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마세요. 어제 늦은 시간에 커다란 게가 방문을 노크하며 인사하는 덕에 지릴 뻔했어요."
"아, 코코넷 크랩이가 교수님께 생물들을 대표로 인사드리러 왔나 봐요^^ 여기 애들은 벌레도 다 커요."
"세상에 이렇게 큰 게가 있다니 방송국 사람들은 왜 여기 안 오는지 모르겠어요. 필름에 담아 갈 신기한 것들이 지천에 널렸는데 말이죠. 이 섬에 몇 개월 살면 다큐던 영화던 뚝딱 하나 나올 텐데."
한국 직원들은 모여서 아침을 먹는다며 성희가 날 데리러 온 것인데 아무리 사심이 없다고는 하지만 아침부터 날 반겨주는 여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섬에 온 것에 후회가 가셨다. 내 방부터 식당까지는 조금 걸어야 하기에 나는 성희랑 자연스레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질 기회를 얻었다. 성희도 굳이 자진해서 나에게 온 것은 그럴 기회를 주겠다는 뜻일 테니 이 시간을 십분 활용하기로 한다.
나는 이 녀석을 내 침대로 데리고 가지 않기로 다짐했기에 건조한 이미지를 부여해야 한다. 그럼 지금부터 그런 이미지에 부합할 기표를 성희에게 덧칠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가령 외로움, 상처, 이별, 죽음, 두려움 이런 '안 서는' 기표를 계속 사용하며 미끄러져서 나감으로 아래에서 올라오는 령靈이 기운 빠지게 하는 전략으로 최종 목표는 꿈에서도 '성희'는 덤덤한 사물 표상으로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어차피 내 생각이야 누구도 알 수가 없으니 현실계에서 선을 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싶고 오히려 꿈속에서도 이렇게 억압하기 시작하면 결국에 극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말실수던 알지 못할 기행동이 튀어나오던 급발진할 위험도 있으니 차라리 상상 속에서는 마구 섹스할까도 싶지만 이번에는 상상도 막아보기로 했다. 언어라는 개념 표상을 이용해서 욕구를 다른 쪽으로 몰아가련다.
"성희 학생은 형제가 어떻게 되지요?"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저는 혼자 외동이에요."
"오, 그럼 이렇게 멀리 와서 있는 것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시겠다."
"처음에 그러셨는데 영어도 배우고 일도 하고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나고 하니까 지금은 좋아하셔요."
"나는 친하지는 않지만 남동생이 하나 있어요. 지금은 거의 연락도 없이 각자 살지만... 성희는 형제가 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나요?"
"네! 저는 오빠가 있으면 좋겠다고 매번 생각해요. 어려서부터 오빠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오우 씨.. 순간 내가 그런 오빠게 되어 줄까요? 말할 뻔했다. 대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렇게 외로움에 쩔어서 육지에서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하나 오면 적극 달라드는 모양새이다. 더구나 20대 초반 여자에게 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부장급으로 내려온 상사 이미지란 어떻겠는가? 대학에서도 짤리기 직전까지 인기가 있던 편이라 한 번 경험을 토대로 이번에는 실수 없이 이 기류를 슬기롭게 타 넘고 가리라.
시드니에서 퍼스까지 네 시간, 하루 자고 다시 퍼스에서 네 시간..
만약 육지에서 힘든 사랑에 치인 자들이 있다면 이 섬에 올지어다. 농담이 아니고 계속 슬픈 사랑이 인생에서 반복되기만 한다면 [나는 솔로]에 나가서 신상 털리고 환자들이랑 싸우지 말고 지금까지 살던 반경에서 멀리 벗어나 외국이나 어디 저기 벽오지에 가서 새롭게 시작해 보는 것도 방법이리라.
"나는 동생이랑 사이가 좋지 못하니 형제가 있다는 것이 과연 행복인가 싶지만, 외동인 친구들은 나중에 부모님 돌아가시면 세상에 정말 홀로 남게 된다는 두려움이 깊은 곳에 깔려 있다고 들은 기억이 나요."
"맞아요 교수님ㅠㅠ 특히 이 섬에 있다 보니 외롭기도 하고 그런 슬픈 생각만 자꾸 나요. 그래서 얼른 결혼이나 해버릴까? 이런 맘도 들고요. 여기 오기 전까지는 결혼 생각 일도 없었는데 요즘은 너무 갈급해요."
