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부장은 평생 성실하게 일했다. 직장에서는 동료들로부터 건강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큰 병치레 없이 회사생활을 해왔다. 잔병치레야 있었지만, 바쁜 업무 속에서 “그냥 피곤해서 그래”라며 넘기기 일쑤였다. 건강검진 결과도 늘 양호했기 때문에 최 부장은 자신이 건강 체질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퇴직 후 최 부장은 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행복했지만, 점차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목덜미가 늘 뻐근하고, 이유 없이 소화가 안 되며, 밤에는 잠을 설치는 날이 늘었다. 최 부장은 조용해진 집안에서 자신의 작은 기침 소리에도 신경이 쓰였고, 이전에 인지하지 못했던 통증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최 부장은 ”직장에 다닐 땐 안 이랬는데…“라며 가족과 지인에게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최 부장의 사례는 퇴직자들이 겪는 건강상의 역설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쌓여있던 스트레스 때문이다. 직장생활은 본질적으로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승진 경쟁, 업무 성과 압박, 상사와의 갈등, 고된 야근 등 다양한 스트레스 요인 속에서 우리의 몸은 생존을 위해 이를 억압하고 버텨내도록 훈련된다. 직장인은 마치 단단한 갑옷을 입고 전쟁터를 누비는 전사처럼 ‘일단 버텨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잠시 잊거나 무시한다. 이렇게 되면 몸의 교감신경은 과도하게 활성화되고, 코르티솔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끊임없이 분비되면서 이를 견뎌내야 한다.
퇴직은 이 갑옷이 벗겨지고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다. 전쟁터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몸과 마음이 이완될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억압되었던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염증 반응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몸과 마음의 방어 시스템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 마치 댐이 무너질 때 비로소 드러나는 깊은 균열처럼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통증과 질병이 갑자기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것이다. 이것은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는 멀쩡하다가 휴가를 가면 병이 나는 ‘휴가병’과 유사한 메커니즘이다.
둘째, 역할과 정체성 상실 때문이다. 직업은 단순히 돈벌이 수단이 아니다. ‘부장’이라는 직함은 그에게 ‘유능한 사람’,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주었다. 바쁜 업무는 삶의 리듬이자 목적이었고 소속감과 함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제공하는 중요한 원천이었다.
그러나 퇴직은 이러한 역할과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 앞에서 느끼는 공허함과 불안감은 극심한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한다. 심리적 불안정은 면역 체계를 약화하고 자율신경계에 교란을 가져와 두통, 소화 불량, 불면증, 만성 피로 등과 같은 다양한 신체 증상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킬 수 있다. 즉, 마음의 붕괴가 몸의 통증을 부르는 것이다.
셋째, 생활 습관의 변화와 ‘자기 돌봄’의 실패 때문이다. 직장생활은 출퇴근 시간, 회의 시간, 점심시간 등 고도로 구조화된 루틴을 제공했다. 비록 바빴지만, 이 루틴은 우리 몸의 생체 리듬을 유지하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되었다.
퇴직 후, 이 모든 규칙적인 루틴이 사라지면 많은 퇴직자가 혼란을 겪는다. 늦잠, 불규칙한 식사, 과도한 TV 시청 등 불규칙한 생활 리듬은 수면의 질을 떨어뜨리고, 신체 리듬을 교란하여 피로도를 높인다. 게다가 ‘업무 지능’에만 익숙했던 이들은 정작 자신의 몸과 마음을 섬세하게 돌보는 ‘생활 지능’을 발휘하는 데 서투르다. 스스로 건강한 식단을 짜고, 꾸준히 운동하며,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건강 관리를 ‘프로젝트’처럼 단기간에 끝내려다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자기 돌봄’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부정적 시각 때문이다.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 단절은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사람과의 연결에서 정서적 안정감을 얻는다. 고립은 심각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유발하면서 면역력 저하와 질병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
여기에 퇴직 후 자신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더해지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이 나이에 뭘…’, ‘나는 이제 끝났어’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은 행동을 위축시키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다. 이와 같은 심리적 악순환은 우울감과 불안감을 더욱 심하게 느끼게 만들어 신체 증상을 악화시키거나, 스스로 건강 관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학습된 무기력’으로 이끌 수 있다. 스스로 ‘혼자 앓는 병’을 만든 것이다.
퇴직 후 찾아오는 건강의 역설은 단순히 불운이나 나이 탓이 아니다. 지난 세월의 삶의 방식이 신체와 마음에 남긴 복합적인 흔적으로 퇴직이라는 전환점이 이를 드러내고 재구성할 기회를 준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여러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퇴직자 스스로 원인을 이해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 귀를 여는 노력이 필요하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재정립하고, 새로운 역할과 의미를 찾아 심리적 안정을 도모하며, 단절된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중요하다. ‘베테랑’이라는 최면에서 깨어나 ‘생활 초보’의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연결과 자기 돌봄을 시작할 때 퇴직 후의 삶은 비로소 진정한 건강과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