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이런 막장 섬까지 오게 된 이유는 마침 백수였고 절친인 헌터 회계사가 좋은 자리를 깔아 준 것도 크지만 그것보다 내 안에서 설명하지 못한 충동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 충동이 어떤 모습인지는 정신분석을 받아야만 보일 것이다.
10년 넘게 살아서 이제는 진짜 내 고향이 되어버린 시드니 삶을 하루아침에 영화처럼 버리고 외국이나 다름없는 크리스마스 섬에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두 번째 이민 결정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잠 못 드는 밤을 여러 날 보낸 후에도 하루에도 수십 번 계약서를 파기하고 친구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는 말을 속으로 연습하곤 했다.
내가 시드니 생활을 정리하는 문제로 시름이 깊어지자 찾게 된 것은 신神도 아니요 목사인 아버지도 아니고 결국 정신분석가였다. 그 당시에 나는 백수지만 아버지가 내 이름으로 은닉한 부동산이 세 채나 있는 young-rich로 돈이랑 시간마저 풍족하였기에 한 시간 세션에 15만 원이나 하는 정신분석을별부담 없이 시작했다.
정신분석이라는 실천은 미래를 예측하는 신명한 결과를 주지는 않지만 내가 왜 섬에 가려는 충동이 있는지 그러면서도 반대로 그 상황에서 도망치려고 고민하는지, 갈팡 질팡 하는 것에 대한 원인, 결정 장애로 보이는 MBTI 식 자가 진단 말고 내 무의식 안에 있는 진정한 원인을 찾아 주리라 기대했다.
대부분 정신분석은 '자유연상'이라고 하여 내담자 (환자)가 혼자 주야장천 떠들고 분석가는 마치 회장님 비서처럼 조용히 옆에서 듣는 시간이 대부분인데 정신분석을 하는 주체가 내담자이기 때문이다. 대신 분석가는 내가 열심히 떠드는 그 언어 속에서 무의식으로 보이는 것이나 감춰져 있던 증상 원인 따위가 잠깐씩 잉어 등판처럼 수면 위로 올라올 때 얼른 잡아주는 일을 했다. 나로서는 분석가가 아니면 그냥 혼잣말로 스치고 지났을 그 찰나를 멈추게 하고 잘라내는 일을 그가 해주는 것이다.
시드니 생활을 정리하기 전에 다섯 번 정도 고국에 있는 분석가에게 줌으로 분석을 받았는데 그 당시 내가 지껄이던 자유 연상 내용은 시드니 생활을 접고 섬으로 가는 일에 대한 고민이었다.
“지금 이 일을 계속 진행해야 할지 접어야 할지 하루에도 냉탕 온탕입니다. 말이 같은 호주지 어지간한 외국보다 멀리 떨어진 섬입니다. 완전히 자리 잡은 제 시드니 생활을 다 정리하고 두 번째 이민을 간다는 이 결정이 과연 옳은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기 남아 있어 봐야 이제 교수 일은 하지도 못하는 상황이고, 학교로 돌아갈 모든 길이 막혔으니 뭘 해야 할까요? 갈빗집? 홈청소? 시드니 미래는 이렇게 암울하기만 하네요. 그래서 섬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막상 간다고 생각하면 식은땀이 날 정도로 불안해집니다. 지금이라도 무리해서 올스탑 할 수 있기는 해요. 요즘 이렇게 스트레스가 극심하니 분석가님이랑 인터뷰하면서 하소연하는 것이 유일한 해소법이에요. 이렇게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진짜 어디 풀 데가 없네요. 미쳐 버리겠어요. 왁!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답답한 순간이 자주 와요. 그러다 보니 공격성이랑 성욕도 치고 올라와 사창가라도 가볼까, 지나가는 만만한 놈 시비나 걸어 볼까도 싶고요. 얼마나 더 분석을 받아야 이런 불안한 정신 상태가 좋아지죠?”
