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미래를 예측하는 게 상당히 어렵다. 특히 시간과 자원을 얼마나 들여야 할지, 어떤 난관이 있을지 등을 낙관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경향을 ‘계획 오류’라고 한다. 계획 오류는 평생을 바쳐 일했던 직장을 떠나는 ‘퇴직’이라는 중요한 삶의 전환점에서 더욱 빈번하고 강력하게 나타나곤 한다.
퇴직 후 계획 오류가 발생하는 이유
직업은 단순히 생계 수단을 넘어 ‘나는 누구인가?’를 정의하는 중요한 정체성 요소이자 사회적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원천이다. 퇴직은 정체성을 하루아침에 잃게 만드는 사건이기 때문에 예상보다 훨씬 큰 상실감과 심리적 혼란을 가져온다. 쉬면 다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내면의 변화를 계획에서 배제하는 순간 미래 계획은 틀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최 부장은 퇴직 후 매일 아침 동네 뒷산을 오르고, 낮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저녁에는 동호회 활동을 하며 하루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막상 퇴직하고 나니 첫 한두 달은 좋았지만, 이후에는 왠지 모를 공허함과 ‘이러려고 퇴직을 기대했나?’ 싶은 후회가 찾아왔다. 직장 동료들과의 스몰톡, 성과를 위한 경쟁, 정해진 업무 스케줄 등 없을 땐 몰랐던 일상의 구조와 소속감이 사라지자 무엇으로 이 거대한 빈 시간을 채워야 할지 막막해진 것이다. 그의 계획은 무한한 자유 시간이 가져올 내적 방황이라는 중요한 변수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퇴직을 앞둔 많은 사람은 오랜 직장 생활의 고단함 끝에 찾아올 달콤한 휴식과 자유를 상상한다. ‘이제부터 원 없이 여행하고, 못다 한 취미 생활을 즐기며 유유자적해야지’와 같은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그림에 몰두한 채 예기치 못한 질병, 급작스러운 배우자의 건강 문제, 자녀 관련 목돈 지출 등 현실적인 난관이나 부정적인 가능성은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직장 생활은 일종의 정해진 틀이 있다. 그러나 퇴직 후 삶은 완전히 새로운 미지의 영역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환경에서 습득한 정보와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퇴직 후의 삶은 그런 참고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주변 사람이나 자신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의 후기는 있지만, 자신의 미래에 관한 정보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정보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계획은 당연히 틀어질 수밖에 없다.
계획 오류를 극복하고 평온한 퇴직 후 삶을 만드는 방법
계획 오류는 인간의 심리적 경향이므로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지만, 그 영향을 최소화하고 퇴직 후 삶을 더욱 만족스럽게 만들 수는 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직장 생활 중 어떤 부분에서 진정한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꼈는지, 스트레스는 무엇이었는지, 자신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지 솔직하게 돌아보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는 첫걸음이 된다.
이와 함께 가치관의 재정립도 필요하다. ‘퇴직 후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보다 ‘퇴직 후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싶은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돈, 건강, 관계, 봉사, 학습 등 가치관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혼란 속에서 나침반 역할을 해줄 것이다.
둘째, 다중 시나리오를 통한 유연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저 좋은 일만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건강 악화, 금융 시장 변화, 가족과의 갈등처럼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여러 시나리오를 미리 세워두는 것이 중요하다.
최 부장의 사례를 통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퇴직 후 텃밭 가꾸기를 희망한 최 부장은 처음에는 유기농 채소를 직접 길러 먹는 파란 미래만 그렸지만, 회식 미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중 시나리오를 적용했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텃밭에서 건강한 유기농 채소를 수확하며 이웃들과 나눠 먹고 즐거운 노년을 보낸다는 것이다. 보통이 시나리오는 텃밭 관리가 생각보다 힘들고 수확량이 적어 실망하기도 하지만, 꾸준히 노력하여 작은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생각보다 노동 강도가 세서 건강이 나빠지고, 벌레나 잡초 관리의 어려움에 지쳐 결국 포기하게 된다. 이때는 주말농장 체험이나 친환경 농산물 구독으로 대체한다. 이런 식으로 최악의 경우까지 시나리오를 작성하면 현실의 어려움에 덜 당황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셋째, 선배 퇴직자들과 현실에 관한 대화가 필요하다. 막연한 정보나 이상적인 사례보다는 실제로 퇴직을 경험한 사람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무엇이 가장 좋았나요?”라는 질문뿐만 아니라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극복하셨나요?”라고 물어본다. 선배들의 시행착오와 지혜가 내 계획을 훨씬 단단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넷째, 퇴직 후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꾸려 하기보다는 퇴직 전에 짧은 ‘미니 퇴직’을 경험하거나 새로운 활동을 미리 시도해 본다. 한두 달간 계획했던 생활을 미리 연습해보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자신의 기대와 현실의 차이를 몸소 느끼고 계획을 수정 보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동호회 가입이나 봉사활동을 미리 시작하여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조금씩 만들어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계획 오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이를 인지하고 현실을 직시하며 유연하게 대처하는 태도야말로 퇴직 후 삶을 더욱 평온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