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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초보’를 인정할 때 비로소 열리는 새로운 삶

by 최환규

직장인은 인생이라는 거대한 도서관에서 자신만의 ‘전공 서적’을 수십 년간 탐독하며 살아왔다. 바로 ‘직무’라는 책이다. 퇴직자는 그 분야의 전문가이자 베테랑으로, 복잡한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하고,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며, 많은 동료와 후배들을 이끄는 ‘업무의 달인’이었다. 사회는 퇴직자의 뛰어난 업무 지능에 찬사를 보냈고, 퇴직자는 그 속에서 자신의 가치와 존재 의미를 확인했다.


그러나 ‘퇴직’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하는 순간, 그 전공 서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과거의 책’이 되었다. 그리고 퇴직자는 난생처음 접하는 ‘생활’이라는 초등학교 교과서 앞에 선 ‘초보 학습자’가 된다. 지난 수십 년간 축적해 온 고도의 업무 지능이 퇴직 후의 일상에서는 예상치 못한 허점과 부족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업무에서는 전문가’였던 자신이 ‘일상에서는 초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지만,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퇴직 후 평온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한 필수적인 첫걸음이다.


업무 지능 vs. 생활 지능, 무엇이 다른가?


퇴직자는 직장이라는 환경에 최적화된 ‘업무 지능’을 갈고닦아왔다. 업무 지능은 효율성, 목표 달성, 문제 해결 능력, 논리적 사고, 위계질서 내의 통제나 지시 등 ‘성과’와 ‘결과’에 중점을 둔다. 정해진 틀 안에서 최적의 해답을 찾아내는 데 능숙하다.


반면, 퇴직 후의 ‘일상생활’은 업무 지능과는 전혀 다른 지능을 요구한다. 바로 ‘생활 지능’이다. 생활 지능은 다른 사람의 감정 이해(공감),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유연한 대처, 갈등 조율, 자기 돌봄과 물질적 성과 외의 소소한 즐거움과 관계에서 오는 만족감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 등 ‘관계’와 ‘과정’에 중점을 둔다. 정답이 없거나 모호한 상황에서 균형과 조화를 찾는 능력이다.


퇴직자가 일상생활 적응에 어려워하는 이유는 직장생활 내내 업무 지능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업무 지능이 강조되면서 생활 지능은 등한시되거나 퇴화한 채 퇴직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오랜 기간 ‘업무 지능 향상’에만 노력했던 퇴직자가 ‘생활 지능’의 부재를 경험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이유로 퇴직 후 퇴직자가 겪을 수 있는 사례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가정에서의 불화이다. 퇴직 후 배우자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사사건건 갈등이 터져 나왔다. 배우자가 집안일이나 자녀 문제로 걱정을 토로하면 “그게 뭐가 어렵다고 호들갑이야.”, “그냥 업체 담당자를 불러”와 같은 ‘문제 해결’에만 초점을 맞춘 대화를 한다. 배우자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퇴직자의 ‘공감’이었지만, 평생 업무 지능만 써온 퇴직자는 배우자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면 배우자는 ‘이 사람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라고 생각해 대화를 포기하고, 퇴직자도 자신과 더는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배우자를 보면서 화를 낸다. 이것은 ‘상대와의 관계’라는 생활 지능의 영역에서 ‘성과’라는 업무 지능이 충돌한 결과이다.


둘째, 새로운 공동체에서의 소외이다. 퇴직 후 건강 관리를 위해 배드민턴 동호회와 같은 커뮤니티에 가입하는 퇴직자가 많다. 퇴직자는 동호회 운영 방식을 지켜보면서 운영 방식에 문제가 있어 필요하다고 비판하면서 자기 나름의 방식을 일방적으로 지시한다. 퇴직자의 지적에 대해 기존 회원들은 불편함을 느끼며 점차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순수하게 운동을 즐기고 친목을 도모하려는 동호회에서 퇴직자의 ‘업무 처리 방식’은 어색하고 위화감을 주기 때문이다. 퇴직자는 기존 회원들의 거리 두기에 대해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다들 나를 피하는가?’라며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동호회라는 ‘비공식적 관계’에서 ‘성과 지향적 업무 지능’이 부적절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셋째, 자기 돌봄의 실패이다. 젊은 시절부터 몸이 허락하는 한 밤샘 근무도 마다하지 않은 퇴직자도 있다. 바쁜 업무로 인해 식사는 구내식당에서 빨리 해결하거나 햄버거로 때우기도 했다. 이런 식생활로 인해 건강검진에서 혈압과 당뇨가 높다는 진단을 받자 ‘체계적인 건강 관리’에 돌입했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효과 높은 다이어트 식단’을 검색해 식재료를 대량 구매하고, 헬스장에 등록해 ‘몸짱 할아버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의사로부터 ‘꾸준함과 즐거움이 중요하다’라는 조언은 ‘잔소리’로 치부했다.

운동을 시작한 지 며칠 만에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은 높은 강도의 운동으로 인해 몸에 무리가 왔고, 특정 식단에만 갇히자 금세 질려버렸다. 단기적인 목표 달성에만 익숙한 업무 지능은 장기적인 습관 형성이라는 생활 지능의 영역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결국, 건강 관리는 작심삼일로 끝나고, ‘몸도 이제 내 마음대로 안 된다’라며 의욕을 잃었다. 이 퇴직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꾸준하고 즐거운 운동’이나 ‘몸에 맞는 식단’을 찾는 심리적 유연성과 자기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섬세한 생활 지능이 부족했던 것이다.

생활 초보를 인정할 때 일어나는 긍정적인 변화


자신이 ‘업무 베테랑’이 아니라 ‘생활 초보’ 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생활 초보 인정은 심리적 안정감을 되찾고, 더욱더 풍요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현명하고 용기 있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퇴직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불필요한 자책을 멈추는 것이다. ‘내가 이것도 못 하다니’라는 자책감 대신 ‘원래 이 분야는 나에게 새로운 것이니, 서툰 것이 당연하다’라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런 태도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심리적 압박감을 줄여준다.

다음으로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학습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나는 전문가다’라는 과거의 자부심을 버리고, 배우자, 자녀, 심지어 손주에게도 기꺼이 배우려는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겸손으로 시작하면 새로운 학습은 뇌를 활성화하고, 성취감을 주며,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퇴직자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드러낼 때 주변 사람들은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고 마음을 열게 된다. 상대의 나이나 경험이 많든 적든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평가하는 대신 상대를 공감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맺을 때 유대감은 더욱더 단단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여전히 유능해야 한다’라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자기 존중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험은 심리적 압박감을 줄이고,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몰두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퇴직은 삶의 ‘영역’이 바뀌는 큰 사건이다. 익숙한 전장을 떠나 새로운 들판에서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는 일은 지난날의 전쟁과는 전혀 다른 지혜와 인내를 요구한다. 자신이 ‘생활 초보’ 임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 ‘베테랑’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고 비로소 자유롭게 새로운 삶을 만끽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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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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