싱턴과 재혼할 당시 마사는 어마어마한 자산과 100명 이상의 노예, 그리고 수천 에이커의 토지를 상속받고 있었다. 이때 워싱턴이 26세였고 마사는 1살 연상인 27세였다. 이 결혼으로 그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고 마운트 버논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향후 대통령직까지 나아가는데 토대가 되었다고 하니 마사는 워싱턴에게 행운을 안겨준 여인이었던 셈이었다. 어떻게 보면 정략결혼으로도 보이는데 부부 사이는 매우 좋았다고 한다.

결혼 당시 마사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2명의 자녀가 있었다. 워싱턴은 두 아이의 양아버지로서 엄격하지만 따뜻한 보호자역할을 하였으며 손자들까지 손수 양육하며 이곳에서 다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마운트 버논의 입구


티켓팅을 위해 오리엔테이션 센터 안으로 들어서면 이들 가족이 마중이라도 나오는 듯 손을 잡고 우리를 맞아준다. 이 가족 동상은 조지 워싱턴과 그의 아내 마사 워싱턴, 그리고 마사의 손자녀들인 넬리 커스티스(Nelly Custis, 오른쪽)와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George Washington Parke Custis, 왼쪽)를 형상하고 있다. 마사의 손자인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는 훗날 알링턴 국립묘지 내 알링턴 하우스(Arligton House)를 지어 워싱턴을 기리는 유산을 이어갔고 그의 딸인 메리 A.R. 커스티스(Mary Anna Randolph Custis)는 남북전쟁의 또 다른 영웅 로버트 E. 리(남부군 총사령관)와 결혼하여 남북전쟁의 또 다른 연결점이 된다.

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영지 안으로 들어갔다.


주택 입구에 있는 조지 워싱턴 가족 동상: 워싱턴과 부인 마사, 그리고 손자녀들


현재의 마운트 버논은 500 에이커로서 약 60만 평의 규모라고 한다.


마운트 버논의 조감도


마운트 버논의 역사

이 농원은 1674년 영국 식민 정부가 워싱턴의 증조부인 존 워싱턴과 그의 동료들에게 포토맥 강 유역의 토지를 부여하면서 시작되었다. 1677년 존 워싱턴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로렌스(조지 워싱턴의 조부)가 아버지의 재산 5000 에이커의 땅의 지분을 물려받았다. 로렌스 워싱턴이 1698년에 사망하면서 그 재산을 딸 밀드레드에게 물려주었다. 1726년 그녀는 동생 오거스틴 워싱턴(조지 워싱턴의 아버지)에게 그 땅을 팔았다.(조지 워싱턴은 1732년 현재의 버지니아주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의 포프스 크릭에서 태어났다.)

오거스틴 워싱턴은 조지의 이복형인 장남 로렌스에게 이 토지를 물려주었고(1743년), 로렌스는 영국군의 장교로 위임받아 영국 해군 제독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 휘하에서 복무했는데 그 일을 기화로 자신의 영지이름을 버논(Vernon)이라고 지었다. 이때 조지 워싱턴은 마운트 버논을 종종 방문하였다고 한다.

1752년 7월 로렌스가 불시에 사망하고 뒤이어 2년 뒤 그의 아내마저 사망하자 조지 워싱턴이 마운트 버논의 법적 상속인이 되었다. 그는 대통령직을 떠난 후 이곳에서 은퇴생활을 하며 농장, 정원, 실험장을 운영하며 사회활동에 집중하였다.


마운트 버논의 저택


넓은 잔디밭 건너편에 마운트 버논의 저택이 나타났다. 느슨한 팔라디오 양식의 2층 목조건물이라고 하는데 멀리서 보기에도 단아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18세기의 우아함과 세련미를 보여주는 건축 보석으로 소개되는 집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기 때문에 방문 티켓을 살 때 저택 안으로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을 지정해 두고 그 시간에 줄을 서야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에게 배정된 시간이 좀 남았으므로 우리는 먼저 정원을 둘러보았다. 나는 조지 워싱턴이 정성스럽게 관리하던 정원을 관심을 가지고 둘러보았다. 조지 워싱턴이 직접 계획한 정원구조가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는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식물학자처럼 보인다.