“드림 교수님, 프로이트 선생님 분석 case 중에 환자가 인생에서 중대사를 결정할 일이 있다면 분석이 끝날 때까지 결정을 미루도록 권한 바 있습니다.”
“그런가요? 결국 지금 이 분석을 더 열심히 받으라는 말이잖아요! 얼마나 분석을 더 받아야 현명해지고 글도 더 깊이 있고 멋지게 써질까요? 저는 당장 답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없다고요!”
“지금 교수님이 고민된다고 하시는 이유는 아무래도 지금 그 결정이 충분한 분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기 보단 충동에 따라 내려진 결정이라는 의미라고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날 해고 시킨 학교에 대한 복수심, 상황을 이렇게 만든 내 섹스 파트너 학생들! 그래요. 홧김에 이 생활을 모두 버리고 싶은 욕망이 타올라요! 실제론 이것이 시드니를 떠나서 그런 섬에 처박히고 싶은 진짜 이유이고 나중에 남들에게 보여줄 명분을 찾아서 넣고 있습니다.”
“어쩌면 분석에 대해서도 유사한 갈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하게 되고요.”
“어떤 갈등을 말씀하시는 거죠?”
“교수님 스스로 분석을 그만 끝내고 싶은 욕망이나 분석 시에 발생하는 저항이 버거워서 그만 저를 떠나고 싶은 욕망을 말씀드린 것이고요. 다시 시드니를 떠나는 문제로 가면, 그 결정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 어떤 문제랑 관련해서 갈등이 발생할 때는 충분히 분석이 되고 나서 행해져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볼 때 이번 일은 속도를 조금 늦추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렇게 시드니를 떠나는 문제에 대한 근원을 분석을 통해 찾았지만 불연 이것도 때려치우고 싶은 울화가 끓어올랐다. 한국에 앉아서 분석이나 한다는 백면서생이 호주 이민자 삶을 무슨 수로 알겠나?그러다 꿈을 꾼다. 그 안에서나는 섬으로 떠나는 모습이고 그 섬은 아주 초라하며 고생스럽기 짝이 없고 너무도 궁색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원희 - 최연소 항공사 모델, 스포츠조선
어려서 본 동화 책에서 꿈은 반대라고 배추 도사가 했던 말이 생각나 분석가 조언 따위는 고양이나 줘버리고 나는 짐을 싼다. 그렇게 힘들게받던 분석도 함께 때려치워 버린 나는그길로 시드니 생활을 접고 섬으로 들어가는 일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런 성급한 행동으로 10년간 쌓아 올린 시드니 생활이랑 그토록 받기를 원했던 정신분석 모두 순식간에정리해 버렸다.
나는 사소한 결정을 내릴 때는 아주 신중을 기하고 정말 죽고 사는 문제는 그냥 저질러 버리는 경향이 있다. 가령 10만 원짜리 가방을 하나 살 때면 점원을 아주 난처하게 만들다 못해 다른 색은 없냐, 디자인이 요기가 살짝 아쉽다 하면서 초주검을 만들어 버리거나 다음 날이면 기억도 안 날 야동 하나를 리스트에서 고를 때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편이다.
반면 평생에 한 번 있을 집 사는 일이나 사무실 공간을 계약할 때는 이런 알수 없는 감정이나 이 일하곤 별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욕구 혹은 은행 창구 여직원 다리가 너무 예뻐서 5억짜리 서류에 도장을 찍는 식이다. 지금 내가 딱 그렇다.
꼴랑 대 여섯 번 분석을 받다 보니 분석가에게 다 이야기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곽사장이라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특이하고 이민자 사회에 어떤 전설 같은 일화를 남겼는지를 떠올려 보면 나는 이상하게 그 사람에게 끌렸다.
