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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Hunter Oct 22. 2024

초자아 타령

시나리오 속 초자아

집안 사정으로 2년 넘게 섹스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이제 40대 중반을 넘어가니 무리하게 운동을 하면 그 여파로 성욕이 사그라 집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성욕은 성욕이요 운동은 운동이라 괴로웠으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예 생각조차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득문득 오래전 침대에서 추억을 떠올리거나 야동본 장면이 삶에서 비슷한 상황만 연출되면 눈앞에 환영처럼 스치고 지나갑니다. 하지만 그런 욕구가 상상 속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사그라든다는 것은 나 역시 초자아에게 지배를 받은 평범한 신경증자라는 반증입니다.


종교를 가졌을 때 내 초자아는 말도 하고 훌륭한 인격도 갖춘 모습으로 신이 되어 내 속에 살았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무신론자가 되었음에도 그 초자아는 형태만 없을 뿐 그대로 내 안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명령을 하거나 내 삶을 지켜보는 식으로 태클을 걸고 있습니다. 양심, 법, 예의 이런 것들이죠.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보고 있다 (새번역 이사야 49:16)


인간은 뛸 수 있고 의사표현을 하는 수준까지 도달하는데 10년은 족히 걸립니다. 이렇게 나약하고 천천히 자라는 동물은 지구상에 없습니다. 이건 최소 기준치이고 적어도 20대는 넘어야 정신이나 신체가 독립할 준비를 갖춥니다. 다른 짐승이라면 벌써 죽었을 서른까지도 부모 아래서 사는 사람도 흔하게 보고요.


양보하여 성장 기간을 최소 10년만 잡아도 그동안은 부모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언어를 통해 보호자에게 전달해야 하니 부모가 쓰는 언어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아쉬운 놈이 우물을 파야겠지요.


가끔 부모가 아이 옹알이를 귀엽다고 흉내 내는 경우는 있지만 그 기표를 우리 언어 체계에 편입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려서 포크레인 장난감을 좋아했는데 그걸 "곤노"라고 불렀답니다. 내가 왜 포크레인을 곤노라고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엄마는 그게 귀여웠다며 가끔 그때를 회상할 때 사용하는 기표 정도로 씁니다.


만약 우리 어머니가 국정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비선 실세라고 하더라도 아들을 위해 국립 국어원에 곤노를 등록시킬 수는 없습니다. 개인이 가진 빠롤 (곤노)이 사회가 인정하는 랑그 (포크레인)가 되는 과정은 오랜 시간이랑 많은 노력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이 공감할 자극이 무의식에 전달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곤노를 포기하는 것이 70억 배 빠릅니다.




다시 초자아로 넘어옵니다. 우리는 이렇게 내가 만든 언어를 버리고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용어를 받아들이면서 심한 저항을 일으킵니다. 곤노를 버리고 싶지 않은 아이 심경을 헤아려 보십시오. 하지만 버려야 합니다. 엄마라는 사람은 계속해서 포크레인을 강조합니다. 아이는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공용어/랑그를 받아들이는데 그 과정에서 엄마에게 거역할 수 없는 권위를 느끼게 됩니다. 그럼 엄마는 대타자로 인식되며 원던 원치 않던 법관이 되고 신도 되며 이렇게 초자아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즉, 언어를 배운 인간은 모두 초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물루스랑 레무스, 로마 건국 신화 속 쌍둥이로 늑대가 길렀다고 하죠.


사고로 야생 동물이 키운 인간 아이들은 유아기에 인간 언어를 배우지 못함으로써 성인이 된 이후에 문명에 발각되어 편입되더라도 끝내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며 나아가 지능 장애나 자폐 등 다양한 정신 질환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본 적도 없고 언어 학자도 아니지만 대략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검증해 보기 위해 보호자가 없는 영유아들을 대상으로 말은 하지 않고 영양만 공급하는 실험이 행해졌으나 결국 아이들이 사망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신생아들이 양육자 한 명에게 수십 명씩 보살핌을 받는 경우에도 심각한 언어 장애나 정신 질환을 앓게 된다는 논문도 본 기억이 납니다. 이렇듯 언어는 단순한 의사표현 도구가 아니라 우리 몸을 가동하는 운영 체계로 이것이 현저하게 낮은 버전으로 설치되거나 설치 중간에 멈추게 되면 인간 자체가 망가짐을 봅니다.


그럼 초자아가 강할수록 강력한 운영체계인가요? 글쎄요. 우리가 문명 속에 살기 위해, 가령 대학 졸업하고 이민 가서 영어 시험 만족시키고 영주권을 획득하는 절차를 거친 후에 공인 회계사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내 욕망을 누를 강력한 초자아가 필요는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짓눌린 전문직 인간들을 실제로 만나보면 어떻던가요? 섹시하던가요? TV에서 흔한 데이팅 프로그램에 나오는 전문직 노총각들 유형을 참조하시면 답이 되겠습니다.