어퍼 가든(upper garden)은 프랑스식 정원 스타일로 만들어 장미, 백합 같은 아름다운 꽃과 허브류, 무화과, 포도, 사과나무 등의 과수나무를 심어 손님맞이용 정원으로 조성하였다면 로우 가든(lower garden)은 양배추, 감자, 양파, 당근 등의 실제 식탁에 필요한 채소류와 파슬리, 민트 같은 허브와 향신료, 딸기, 스쿼시, 멜론 등의 과일을 재배하여 실용적인 정원을 만들었다. 나는 특히 그가 정원일지(garden book)까지 남겼다는 사실에 크게 감탄했다.

어퍼 정원의 아름다운 산책로 옆 벤치에 앉아 남편은 뱃줄 식사를 하고 우리는 헬렌이 만들어 온 샌드위치로 점심을 대신했다.


마침내 저택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우리 차례가 되었다. 저택 앞으로는 포토맥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거기에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어 인상적이었다. 마치 관람객들도 워싱턴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그곳에 앉아 포토맥 강을 내려다보라고 권하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포토맥 강을 바라보고 있는 마운트 버논 저택의 의자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차례로 집 안으로 들어가면 조지 워싱턴과 마사 워싱턴 부부가 거주하던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된 집 안을 둘러볼 수 있다. 방에는 워싱턴의 서재, 두 개의 식당, 서쪽 응접실, 앞쪽 응접실, 부엌, 그리고 몇몇 침실이 있었다.

18세기에 지은 집이라 방들은 좁고 나무로 만든 바닥이 삐걱거렸지만 나는 호기심으로 오래되었으나 깨끗이 정비된 저택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내부의 인테리어들은 워싱턴의 삶, 업적,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한 세심하게 선별된 전시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방마다 다른 색으로 페인트칠된 패널이 늘어서 있거나 독특한 벽지가 눈길을 끌었고 천정에는 신고전주의 스타일이라는 석고 세공으로 장식된 데커레이션이 이채로웠다.


응접실


내밀한 공간인 침실을 둘러보는 것도 흥미로웠는데 나는 침대의 길이가 짧아서 놀랐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키가 작았는지, 아니면 작은 침대에서 자는 것을 기꺼워했는지 알 수 없었다.




초록색 벽으로 칠한 다이닝 룸이 특히 아름다웠다.


초록색 벽의 다이닝 룸


가장 웅장하고 주요한 접견실은 New Room 또는 Large Dining Room이라고 불리는 2층 살롱으로, 저택의 북쪽 입면 전체를 차지하는 큰 팔라디오 창문과 훌륭한 신고전주의 대리석 벽난로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워싱턴은 공개적으로 손님을 접견했다고 한다.


접견실


워싱턴의 서재를 들여다볼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조지 워싱턴은 독서도 하고 편지도 쓰며 사회와 소통을 하였을 것이다. 18세기에는 특권층만 들어갈 수 있었을 대통령의 서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격하였지만, 생각보다 대통령의 서재는 단출하여 놀라웠다.


서재


밖으로 나오면 광활한 농지가 펼쳐진다. 과거의 8천 에이커의 부지와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지금의 500 에이커도 걸어 다니며 구경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넓었다.

우리는 조지 워싱턴과 마사 부부가 묻힌 묘지를 지나 흑인 노예의 무덤을 거쳐 포토맥 강가의 부두로 갔다. 강물이 고요히 반짝이고 있었다. 마운트 버논 앞을 흐르는 저 강물은 이 저택의 영화를 말없이 지켜보았을 것이다. 역사는 흐르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포토맥 강의 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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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에서 18세기 플랜테이션 부지를 돌아보다 보면 워싱턴이 살던 시대에서 나타난 듯 그 시대의 복장을 갖춰 밀알을 키질하고 쟁기로 땅을 일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16면체 헛간에서 말들이 발로 밟아 밀을 타작하는 모습을 구경해 보고 대장간을 방문해 보거나 아름다운 숲 길에 앉아 잠시 쉬는 것도 좋았다. 고요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헛간

조지 워싱턴과 노예문제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많은 노예를 이용하여 농장을 운영하였으므로 그는 자주 노예제도를 운영한 대농장주로 비난받는다. 그는 국민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2 연임 대통령으로 그의 직무를 끝마치고 이곳 마운트 버논에 돌아와서 농사를 지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전성기에 마운트 버넌은 8,000 에이커의 대농원이었고 워싱턴은 이곳을 5개의 농장들로 나누어 농사를 지었다.