분석가에게 첫날부터 길게 이야기할 정도로 강력한 마력은 아니라지만 분명 끌림은 있었다. 15톤 트럭이 움직임에 작은 자석이 주는 자력이 기껏해야 얼마나 영향을 주겠냐고 하겠지만 그 미미한 힘도 끊이지 않고 24시간 작용하면 완전히 무시할 원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내가 그 섬에 간 알지 못할 이유, 끌림 중에 하나는 곽사장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이번에는 돈벌이 측면에서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하나 있다. 왜 카지노는 날 고용하는가? 내가 아무리 호주 대학 교수이며 호주 상담사라지만 나는 성인이 되어서 호주에 이민온 노동자로 호주에서 초등 교육부터 받은 사람이 아니다. 해병대 제대하고 김치냄새 풀풀 풍기는 영어로, 꼴랑 내 전공 분야를 빼고는, 맥도날드에서 모짜렐라 치즈를 버거에 추가하는 일도 버거운 인간이다.
우울한 심경에 자해하는 말이 아니고 상담이라는 것은 문화를 기반으로 모국어를 통해서 담화가 이루어져야 그 효과를 극대로 누릴 수 있기에 호주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도 영어도 형편없는 상담사에게 와서 자기 치부를 드러내고 상담을 받을 호주 사람이란 있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카지노에서 돈이 아무리 썩어난다 할지라도 이런 나를 호주 주민이나 직원들 심리를 안정시킬 상담사로 고용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된다. 더구나 그 당시 6만 불이면 상담사 연봉으로는 절대 나쁘지 않은 액수라 능숙한 호주 상담사를 구해도 가능할 조건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나를?
지나고 보니 원인은 회사에서 나에게 잘못 내린 어처구니 없는 결정이었다. 세상에 중대사를 함부로 결정 내리는 이는 나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금만 이치를 따져보면 나를 고용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카지노라는 세계관에 진짜 실력자는 소유주인 곽사장도 실무 총책이라는 호주 GM도 아니었다. 바로 곽사장 사모였다.
나중에나 직접 만날 수 있던 곽사장 사모가 나에 대해 뭘 알고 '보이지 않는 손'을 썼느냐고? 바로 한 때 인기 몰이 좀 했던 내 유튜브 강의 덕이었다. 특히 만신, 무당에 대한 강의는 조횟수도 상당히 나오고 댓글도 많이 달려서 학교 측에서도 무척 자랑스러워했던 것인데 평소 이런 민속 신앙이나 제2 종교에 관심이 많던 사모가 헌터 회계사를 통해서 내 소식을 듣고 결국 그 영상까지 보게 되는데 그만 그 영상이 사모님 성감대를 마구 자극한 것이다. 이것 역시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였다.
이렇게 우리 인생은 아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사항을 엉뚱한 이유로 황당을 선택을 하면서 나아가고 세상은 이런 덜 떨어진 결정들이 모이고 뭉쳐져서 한 개인으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드라마들이 펼쳐지는 난장이 된다.
그러니 그 어떤 정확한 수식을 탑재한 AI 양자 컴퓨터도 내일 주가, 환률, 이자율 따위는 절대 맞출 수가 없다. 오히려 그가 가진 공식이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세상 이치를 맞추는데서는 멀어져 간다. 똑똑하다고 깝죽거리지 마라 AI 놈들아. 우리는 이렇게 사는 인간들이다!
결국 꿈이 가끔 재수 없는 미래를 예측한다는 통계 역시 내가 불안한 상황에서 꼭 재수 없는 결정을 내려서 그 상황에 쳐들어가는 것이지 무슨 신묘한 신령 따위가 어디 할 일이 없어서 숨어서 날 지켜보다가 그런 세트장을 만들어 준다는 말인가?
여하튼 이렇게 골 때리는 인간들이, 논리라고는 쌍팔년도 군대 고깃국에 건더기만큼도 없는 대가리를 모아서 그 큰 카지노 사업을 꾸려가는 실정이었다. 나 역시 그 아사리판에 알몸으로 참전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