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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의 여로

가을의 은행 가로수길을 걸으며

by 보현


집 앞 가로수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나뭇잎들이 고운 노란색을 띠면서 세상이 마치 불을 밝힌 듯 환하다. 흰 종이에 노란 물감을 풀면 가을 색이 될 것만 같은 요즈음이다.


이맘때면 은행잎이 만드는 황금빛 세상이 아쉬워 은행 가로수길을 한없이 걷게 된다. 은행나무는 곧 떨어뜨릴 잎들을 왜 이렇게 곱게 단장하는지 의아하게 생각된다. 한 점의 녹색도 남기지 않고 노란색으로 물들이고서야 나무와 작별을 고하는 은행나무잎이 사연 많은 여인같이 여겨져 괜히 마음이 짠하다. 나뭇잎은 완전히 노란빛이 되어서야 나무에게 작별을 고하고 제 갈 길을 간다. 마침내 운명을 받아들인 듯.

그래서 이즈음의 은행 가로수 길을 걸으면 처연한 마음이 든다. 은행잎의 신선한 내음과 가을이 주는 쓸쓸함이 묘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은행잎 단풍은 마치 가을의 쓸쓸함을 화려한 빛 속에서 잠시나마 잊으라고 나를 위로하는 듯도 하다.

올해는 가을에 비가 많이 온 탓인지 가로의 은행잎 색깔이 유달리 고와 더더욱 은행잎 단풍이 풍성하면서도 애잔하다.


황금빛으로 물든 은행잎은 세상을 밝히는 빛처럼도 보인다. 범부인 내 눈에도 그럴진대 불교 선사들의 눈에는 더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불교에서는 은행나무가 어둠을 밝히는 부처의 지혜의 빛으로 여겼다고 한다. 은행나무의 장수하는 속성도 지혜의 영원함, 변하지 않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전해진다. 깨끗한 노란색으로 단풍이 든 은행잎의 모습은 맑은 수도자의 청정한 마음을 느끼게도 한다. 그래서인지 사찰 주변에 유달리 은행나무가 많다.


은행나무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의 하나로 화석나무(living fossil)로도 불린다. 무려 2억 7천만 년 전에 이 지구상에 태어났다고 알려진 나무이다. 최초의 지구를 점령한 것은 동물이 아니고 식물이었기 때문에 46억 년의 지구의 삶에서 수억 년 전에 은행나무가 지구상에 출현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도 우리와 얼굴을 대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식물 중 하나라는 점이 은행나무의 신비를 드러낸다.

은행나무의 화석은 시베리아, 유럽, 북아메리카 등지에서 발견된다고 하지만 살아있는 은행나무는 중국 저장상 안후이성 산간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불교가 성행하면서 은행나무는 성스러운 나무로 절가에 심기 시작하였고, 불교의 전래와 함께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도 사찰, 신사, 신궁 등에 은행나무를 많이 심은듯하다. 가을에 노랗게 물이 드는 이 나무가 일본인들의 정서를 자극한 듯 동경의 이초우(イチョウ) 길이 단풍길로 유명하며 동경의 상징나무가 바로 은행나무(銀杏)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은 이 은행나무를 이초우, 긴난(ぎんなん), 긴쿄라고도 불렀다.


유럽인 중에서 동양의 은행나무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은 독일인 의사 앵겔베르트 캠퍼(Engelbert Kaempfer 1651-1716)였다. 콜럼버스의 신세계 발견 후 유럽에 몰아친 신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부응하여 캠퍼도 낯선 곳으로 가 보고 싶어 했다. 캠퍼는 1683년부터 1695년의 12년간 러시아, 페르시아, 인디아, 동남아시아, 일본 등을 여행하였다. 그가 세계여행을 하는 방식은 당시 세계를 상대로 무역을 하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를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의사 자격으로 VOC에 합류하게 된 그는 1690년,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2년간 일본에 머물렀던 그는 지역 식물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연구하였는데 특히 일본 절과 정원에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를 보고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


1695년 고향으로 귀국한 그는, 그의 여행과 관련된 2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그중 1712년에 출간된 <Amoenitatum exoticarum> 내의 ‘일본 식물들(Flora Japonica)’ 편에서 그가 일본에서 관찰한 식물들에 관해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은행과 동백을 위시하여 동양 23종의 식물을 소개하였다. 특히 은행나무를 진귀하게 생각한 그는 은행알을 유럽으로 가져가 Utrecht 식물원에 심었다.

