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도
아주 가까운 분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도 단지 내가 조금 더 나이 먹어가는 과정에서 왔을 뿐이다. 나는 아직 아주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지척에서 경험해본 적 없고, 아무리 보고 들었어도 감히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마 실제로 아주 가까운 분이라도 비극적인 사고가 아닌 이상 그 자리에서 내가 눈물을 쏟아낼 것 같지도 않다. 내가 너무 무디고 잘 잊어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시간이 지나면 빈 자리는 서서히 와닿을까.
사실 내가 조문객으로 찾은 자리에서도 그런 경우는 잘 보지 못했다. 어른들은 그래야 하는 걸까. 사회 초년생일 때, 그런 자리에 갈 일이 있으면 한없이 어려웠다. 절대 실수해선 안 되며, 웃어서도 안 되고 슬프고 무거운 자리. 막상 가면 두런두런 똑같은 일상 얘기, 오랜만에 얼굴 본 친척들끼리 나누는 얘기,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호상이죠 둘러대는 얘기, 어려운 사람 무색하게 되려 가벼운 웃음..사람 사는 건 그런 것일 때가 더 많은 모양이다.
자리가 익숙해지니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다가 번뜩, 돌아가신 분은 이제 돌아가신 날로 기억되는구나 라는 사실이 순간 오한이 들 듯 시리게 다가왔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당연한 이치를 놓고 죽음을 생각하다니. 그 분과 나의 경계, 생과 사의 영역. 산 사람은 내 기억에 없어도 평생동안 태어난 생일을 챙기고, 돌아가신 뒤엔 돌아가신 날로 이제 기억되게 된다. 눈물도 없을거라던 나는 왜 그 사실이 갑자기 그렇게 사무치게 낯설었을까.
기일이라는 건 조금 의외이지만 기리고, 기억하는 것이 아닌, 사전적으로는 상 중이며 꺼리는 것이다. 생의 영역에 계신 분이 아니기때문에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돌아가신 날이 그 분께도 남은 이들에게도 좋은 날일 리 없건만, 그 날을 챙겨야 하고, 유독 그 날을 정해 그 분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다. 그 분과 함께 한 시간엔 늘 그 분의 생일을 챙겼고, 그 분과의 좋은 기억이 많았을텐데. 잊어가야 하기 때문에, 놓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걸까. 그 날을 문 하나로만 남겨두고 더는 넘지 못하게 선을 그어버린 걸까.
생과 사라는 것이 알아갈수록 낯설다. 살아도 뵙지 못하고 어딘가에 그저 존재하고 계심을 아는 것 - 이렇게 무심한 것, 그리고 죽음 이후라도 머릿속 생의 기억이 떠오르면 옆에 계실 것만 같은 생생함 - 그리움. 그 두 영역은 당연해서 잊고 있는 '생'을 의식했을 때, 서로 저 끝이 아니라 나란히 서있다.
아무리 더 이상 보지 못한다지만,
문 하나로 생의 영역에서 선 그어진다.
누가 그렇게 정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