그의 농장은 자급자족을 추구했기 때문에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그도 다른 대농장주들처럼 흑인 노예들을 써서 마운트 버논을 자급 자족할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었다. 워싱턴의 사망 당시 노예는 316명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워싱턴은 그의 말년에 노예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갖게 되면서 유언장에 자신의 사후에 노예들을 해방하라고 명시하였다. 이는 당대 주요 지도자 중 보기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고 한다. 1799년 워싱턴이 죽고 1801년 1월 워싱턴의 노예들은 해방되었다.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어 일을 하기에 부적합한 노예들은 사유지에 남았다.

조지 워싱턴의 묘비의 남쪽에 워싱턴 가족을 위하여 일 한 노예들과 자유 흑인들을 위한 묘지가 있다. 1983년 마운트 버논 여성협회에서 이곳에 기념비를 세운 것을 보면 그들도 이곳의 노예문제에 대해 염려를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노예들의 무덤


마운트 버논에서 워싱턴 D.C.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도시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이다. 우리는 워싱턴 D.C.로 돌아가는 도중 알렉산드리아에 들렀다. 이곳에서 포토맥 강을 따라 마운트 버논으로 가는 유람선이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올드 타운은 식민지시대의 풍광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곳에 워싱턴 타워가 서 있다. 워싱턴을 기념하는 여러 가지 유물 및 동상이 있는 곳이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마운트 버논에서 알렉산드리아, 조지 워싱턴 D.C. 까지 전체적으로 워싱턴 대통령을 기념하는 지역인 듯 느껴졌다.

알렉산드리아 올드타운의 거리는 너무 멋스러웠다. 길가의 식당과 카페는 말없이 사람을 유혹하였다. 이곳에서 천천히 시간을 보내고 싶은 유혹을 강력하게 받았다.


알렉산드리아 시청 광장: 분수가 시원하게 품어져 나온다.


알렉산드리아 올드 타운의 거리


그런데 이 알렉산드리아에는 1828~36까지 카운티에서 가장 큰 노예시장이 섰다고 한다. 1830년대까지 매년 미시시피와 뉴올리언스에서 1천 명 이상의 노예를 이곳으로 보내 거래를 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노예무역은 버지니아주를 친노예주로 만들었다.

거기에 비하면 워싱턴 대통령이 18세기말, 자신의 노예들을 해방시킬 준비를 한 것은 결코 늦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노예문제가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났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865년 남북전쟁 종료와 함께 노예제도는 폐지되었다.


조지 워싱턴 사후의 마운트 버논

조지 워싱턴은 1799년 사망하였다. 12월 12일의 추운 날씨에 말을 타고 마운트 버논을 둘러본 후 젖은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지낸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튿날 인후통이 시작되었고 14일에는 기도가 부어올라 숨을 쉬기 어려운 상태로 진행되었고 결국 그는 그날 6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오늘날 그의 병인은 급성후두염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미국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전국적으로 애도의 물결이 넘쳤다. 그는 마운트 버논에 묻혔다. 그의 아내 마사는 1802년 사망하여 워싱턴 곁에 묻혔다.


마운트 버논에 있는 워싱턴과 마사 부부의 묘소


워싱턴의 사망 후 이곳을 상속한 유족들은 수입이 부족하여 저택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저택은 점차 쇠퇴해 갔다. 존 오거스틴 워싱턴은 1848년 버지니아주와 미 정부에 저택과 사유지를 판매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시도는 실패하였다.

1853년 마운트 버논의 훼손 상태에 위기감을 느낀 여성들이 보존 운동을 시작하였고 1858년 비영리단체인 마운트 버논 여성협회(Mount Vernon Ladies' Association)가 이 부지를 매입하고 저택을 인수하여 복원을 시작하였다. 마운트 버논은 현재도 마운트 버논 여성협회가 신탁으로 소유 및 관리하고 있으며, 어떤 기금도 받지 않은 채 티켓 판매와 기부를 통해 365일 문을 열고 교육과 보존 사업을 행하고 있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마운트 버논은 1960년에 미국 국립역사기념물(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고 행정적으로 미국 국립사적지(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에 등재되었다. 현재 이곳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역사적인 저택으로 자리매김하며 매년 백만 명이 넘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마운트 버논을 방문한 나의 소감 한마디:

존경할 대통령을 갖고 있는 미국이 부러웠다.


우리는 존경할만한 대통령을 진정 갖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결코 아무도 존경하지 못하는 강퍅한 마음을 가진 것인지!

그 주제가 못내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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