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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퇴직 계획은 현실과 달라지는가?

by 최환규

퇴직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따스한 햇볕 아래 해먹에 누워 책을 읽거나, 세계 일주를 하며 낯선 문화를 탐험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퇴직은 고된 직장 생활을 견뎌낸 자신에게 주는 ‘자유’이자 ‘보상’이라는 믿음 속에서 많은 사람은 장밋빛 노후까지는 아니라도 ‘편안하고 여유로운 삶’을 기대한다. 그러나 막상 퇴직의 문턱을 넘어섰을 때, 오랜 시간 공들여 그린 아름다운 청사진은 종종 예상치 못한 현실의 거친 파도 앞에서 흔들리거나 때로는 산산이 조각나기도 한다. 꿈꾸던 퇴직 계획과 실제 퇴직 후의 삶이 큰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퇴직 후의 자유’에 대한 피상적이고 이상적인 기대에서 비롯된다. 많은 사람은 직장에서 받는 제약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자신을 힘들게 했던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퇴직하고 나면, 예상했던 ‘무한한 자유’는 곧 ‘무한한 공백’으로 다가온다. 직장 생활이 제공하던 일정한 루틴, 목표, 사회적 연결고리가 사라지면서 개인은 하루를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 몰라 혼란과 무기력감에 빠져들기 쉽다. 마치 수십 년간 정해진 궤도를 따라 달리던 기차가 갑자기 넓은 평지에 내려앉아 스스로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머릿속에 들어있던 계획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으로 가득했지만, 현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퇴직을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기회’로 여긴다. 자유를 어떻게 채워나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 대신 ‘여행이나 다니고 취미 생활 실컷 해야지’ 정도로 막연하게 계획한다. 하지만 막상 자유가 주어지면 오히려 무기력감과 공허함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외부에서 주어지던 목표와 구조가 사라진 자리를 스스로 채우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퇴직 전에는 매일 정해진 출근 시간, 회의, 업무 등으로 하루가 구조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퇴직 후에는 이 모든 것이 사라지므로 스스로 하루의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이 예상보다 힘들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라고 고민만 하다가 하루를 허비하고, 자신에게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이유는 ‘직함’ 상실이 가져오는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다. 퇴직자는 오랜 시간 직업과 직함으로 자신을 정의하며 살아왔다. ‘부장님’이나 ‘과장님’으로 불리던 호칭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가치와 능력을 대변하는 강력한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퇴직과 동시에 이 모든 것이 사라지면서 ‘자연인’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예상보다 훨씬 가혹하다. 수많은 퇴직자가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건가?’라는 깊은 상실감과 함께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계획표에 아무리 ‘새로운 나를 찾아 나설 시간’이라고 적어두었더라도 그 공백을 채우는 과정은 지독한 내면의 싸움이 된다. 직업을 통해 얻었던 성취감, 인정, 자존감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느끼는 허무함은 정신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활기찬 노후를 위한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 수 있다.


직장 생활은 개인에게 직함, 권위, 사회적 인정을 부여하고 자존감의 중요한 원천이다. 퇴직 후 이러한 것이 사라질 때 많은 퇴직자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는 상실감과 함께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셋째, 가족 내 ‘역할 전환’과 ‘기대 불일치’로 인한 갈등도 계획에 없는 것이다. 퇴직 전에는 ‘이제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화목하게 지낼 수 있겠다’라는 기대를 한다. 그러나 막상 가정으로 돌아온 퇴직자는 새로운 갈등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에서처럼 가정에서도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배우자와 자녀들의 저항에 직면한다. 오랫동안 각자의 생활공간과 리듬을 가지고 살아가던 배우자는 남편이나 아내의 지나친 간섭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습관 차이로 인한 갈등이 증폭될 수 있다. 자녀들 역시 성인이 된 부모에게 새로운 역할을 기대하거나 반대로 부모의 갑작스러운 의존적인 태도에 당황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대 불일치’는 퇴직 후 가정의 평화를 꿈꾸던 계획과는 달리 오히려 가족 간의 심리적 거리감을 초래하거나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퇴직자는 남편 또는 아내로서, 부모로서, 퇴직 전에는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가정에서의 역할이 제한적이었다. 퇴직 후 가정으로 돌아오면서 역할이 급변하지만, 이에 대한 충분한 준비 없이 과거의 태도를 고수하거나 가족들이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기를 기대하다가 갈등을 겪기 쉽다. 특히 ‘은퇴 남편 증후군’처럼 배우자와의 생활 습관 차이나 간섭 문제로 오히려 관계가 악화하는 경우가 흔하다.


줄어드는 ‘사회적 관계망’과 커지는 ‘고립감’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직장은 단순히 일터가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적 관계망의 허브였다. 수많은 동료, 협력업체 직원들과의 교류는 사회적 활력의 원천이었다. 퇴직 계획은 이들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거나, 새로운 동호회 활동 등으로 관계망을 더욱 확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업무라는 공통분모가 사라지면서 관계는 놀랍도록 빠르게 소원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분 없이 전 직장 동료에게 연락하기도 머쓱하고, 바쁜 후배들에게 괜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 먼저 연락을 끊기도 한다. 또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 역시 젊은 시절만큼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예상했던 풍성한 관계는 희미해지고, 홀로 남겨진 듯한 고립감과 외로움은 퇴직자들의 마음을 갉아먹는 큰 원인이 된다.

재정적 현실과 건강 악화라는 변수도 계획에 없던 것이다. 퇴직 계획을 세울 때 재정적인 준비는 필수 요소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다.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는 연금액, 갑작스러운 가족의 경제적 지원 요구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바로 예상치 못한 의료비 지출이다. 나이가 들면서 건강 문제가 발생할 확률은 높아지지만, 이러한 현실을 구체적인 재정 계획에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퇴직 후 겪는 심리적 스트레스와 우울감은 신체 건강에도 영향을 미쳐 병치레를 늘리고, 이것이 경제적 부담을 가중하는 악순환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많은 퇴직자가 재정적인 준비는 한다고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의료비 지출, 자녀의 결혼 및 학자금 지원, 물가 상승 등으로 인해 실제 노후 생활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소진되는 경우가 많다. ‘넉넉한 노후’에 대한 기대가 ‘빠듯한 현실’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퇴직자들이 세웠던 계획과 실제 삶의 모습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계획이 잘못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퇴직이라는 거대한 삶의 전환점이 가져오는 복합적인 심리적, 사회적, 신체적 변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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