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나기
글을 쓰고 세 번째 계절에서야 깨닫는 사실. 글은 계절을 많이 탄다. 내 기분처럼, 내 몸처럼. 어떻게든 갖가지 이유를 들어 의지를 다지며 새해의 시작과 봄을 지내도, 내 경험에 따르면 여름은 늘 복불복이었다. 봄을 잘 보냈다면 그의 후속으로 무성한 이파리들처럼 푸른 활기를 즐기든지, 물 먹지 못한 화분처럼 늘어져버리든지.
1년의 첫 고비, 여름이 문제다.
쓸 이유가 많았다면.. 그래, 쓰지 못할 이유도 많다. 굳이 찾겠다면. 불타는 감정들 때문에 생각 내려놓기를 하고 있고, 그 때문에 깊은 생각과 그에 따르는 색을 가진 적절한 첫 문장 하나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고, 더위에 지쳐 간신히 선선한 자리에 멍하니 앉았다 보면 시간이 끔뻑 흘렀다. 그 와중에 가족 누군가 잔병치레를 하고, 함께 휴가를 즐기다가, 얼떨떨하게 내겐 이미 좀 지나버린 감정의 글이 관심을 받기도 해서 겸연쩍던 참이다. 그 글을 다시 읽고는 쏟아내듯 쓰는 일이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게 된달까.
봄이나 가을, 계절을 유독 타는 사람들이 있다. 봄기운에 유난히 들뜨거나 가을바람에 유난히 쓸쓸해하는. 혹은 감정이 아닌 몸의 신호가 먼저인 사람도. 나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가을이 되어가는 날씨를 정말 좋아하지만, 외로움이나 사랑이 싹트는 마음은 나와는 거리가 멀지.
사실은 계절보단 하루하루의 날씨에 이토록 쉽게 지배당하는 인간이라면 더 변덕스럽다 해야 할까, 가볍다 해야 할까. 평소 드러내지 않는 내 내면의 온도를 글은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부끄러울 정도로. 뭐 어때.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사는 거 아닌가. 자연에는 겸손보다 관대한 나, 그렇게 내 감정을 외면해 왔나 보다.
그리고 감정 앞에 잔인하게 마주 선 첫여름. 안팎으로 겹친 불에 데이는 줄 모르고 넋을 놓은 채 보내는 시간.
여름이, 너무 길다.
올해의 여름, 글은 청량하지 않았다. 기분 좋게 나는 땀이 아니라서, 불쾌하게 젖어들어버리는 더위라서, 벌겋게 금세 상처 입히는 뜨거움이라서, 무력하게 만들고 마는 가변성과 두려움의 날씨라서. 올려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광열.
이번 긴 장마와 땡볕에 화분 몇이 갈색으로 타들어갔다. 원래 음지식물인 줄 모르고 집 안이니까- 라며 안일하게 대하면서 몸을 뒤틀고 있는 걸 들여다보지도 않은 탓이다. 식물마다 그에 맞는 보살핌이 아니라, 우리 집엔 내 획일화된 돌봄에도 살아남은 것들만이 내 눈에 채우고 싶은 초록의 욕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내 마음도 다 모르는 것처럼, 다른 것에 큰 관심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 긴 무관심과 방치에 시들어버린 것들. 내 마음도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건 아닐지, 잠시 안쓰러웠다가 미안, 나 사느라 돌봐주지 못했네-라고 핑계를 댈 때, 결국은 또 되지도 않게 여름을 원망했다.
어디 가서 입 한 번 떼보지 못해 한이 맺힌 것처럼 매일을 써댔는데, 잠깐 멈췄다 막상 다시 쓰려니 무엇을 써야 할지. 목에 뭔가 걸린 듯 글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무언가를 의식해서라기보단 얄팍하게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이 문제인 듯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역시 마지막 한더위 같은 글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지나고 있다고, 여름을 꾹꾹 눌러 보내고 있다고. 가을이 오면, 하늘이 높아지면, 불길이 잦아들면 또 날씨에 힘입어 아무 일 없던 듯 쓰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