그런데 캠퍼는 일본인들이 부르던 원래 은행의 일본어(긴쿄 Ginkyo)를 라틴 알파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Ginkgo라고 적었다.

당시 세계 각지의 식물표본들이 유럽으로 몰려오자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스웨덴의 박물학자인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였다. 린네는 캠퍼가 소개한 일본 식물들을 등록하였는데 은행의 학명을 캠퍼의 오기를 그대로 받아들여 Ginkgo biloba L.로 표기하였다. biloba란 ‘두 갈래로 갈라진 잎’이라는 뜻으로서 린네가 은행잎 모양을 보고 붙인 이름이었다.

캠퍼의 기록에 흥미를 가진 서양 학자들이 중국과 일본에서 은행나무 종자와 묘목을 유럽으로 가지고 갔다. 은행나무는 유럽 귀족 정원과 왕국 정원에서 이국적인 동양의 나무로 인기를 끌었다. 이것이 현대 은행나무의 전파경로이다.


에제키엘 예언서에 의하면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가의 온갖 과일나무를 자라게 하고, 이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고 하였다(46: 12).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 은행 나뭇잎에 약이 되는 성분이 없을 리 없다.

은행나무를 보면 내 머릿속에는 ‘징코 빌로바 추출물’이라는 용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식물의 생리기능성을 표방하는 책치고 징코 빌로바 추출물의 효능을 기술하지 않은 책이 드물 정도이다. ‘징코 빌로바 추출물’은 그냥 은행잎을 우려낸 물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나뭇잎 추출물이 혈액순환을 원활히 함으로써 동맥경화를 예방하고 기억력을 증진시키며, 노화를 방지한다는 연구 자료가 산처럼 쌓여있다.


올해 주변의 은행잎 단풍이 너무 고와 용문사의 은행나무가 궁금해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다는 그 은행나무의 현재가 궁금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양평 나들이에 나섰다.

그런데 용문사 가까이 갈수록 가로를 장식하고 있는 은행나무들의 초라한 모습이 의아함을 더하였다. 과거 어느 해 가을에 보았던 아름다운 은행나무길이 아니었다. 나무들은 병이 들었는지 말라버렸고 대부분은 가지를 잘라내어 흉한 몰골이 된 채 서있었다. 충격적이었다.

용문사의 은행나무가 걱정되어 가슴 졸이며 은행나무로 향했다. 아! 그런데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무려 1,100여 년의 세월을 견디고 여전히 당당히 서있는 그 모습이 반갑고 고마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이 은행나무는 마치 지구를 받치고 선 아틀라스(Atlas) 같았다.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


나는 용문사의 은행나무를 올려다보며 은행의 긴 여정을 생각했다. 중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자라던 은행나무가 중국의 절과 사당과 궁궐을 지키다가 우리나라의 절과 향교와 궁궐 주변으로 왔다가 지금은 내 주변의 가로수로 번성하고 있다. 캠퍼가 처음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면서 느낀 경외감을 나도 새삼 느껴보려고 하였다. <은행나무 침대>라는 영화가 아니라도 내 곁에서 황금빛 세상을 연출하고 있는 저 은행나무가 사실은 엄청난 비밀을 품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지금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걷는다. 발아래 밟히는 은행잎의 매끄러운 촉감과 환한 노란빛과 싱싱한 나뭇잎 냄새를 맡아본다. 가을에 은행나무가 있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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