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은 숫자로 시작해 숫자로 끝난다고 해도 될 정도로 숫자와의 싸움이다. 퇴직 전 직장에서 직급, 연봉, 성과 지표와 같은 ‘숫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이런 경험이 퇴직 후에도 이어지면서 퇴직 후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최규환 씨는 정년퇴직 후 자유롭게 책을 읽고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일상에도 숫자의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최규환 씨의 하루는 스마트폰 앱에서 시작되었다. 주식 계좌의 수익률 숫자를 확인하고, 만보계 앱의 걸음 수를 전날과 비교하며 희비가 엇갈렸다. 골프장에서는 퍼팅 라인을 읽는 것보다 동반자의 타수를 의식하고 자신의 스코어 숫자를 줄이는 데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르신, 날씨도 좋은데 풍경 구경이나 하시죠?” 젊은 캐디의 말에도 최규환 씨의 시선은 오직 공과 동반자의 스코어 카드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느 날, 예전 동료들과의 모임에서였다. 한 동료가 “요즘 투자하는 종목 수익률이 꽤 괜찮아서 손주한테 용돈 넉넉히 줬다네” 하고 자랑했다. 최규환 씨는 애써 웃었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계좌 수익률 숫자와 비교하며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열등감에 휩싸였다. 평소 가까웠던 친구가 자신의 골프 타수 기록을 경신했다는 소식에 겉으로는 축하하면서도 집에 돌아와 몰래 연습장에 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매일 숫자에 집착하면서 늘어가는 건 피로뿐이었다. 잠자리에 들어도 낮 동안 보았던 숫자들, 앞으로 채워야 할 목표 숫자들 그리고 남들에게 뒤처지는 듯한 불안감이 머릿속을 맴돌며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온몸은 긴장으로 뻣뻣했고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퇴직 후 비로소 얻게 된 평온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현역 시절의 스트레스가 새로운 형태의 숫자를 통해 다시 찾아온 듯했다.
퇴직자의 일상은 자유로움과 여유로 채워져야 하지만, 숫자에 대한 집착은 이 일상마저 경쟁과 불안의 연속으로 만들 수 있다. 최규환 씨의 사례처럼 수시로 투자 계좌의 수익률을 확인하고, 골프 타수를 줄이기 위해 무리하게 연습하고, 건강 앱의 걸음 수를 채우기 위해 자신을 압박하는 등 숫자를 관리하고 개선하는 데 과도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된다. 이런 태도는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활동이나 편안한 휴식을 방해한다.
숫자에 집착하는 취미 활동은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 숫자에 지배받는 취미 활동은 과정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기록 경신’이나 ‘순위 상승’에 몰두하게 되면서 취미 활동 본연의 즐거움과 만족감을 놓치게 된다. 등산이나 골프를 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대신 목표 거리나 시간에만 신경 쓰는 등 여유가 사라지면서 피로감만 쌓이게 된다.
스스로 만드는 스트레스가 더 위험하다. 퇴직으로 직장에서의 실적 압박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설정한 또는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숫자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주가 변동, 건강 수치 등 자신의 의지로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숫자에 일희일비하면서 감정의 소모가 커진다. 또한, 숫자를 달성하지 못할까 봐 끊임없이 불안해하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숫자는 인간관계를 멀게 만들고 관계의 질을 떨어뜨린다. 경쟁자가 아닌 지인들과의 모임에서조차 경제력, 자녀의 성공, 건강 지표 등을 주제로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게 된다. 남들과의 비교에서 자신이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면 친밀하고 편안한 교류를 방해하고 질투나 우월감, 혹은 열등감을 유발하여 긴장감을 유발하면서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상대를 ‘사람 그 자체’로 판단하지 않고 경제력과 같은 상대의 배경을 보고 판단하게 되면 상대와의 관계가 깊어질 수 없다. 상대가 ‘소유한 숫자’에 따라 관계 유지 여부를 판단하거나, 자신이 가진 숫자를 과시하는 등 물질적인 가치에 기반한 조건 만남이 일어날 수 있다.
자신의 가치를 외부의 숫자(자산, 건강 수치, 취미 기록)에 의존하게 되면, 대상 숫자의 변동에 따라 자존감이 요동치게 된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는 자신감이 넘치지만, 결과가 나빠지면 자신을 무능하거나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어 쉽게 좌절하고 우울해진다.
숫자는 필연적으로 비교를 통해 그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받게 된다. ‘내가 만든 결과가 저 사람보다 높은가 낮은가?’, ‘지난달의 결과보다 이번 달 결과가 향상되었는가?’와 같은 비교는 끊임없이 경쟁심을 부추기고, 자신이 충분히 잘하고 있는가에 대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설사 목표한 양적 결과를 달성하더라도 더 높은 숫자를 가진 사람을 보거나 새로운 목표가 설정되면 금세 불만족스럽고 ‘아직 부족하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런 생각은 업무 과정에서 진정한 만족감을 느끼기 어렵게 만들고, 끝없는 경쟁 속에서 자신을 소진하게 만든다. 만족의 기준이 외부에 그리고 타인에게 맞춰지기 때문에 내면의 평화와 충만감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적 결과 중심의 사고는 일의 본질적인 목적과 개인의 내적 동기를 사라지게 하고, 끝없는 비교와 불안감을 유발하며, 자신의 가치를 숫자에 종속시켜 결국 진정한 성취감이나 의미를 경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퇴직 후에도 계속되어 평온한 삶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퇴직 후에는 ‘숫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