갈급하다... 책에서나 나오는 기표인데 구어체로는 잘 안 쓰는 단어로 교회에서 자란 나에게는 친숙한 기독교 언어였다. 슬쩍 보니 반팔 아래로 조금 보이는 기다란 문장이 파란 문신으로 보이는데 영어는 아니고 라틴어 같았다.
"팔에 쓰여있는 것은 성경 구절인가요?"
"앗, 어떻게 아셨어요? 교수님 라틴어도 하세요?"
"아뇨, 그냥 찍은 거예요. 말투가 신앙 생활하는 사람 같아서."
"네, 맞습니다. 섬에 호주 교회가 있는데 주말에 호텔일 비번이면 가끔 예배도 드리러 가요."
"오, 여기서까지 신앙생활을 이어가다니 굉장히 신실하군요!"
이때쯤 해서 우리는 식당에 왔고 대화는 대충 마무리되었다. 성희는 이렇게 해서 대략 내게는 성실하고 순박하며 건조한 기표들로 가득 버무려져 사심을 일으키지 않는 이미지로 슬슬 고착하기 시작했다. 더 지켜보아야겠지만 첫 대면으로는 성공이었다.
대화 중에 나에 대해 뭘 아는 것이 있는 듯한 느낌이라서 살살 캐보니 내가 한참 주가를 올리던 때에 강의 몇 개를 학교에서는 마케팅 차원에서 학교 유튜브 계정에 올린 모양이다. 불미스러운 일로 학교를 나오게 되면서 지금은 다 지워졌는데 그 영상이 신학, 정신분석, 무속 이런 키워드로 한 때 상위에서 검색되기도 했다.
헌터가 이런 유명인이 내 친구라고 여기 직원들에게 자랑도 한 모양인데 성희도 그 과정에서 내 강의 영상을 본듯했다. 다행인 것은 그 영상이 내려간 사유나 내 신상 변화 등은 학교 측에서도 타격을 생각해서 함구한 덕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서 헌터 정도 지인이 아니고는 몰랐다.
성희는 흔히 이야기하는 '영성이 뛰어난 자매'였는데 mz신도답게 몸에 문신도 자유롭게 하는 편이라서 기독교리에 매이기보다는 자기에게 필요한 개념 부분만 편취해서 사용하는 듯했다. 그렇다 보니 자기 안에서도 이런 모순된 교리들 사상들이 쉽게 충돌을 하는데 애써 깊이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자기가 보기에도 세상은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이런 모순 사이에도 분명 답은 있을 텐데 자신이 게을러서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 나이 때 그랬지만 인간은 누구나 멘토 혹은 리더가 나타나서 곤궁에 빠진 자신에게 답을 주고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다. 그 어떤 동물보다도 지독하게 긴 시간을 부모에게 의지하며 언어를 통해서 내 요구 사항을 전달함으로 생명을 유지했던 우리는 <언어-말씀>이랑 <신神>을 동일하게 두는 경향을 자주 본다.
성희도 세상에 대한 진지한 궁금증이 막 피어오르며 모든 것을 관통하며 설명할 수 있는 치팅키를 찾는 때이니 내가 조금만 손을 뻗어서 정신분석에 대해 어쩌고 떠들며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자주 만나서 이야기하자면 바로 그러자고 맞아 칠 느낌이라 일부러 유튜브 강의 영상이나 그 아이가 혹할 만한 개념을 꺼내는 대화는 극도로 피했다.
결국 나는 성희를 내가 원하는 기억으로 내 무의식에 저장했다.
식당에 들어가니 헌터는 다른 직원들이랑 벌써 와서 기다리다가 내가 들어오자 무슨 애인 보듯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망울로 나를 부른다. 뷔페 식으로 차려진 아침인데 물자가 귀한 섬에서 매일 이렇게 풍족하게 먹는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카지노가 돈을 얼마나 버는지 재무제표를 열어보지 않아도 매출액이 보이는 듯했다.