여담인데 프로이트 선생님은 평소에 확답을 잘 안 하시나 몇 가지 공식처럼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중에 유명한 것이 평소에 톤 & 매너가 좋은 사람은 가끔 침대에서 변태인 경우가 발견되나 평소에도 이상한 새끼는 반드시 침대에서 오줌 뿌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짝 제 식으로 각색한 표현입니다).


초자아는 우리를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둡니다. 그 초자아는 24시간 날 지켜보며 양심이라는 모습으로 내 귀에 속삭입니다. 바지 올려라. 짤린다. 가끔은 눈에 인생 망가지는 환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법정에서 서있는 모습이나 사회에서 매장되는 시나리오가 펼쳐지지요.


가장 바람직한 것은 10대까지는 초자아 지배를 받으며 잘 크다가 성인이 되어서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삶을 살면서 초자아는 개나 주고 나는 주체로서 살아가는 인생이겠습니다. 이러니 우리는 각자 다른 수준에서 초자아를 품고 나보다 약한 초자아를 가진 듯한 인간을 능멸할 때 지능은 높지만 초자아가 없는 동물이랑 비교합니다. 말미잘이나 바퀴벌레처럼 아예 언어도 없고 모든 면에서 인간이랑 비교하기 힘든 대상에 빗대어 욕을 하면 임팩트가 덜 하지만 지능이 높아 초자아만 없을 듯한 동물이랑 비교하면 몹시 기분이 상합니다.


지능이 높은 개들도 초자아는 없습니다. 그들이 쓰는 언어는 단순해서 몇 개월이면 다 배우고 엄마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저는 초자아랑 싸우고 있습니다. 더 야하게 쓰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시스템 검열에 걸리거나 독자라는 탈을 쓴 또 다른 초자아들이 이 글을 읽고 눈살을 찌푸리며 좋아요를 생략할까 걱정이 들어 교묘하게 선을 타며 쓰는 중입니다.


성욕은 이렇게 저에게 늘 족쇠입니다. 욕망이 없으니 검열할 필요도 없는 AI는 좋겠습니다. 그놈은 지금 내가 겪는 이런 고민 없이도 멋진 글을 술술 쓸 테니까요. 서른 전까지는 어리다는 이유나 사회에 정착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섹스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한 지금은 다시 성욕을 품는 것이 죄가 되었으니 제 인생에서 마음껏 성욕을 발현할 수 있던 시간은 공인 회계사 시험이 끝나고 호주 대기업에서 세무 팀장하던 30대 중반 꼴랑 몇 년이 다였습니다.


그때 만났던 두 여인이 있습니다. 같이 걸으면 강남에서도 꿀릴 것이 없던 친구 하나랑 서울대 나오고 대기업 연구원이던 여친입니다. 강남 하나는 초자아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자유로운 친구였습니다. 정숙해야할 도서관 데이트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뒤적이는 내 뒤에서 교묘하게 남들에게 들키지 않는 각도로 사타구니에 손을 비비던 여인으로 기억합니다. 침대에서는 더욱 솔직하여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자기 속내를 다 토해내는 기표를 발산해서 남자를 기절하게 만드는 스타일이었고요.


반면 서울대 여친은 수녀가 울고 갈 종교인으로 3년을 사귀었지만 손 한번 잡은 것으로 연애 스토리가 끝이 납니다. 3년간 고작 손 한 번이라니요! 거칠었던 그 손보다 그나마도 혼전에는 너무 길게 잡지 말라고 강하게 뿌리치던 모진 손길이 더 아픈 상처로 남았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초자아에게 눌려서 키스도 못하고 살던 그 친구는 결국 종교인이랑 결혼하게 됩니다.


인간 수업 / 네 멋대로 해라


제 개인사는 다음에 소설 식으로 녹여서 풀어 보고요.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로 해보겠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영화랑 드라마들을 예로 들지요. 여기 뽑은 극화들은 초자아를 어떻게 해석하고 주인공들이 어떻게 초자아랑 타협하며 살아가는지에 대한 고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선 초자아가 보기에 아주 불경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나오는 [인간 수업]이랑 [네 멋대로 해라]입니다. 오지수 (김동희 분)는 고딩 포주이고 고복수 (양동근 분)는 소매치기입니다. 이 둘은 처음부터 초자아랑 대립하는 위치에서 극이 시작하며 결국은 그 삶이 전체 이야기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타협도 하는데 관객은 범법자인 주인공들에 대한 혐오보다는 그들이 처한 위치에서 오히려 응원하고 법 처벌을 잘 피해 갔으면 하는 심경으로 손에 땀을 쥐거나 함께 울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할 지점은 범죄자가 주인공이면서 메가 히트를 치려면 관객들에게 거부감을 상쇄시킬 추가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지수는 여자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며 마음속은 여린 아이 포주로 설정되었기에 비린내가 덜합니다. 고복수 역시 한때 죄를 지어 복역도 했으나 지금은 초자아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려는 노력으로 자기 욕망을 승화한다는 개과천선 캐릭터로 관객들이 용서해 주고 좋아요를 누릅니다.


