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도
예전에 남편의 지인 내외와 식사하면서 그런 얘길 들은 적이 있다. 남자는 낭만이 있어야 한다고.
그 때만 해도 우리는 신혼이었고 알콩달콩 잘 지냈지만, 그런 멋이라곤 전혀 듣도보도 못하고 자란 나는 이미 좀 큰 아이들이 있는 부부의 그런 얘기를 반쯤 허세섞인 것으로 흘려들었고, 그럼에도 그 부부의 모습은 꽤나 다정하고 보기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편은 이후에도 종종 잊을만 하면 그 얘길 꺼내들곤 했다. 평소 대단치는 않아도 기념일이면 늘 꽃다발이나 편지, 아니면 더 좋은걸 못 해줘서 미안해 라고 속을 꽉 채운 말을 하는데, 그런 걸 바랄 줄도 잘 모를 정도인 투박한 내게 그 낭만이란 말은 어쩐지 이따금씩 들을수록 멋진 말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해서 그런걸까. 아니면 삶의 낭만을 알아챌 정도로 내가 익어가고 있나.
낭만, 로맨틱. 이런 걸 경기하듯이 거부했던 나는 생겨먹은 게 그런건지, 그렇게 교육 당했는지 알 수 없다. 우리의 삶은 무난한 듯 조용한 듯 그렇게 흘러가고 있지만, 그 안에는 대단치는 않은 작은 낭만들이 있다.
아이와 얼굴 부비는 시간, 이제는 조금 더 간결해진 아침인사, 낮에도 아이와 컨디션에 대해 묻는 연락, 자신이 먹지 않고 가끔 들고오는 달달한 것, 저녁 시간엔 못다한 하루 얘기와 기어이 한 마디 끼어들고 싶어하는 아이, 아이 재운 후 조촐한 야식과 드라마 시청,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도 남은 수다. 비록 이전보단 줄었다 해도. 꾸벅꾸벅 조는 시간이 조금 더 이르게 찾아와도. 이렇게 얘기할 게 끊이지 않는 사이라면 부부가 되어도 좋다.
매일이 아니라 가끔이라도. 저녁이면 나서는 산책, 비와 걷는 오후, 둘러앉은 맛있는 저녁상, 함께 바라보는 노을, 달콤한 주말의 낮잠, 함께 땀 흘리는 집안일, 가끔 특별한 날, 새근새근 잠든 아이, 너와 내가 채워가고 있는 이 가정.
비단 남자에게만 낭만이 필요한 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겐 낭만이 필요하다. 그 거들떠도 안 보던 '낭만'이란 말을 내가 집어들게 된 건, 건조하다고만 여기던 내 삶에서 의미를 찾을 때였다. 글을 다시 쓰면서였다.
삶에서 부질없는 것 같은 반복과 책임은 '의미'가 없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에, 자꾸만 끄집어내야 하는 그 '의미'는 곧 삶의 낭만이 된다. 그렇게 가장 낭만적이지 않을 것 같은, 가장 솔직한 것이 결국은 낭만이 된다.
왠지 낯부끄럽고 간지러운 것으로 여겼지만, 낭만 없이는 삶이 성립되지 않는다. 저 작은 낭만들이 삶을 지탱하고 있다. 아주 가끔이라도, 단지 말 뿐이라도 가끔 마음을 말랑하게 할 수 있다.
채워야 하는 것은 나를 힘들게 하지만, 지켜야 하는 것은 나를 움직이고 곧 나를 지킨다. 우리가 낭만을 지켜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