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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역설

과거 경험이나 지식 혹은 습관 등이 현재나 미래에 장애가 되는 이유

by 최환규

누구나 과거를 통해 성장하고 배운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 습관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단단한 기반이 된다. 하지만 삶의 중요한 전환점인 ‘퇴직’을 맞이했을 때 견고하게 쌓아 올린 과거의 탑은 때로는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 수 있다. 심지어는 자신이 목표로 정하고 나아가려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변모할 수도 있다.


퇴직자에게 과거는 족쇄가 될 수 있다. 퇴직자의 과거가 자산이 아닌 족쇄가 되는 이유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 과거의 ‘정답’이 더는 유효하지 않거나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갇혀 새로운 가능성을 외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형성된 수직적·업무적 인간관계에만 익숙해져 퇴직 후 비업무적인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나 배경을 먼저 내세우거나 직장 인맥만을 중시하던 습관 때문에 새로운 동호회나 모임에서 진솔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끼게 될 수 있다. 과거 직장 내에서 효과적이었던 인간관계 방식이 새로운 환경에서는 장벽이 되는 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대기업의 임원으로 재직했던 A 씨가 있다. A 씨는 강력한 리더십과 빠른 의사결정으로 수많은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유능한 사람이었다. A 씨는 퇴직 후 지역 동호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했다. 하지만 동호회 내에서의 수평적 관계, 합의를 중시하는 의사결정 방식은 그에게 익숙지 않았다. A 씨는 직장에서처럼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 자기 의견을 강하게 말했고, 다른 회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게 맞는 방법’이라며 지시하려 들었다. “왕년에 나는 이렇게 해서 성공했다”라는 A 씨의 발언은 자긍심의 표현이었지만, 동호회원들을 A 씨를 ‘권위적’, ‘꼰대’, ‘고집불통’ 등으로 낙인찍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동호회원들은 A 씨를 멀리하게 되었다. A 씨는 동호회 활동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A 씨의 화려했던 리더십 경험은 현재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 오히려 큰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A 씨는 과거에 자기 성공 경험에 집착하느라 현재의 새로운 관계 양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역설에 빠진 것이다.

직장 생활에서 얻은 성공적인 경험, 사회적 지위, 그리고 그로 인한 존경은 한 개인의 자존감과 정체성에 깊이 각인된다. 성공 경험들은 분명 소중한 자산이지만, 퇴직 후에는 A 씨의 사례처럼 현재의 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A 씨처럼 과거의 성공 경험이 현재의 장애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변화된 환경에 대한 인지적 비유연성과 잃어버린 대상을 자기 안에서 재창조하여 간직하려는 자기애적 동일시 때문이다.


또한, 과거에 쌓아 올린 전문 지식은 한때 자신의 경쟁력이자 사회적 가치를 증명하는 척도였다. 하지만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지식의 유효 기간은 점차 짧아지고 있다. 퇴직자가 과거의 지식에 지나치게 의존할 때 발생하는 장애는 현실 적응력 저하와 새로운 학습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다.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는 분명 중요한 자산이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업데이트되지 않거나, 그 지식을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맥락을 찾지 못할 때 한계에 부딪힌다. 또한, 과거의 성공 경험이 특정 지식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져 새로운 학습을 거부하게 만들 수도 있다.


특정 분야의 기술 전문가였던 사람이 퇴직 후 급변하는 스마트폰, 온라인 뱅킹, SNS 등과 같은 디지털 환경에 대한 학습을 소홀히 하거나 심리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내가 젊을 때는 다 이런 식으로 했어’라며 과거의 방식만을 고집하다가 실생활에서 큰 불편을 겪거나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게 되어 독립성을 잃을 수 있다. 과거의 전문 지식이 현재의 일상생활에 대한 적응을 방해하는 셈이다.


이와 함께 과거 자신의 성공 방식이나 경제관념을 현재의 젊은 세대나 가족에게 그대로 적용하려 드는 사람도 있다. 급변하는 경제 상황이나 사회 트렌드를 고려하지 않고 “라떼는 말이야”라는 식의 조언을 반복하면 오히려 갈등을 유발하고 소통의 단절을 초래할 수 있다. 과거의 지혜가 현재 상황에 맞지 않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감만 사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퇴직 후 삶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이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경험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진화한다. 퇴직이라는 큰 전환점은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 질문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다.

외부 환경은 항상 변화한다. 사회 구조, 기술 발전, 관계의 변화 등 여러 요인이 과거와는 다른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낸다. 퇴직은 직업 환경이라는 강력한 외부 맥락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과거 직장 생활의 규칙이나 기대가 현재나 미래에 같게 적용될 수 없으며, 이러한 변화된 맥락 속에서 과거의 연장만을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부적응을 초래할 수 있다.


직장 생활은 일정한 루틴과 업무수행 방식, 인간관계 패턴을 형성하게 한다. 퇴직 후 이런 구조가 사라지면 과거의 습관은 더 이상 효율적이지 않거나 새로운 관계에서 부적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 자기 관리나 여가 활동에 대한 새로운 습관 형성이 어려울 때 문제가 깊어진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업무에 매달리던 습관이 사라지면서 온종일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불규칙한 생활 패턴에 빠질 수 있다. 과거에는 ‘일을 위한 규율’이 있었으나 퇴직 후에는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는 동기를 잃어 활력 없는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


이처럼 퇴직자에게 과거의 경험, 지식, 습관은 단순히 추억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물론 과거는 우리의 뿌리이자 소중한 역사이며, 이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현재의 나를 재조정하고 미래의 가능성에 기꺼이 문을 여는 용기이다. 과거가 미래의 발판이 될 수 있도록 유연한 마음가짐으로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 퇴직 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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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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