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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불 Sep 22. 2024

예스라는 말로 버티는 광야의 프리랜서

부재중 통화가 없는 프리랜서가 된다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잘나가는 프리랜서가 되는 방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요새 외모, 춤, 예능, 노래 뭐든 다 잘하는 아이돌을 '육각형'이라고 한다는데, 프리랜서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이겠지만 거기에 보태, 몇 마디를 나눠도 쉽고 깊게 라포를 쌓는 '너스레'라든지, 전화 벨이 5번 울리기 전에 받는 기민한 '대응력'이라든지, 절대 마감일을 어기지 않는 '책임감', 다른 프리랜서보다는 조금 더 저렴한 '개런티'라든지, 혹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던저진 공을 쳐내는 '무한 수정력'이라든지...여러 미덕들이 있을 텐데, 여튼 나는 여기에 어떤 제안도 받아들이는 '예스력'도 추가했다. 


엄마의 은퇴로 영원히 나을 것 같지 않았예술병 완치 판정을 받게 나는, 앞서 시작한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친 덕에 다양한 회사로부터 콜을 받을 있었다. 일이 되려고 그렇게 건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감사하게도 나의 밥벌이 지역 또한 자연스럽게 방구석에서 마용성 3구로 이동하게 되었다. 


즐거웠다. 대학, 대학원을 거치고 그나마 간간이 공모전 수상으로 버텨오는 동안 간접 체험할 수밖에 없었던 '세상 돌아가는 일'의 한 가운데에서 내가 쓴 글이 한 몫을 한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불특정 다수의 관객과 독자를 만족시키겠다는 야망을 버리고 소수의 광고주, 고객사에 집중해야 하는 작업들이. 작품 수정 요청은 그렇게도 괴롭더니 일종의 '제품'이 된 글을 수정받는 일은 지당하게까지 느껴졌다. 작품이 곧 나라는 착각을 버리지 못해 괴로웠는데, 자연스럽게 이 글은 내가 아니라는 거리두기를 하고 보니 수정 요청을 받는 일이 수치스럽거나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실력은 모르겠고 당시 나는 '예스력'만큼은 정점을 찍었는데 거절을 못하는 성격때문도 있지만 그동안 방구석에서 응축(?)됐던 에너지가 폭발했던 시기와도 잘 맞물렸던 덕이다. 감사하게도 일은 끊기지 않았고, 덕분에 생활비 입금도 끊지 않을 수 있었으며 당시의 '허세'는 실언이 아님을 증명함으로써 집안에서의 나의 위상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달리고 싶은 내 앞에 잘 빠진 트랙이 있었고, 환호해 주는 가족까지. 

금메달까진 아니더라도 포디움엔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무살 무렵에 학교 근처에 있는 사주 카페에서 사주를 본 적이 있다. 내 사주를 보던 아주머니는 내게 '수도관'같은 재운이 있다고 했고, 덕분에 내가 잠그지만 않는다면 그 물이 졸졸졸이건, 콸콸콸이건 흐르긴 할 테니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 또 사주를 봤을 때 중절모를 쓴 남자는 내게 관운이 있으니 공무원이 되거나 회사에 취직을 해도 일을 거라고 했다. 취업 활동은 고사하고 토익 시험도 본 적 없는 내게 관운이라니, 말도 안 되는 통변이라며 콧방귀를 뀌었건만 지금은 회사나 관공서를 대상으로 하는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예지가 아주 틀린 아닌가 싶다. 




그러나 날 무너뜨린 것도 결국 '예스력'이었다. 나는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주어진 모든 일을 도맡아 하며 나의 잠과 일상을 반납했고 그렇게 나날이 쌓이는 동안, 내 마음의 결핍은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친구들은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유학을, 결혼을 한다고 하는데 은퇴한 엄마에게 생활비를 보내야 한다는 사명으로 미친듯이 일을 하고 있자니 자수성가의 '자'도 실현되지 않았음에도, 나는 니들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되도 않는 정신승리를 되뇌이며 술을 마시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계속 일을 하고 돈을 모으다 보면 폐허가 되어버린 자존감의 토양이 알아서 재개발 되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아무리 돈을 벌어도 부모가, 조부모가 부자인 친구들이 때에 맞춰 일신상의 근황을 알려주며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의 현타를 선사했다. 이미 뻥뻥 뚫려 버린 내 마음의 싱크홀들은 보수 하지 않으면 조만간 더 큰 일이 올지 모른다는 예보를 보냈으나 나는 그저 네델란드 소년처럼 한 팔로 뚫린 구멍을 막아내며,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뒤를 바라볼 뿐이었고 당연히 나를 위한 백마탄 왕자나 로또는 고사하고 119 구급대의 비상벨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발견했다. 내 앞에 놓인 트랙에 피니시 라인이 없다는 걸, 그리고 내 마음의 토양은 원수에게 추천해준다는 지역주택조합의 한 구석이라 영원히 개발되지 않는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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