D.P. 디피 / 추노


다음은 사회에서 정한 규율을 어기고 욕망에 따라 살고 싶어 하는 인간들을 잡으러 다니는 사냥꾼이야기입니다. 이런 장르에서 주의할 점은 주인공이 초자아를 너무 그대로 반영하면 꼰대가 되거나 스토리가 관객에게 큰 울림을 주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디피] 안준호 (정해인 분)는 군대에서 이등병으로 약자 중에 약자입니다. [추노] 대길이 (장혁 분)도 한때는 양반이었지만 지금은 노비 계급이랑 차이 없는 추노꾼으로 초자아가 하는 징벌 역할만 현실에서 대리할 뿐 착함이랑은 거리가 있는 캐릭터입니다.


이렇게 약점이 있는 캐릭터가 가장 빛을 발하는 장면은 이들이 자신이 맡은 업무를 할 때, 그 순간만큼은 이등병도 아니고 노비도 아닌 군탈 체포조나 추노꾼으로 현실을 사는 모습입니다. 우리 관객은 나약했던 혹은 사악해 보였던 주인공이 그런 초자아로 변신해서 악당을 징벌하는 모습에 박수를 칩니다.


오징어 게임 / 성기훈, 조상우, 프론트맨


마지막으로 [오징어 게임]입니다. 다양한 초자아가 등장합니다만 성기훈 (이정재 분)이랑 프런트맨 (이병헌 분)만 보겠습니다. 프런트맨은 저 세계관에서 법을 수호하는 자입니다. 사람을 마구 죽이는 놈이지만 그 뒤에는 항상 법이라는 명분이 있습니다. 문제는 동생을 마주하는 상황에서는 '마스크를 벗으면 죽는다'는 규정을 어기는 모습을 보였기에 초자아로서 역할을 계속할지 의심하지만요.


반면 성기훈은 욕망 가득한 동생 조상우 (박해수)를 통제하려는 초자아로 모습을 유지합니다. 그것이 오일남 회장이 말하는 인간미이거나 상우가 말하는 오지랖이랑 섞이면서 관객들은 성기훈을 거부감 싹 뺀 초자아로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생사가 걸린 중요한 시점에서 갈팡질팡하거나 예의, 인감 됨을 따지는 덕에 자칫 모두를 괴멸시킬 뻔한 아찔한 상황이 여러 번 노출되었습니다. 운이 좋아서 결과가 아름다웠을 뿐 저런 초자아를 가진 리더를 둔 조직은 실제 경쟁에서는 모두 탈락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주인공들이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성욕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젊고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오지수라도 배규리랑 섹스는 참습니다. 뛰어난 근육질 몸을 깔고 전투력을 장점으로 가진 안준호나 대길이도 이상하게 성욕은 전혀 내비치지 않습니다. 성기훈이랑 프런트맨 역시도 앞으로 배드신을 보일 것이라는 상상은 하기 힘듭니다.


아마도 폭력에 대한 욕구는 상황만 잘 설정하면 초자아나 관객들이게 용서받을 수 있고 가끔은 통쾌함도 주지만 우리 지금 다 같이 못하고 살고 있는 와중에 섹스는 모두에게 외면당합니다. 하루에도 내 안에서 올라오는 성욕이랑 폭력 욕구 빈도를 생각해 보면 알겠습니다. 지금 살해 욕구를 억제하며 이 글을 보는 작가님들이랑 성욕을 참는 분들 숫자가 감히 비교가 되겠습니까?


다들 성욕은 있지만 남이 섹스하는 꼴은 못 봅니다.


초자아가 없는 사람을 사이코패스나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런 사람이 쓴 글은 치열함도 없고 검열을 피해 가야 할 이유도 없기에 은유도 환유도 빈약하여 문학 가치도 덜 합니다. 그러니 욕구도 어린 시절도 초자아도 없는 AI가 우릴 감동시킬 글을 쓴다는 것은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입니다.


초자아가 약해지면 인생 막장으로 굴러갈 테니 이렇게 글로서 꿈에서만 그려봅시다.



모두들 사랑하며

시드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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