아침을 먹고 헌터가 일하는 사무실 동으로 갔다. 아무래도 업무 하는 곳은 손님들 눈에 띄지 않으니 카지노 시설에 비해 검소하다 못해 초라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녀석은 카지노에서 곽사장 왼팔로 직원 중에는 넘버 투임에도 사무실은 어디 깡시골 농협만도 못했다. 넘버 원은 GM 총괄 매니저로 굉장히 후덕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호주 아저씨인데 업무상 나랑은 크게 엮일 것이 없고 실제로도 그랬다.
헌터는 잠시 이메일 몇 개만 확인한다고 일을 보는데 나는 그 좁은 사무실 옆 의자에 앉아서 '천천히 해'라고 말하며 그곳 종이 향기를 맡고 있었다. 나는 직원이긴 하지만 책 상에 종일 앉아서 일하는 포지션은 아니라 더 단출한 책상이 하나 주어 졌다.
우선 내가 할 일은 카지노 전 직원 정신 건강 확인이었다. 정신과 의사가 아니니 진단은 할 수 없지만 개별 상담을 통해서 업무 스트레스나 이상 징후가 있으면 육지에 있는 관련 병원에 보고 하는 정도였고 본인이 원하면 개별 상담을 더 이어가면서 문제 원인이나 지금 당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을 얄팍하게 같이 찾아보는 정도였다.
사실 상담학이 전공이 아니라서 헌터가 처음 이 업무를 제시했을 때는 부적절하다 거절했지만 신학 과정에서도 신학 상담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별도로 상담학을 공부해서 호주 자격증도 있기는 했다. 다만 상담학이 내 갈길은 아니라 판단하여 대략 그렇게 공부만 마치고 임상은 많이 쌓지 못해서 그랬는데 학교에서 짤리고 시간이 생겼을 때 미루던 정신분석을 몇 세션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섬은 너무 오지라 그 어떤 상담가나 분석가 정신과 의사가 온전히 거주할 수 없는 환경으로 아예 이런 서비스가 빵이라 선무당이라도 자네가 오면 아예 없는 것보다 도움이 된다고 말한 것에 수긍했다. 내가 치료를 하거나 증상을 호전시킬 능력은 없다지만 그래도 정규 교육도 받고 이쪽에 관심도 있으니 코코넛 크랩을 보며 한탄하는 것보다는 나에게 털어놓는 것이 나을 것이다.
드라마 D.P. 에서 헌병 중사가 열받으면 하던 지압 갈고리
이쪽 공부를 맛을 보니 상담을 기반으로 하는 임상 심리나 정신분석 정신과 면담 등은 마사지랑 비슷한 부분이 있다. 누군가 심하게 근육통이 생기거나 뭉치면 혼자서 주물러서 낫게 한다는 것은 한계도 명확하지만 손이 닿을 수 없는 위치라면 아예 불가능하다. 나무나 벽에 대고 비비는 것도 효과란 그때뿐이고.
누군가 마사지를 해준다면 시원한데 처참한 부상이 아니라면 고사리같은 어린 아이 손으로 조물 조물 해도 시원하긴 하다. 나아가서 해부학에 정통한 물리치료사나 임상 경험이 풍부한 재활치료 전문 의사가 마사지를 해주면 엄청난 속도로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부모님이나 군대 고참 마사지를 해본 것처럼 종종 우리는 친구나 가족들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사 일을 한다. 문제는 무의식에 대한 깊이나 정확한 상담 기법 훈련 따위가 부족하기에 '들어준다'는 행위 말고는 건질 것이 전혀 없다. 더 큰 문제는 가슴이 답답하다고 찾아온 내담자가 알고 보니 단순 스트레스 증상이 아니라 심장 혈관이 막혀 있는 육체 질환이라면 절대 상담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을 뿐더러 잘못 하다가는 치료해야하는 골든 타임을 지나쳐 병을 키운다.
정신분석도 다양한 기법이 있고 심지어 무의식을 언어 구조라고 생각하지 않는 융 학파에서도 실시하는데 차이가 있다면 언젠가는 내 무의식이 분석은 되겠지만 잘못된 방식이니 시간이 오래 걸리며 결과도 제대로 된 방식이랑 꼭 같이 나온다고 확신할 수 없다. 여하튼 나는 이 섬에 사이비이긴 하지만 신학 교수이며 상담학 자격증이 있고 정신분석을 조금 읊는다는 스펙으로 취업해 흘러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