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과하다, 과해

내 주머니를 털어가는 것들

by 포인셋


가끔은 헤비한 게 먹고 싶다. 금요일 저녁이 주로 그런 날이다. 해방감. 일주일 간 고생한 나. 다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더라도 일단은 정당한 휴식이 주어지는 이틀. 혼자서는 자주 먹지 못해 날 애타게 만드는 것들을 먹으려면 그만큼 큰 지출과 타협해야 한다.


나름대로 풍족하게 먹고 살지만 자취생에게도 미래와, 자금 계획이란 게 있다. 그래도 이런 날은 조금쯤 그 억압에서 스스로 날 놓아준다. 어쩌면 가장 관대한 날이다. 해가 뜨면 조금은 돌아와버리는 이성이 날 제지하고, 소비하기 위해선 내적갈등을 이겨내야 한다. 이럴 땐 누가 선역인지 불분명해진다.


양으로 쳤을 때 요즘은 1인가구를 위한 것도 많다. (가격은 그 때의 2인분이나 매한가지인 것 같다.) 불과 몇 년 전인데, 그 때도 1인가구는 많았을텐데, 1인분은 늘 취급받지 못했다. 1인분을 먹고자 한다면 좀 더 고급메뉴를 골라야 했고, 아니라면 나는 2인분이 되어야 했다. 나도 나름 대식가인데. 매끼 그런 건 아니어도 바깥음식이라면 왠지 2-3인분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위장이 예전같지 않다. 인간은 웃기다. 욕망 앞에 학습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먹고 싶은데. 두 세가지 메뉴를 고르는 게 신이 난다.


커다란 피자나 탕수육 곁들인 짜장면을 양껏 먹고선 당장은 만족스럽다. 변변찮은 냉장고에 일단 남은 걸 저장해둔다. 아직은 내일의 식량이 있다는 데에 만족스럽다. 내일은 후회할 걸 조금쯤 알지만 오늘은 생각지 말아야 한다. 오늘의 만족을 위해 돈을 썼기 때문이다. 다음 날, 쥐색 대낮이 되었다. 오늘의 식량은 입은 맛있지만 그저 그렇다. 또 한 끼 잘 때웠네. 그 동안 술과 폭식으로 쪼잔해진 내 소화능력때문에 (그렇게 부려먹고 쪼잔하다 하니 조금 미안하구나) 가끔 배달음식은 세 끼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내게 냉동은 없으니, 먹어서 없애야 한다. 속은 못 먹을 걸 왜 먹였냐는 듯 성을 내고, 그렇게 맛나다고 먹던 걸 몇 시간만에 거죽처럼 질겅질겅 씹다보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 당분간 보지말자. 이건 정말 단순한 내 변덕이다. 모자람이다. 이 모자람은 다음 주말이면 또 이어진다.




주말이라도 한 번은 나가야 한다. 아무리 평소 집과 친한 나라도 이 방에서 이틀을 나가지 않고 버텼다간 낯빛은 창백한 병원의 시트 같은, 눈 밑은 쥐색인 폐인이 되기 십상이다. 바깥은 온통 사고싶은 것 투성이다. 먹을 것, 옷, 화장품, 그리고 생활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귀여운 것들..그냥 걷기에도 좋은 유럽풍 낯선 외국이름의 빌리지는 나처럼 누구하고나 내외하는 인간은 선뜻 들어가기 힘들게 한산해서, 되도록 바깥에서만 쭈뼛거리며 구경했다. 내 벌이가 좀 나아진 동네이니만큼, 그 이상으로 반영되어 있는 물가는 날 좀 어리둥절하게 하긴 하지만, 잘 못 보던 매장, 새로운 물건들은 그래도 날 흐뭇하게 해준다. 나의 무딘 눈으로는 예쁘네-라고 할 뿐 봐도 잘 모르고, 그다지 욕심내지도 않는 인간이라 다행히도 눈이 높아지지 않고 돌아왔다.


다 돌지도 못할 큰 백화점에 가서 아직 산뜻한 발걸음일 때, 괜히 배우지도 않을 문화센터 전단을 들여다보다가,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에 또 웬 연예인이 왔나보군, 그 대열에 합류하진 못하고 저 먼 에스컬레이터 발치에서 얼굴이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네 뭐, 이런 생각을 하다가 선뜻 집어들어 데려오기엔 고민이 되는 가격들의 차, 쿠키, 접시, 향수 같은 것을 구경하고, TV가 몇 억이라니 별 놈의 세상이 다 있군-, 잊어버리고 간단히 요기를 한다.


배와 머리의 무게가 느껴지고 걸음이 좀 느슨해지면 이제 중저가의 브랜드 매장으로 가 진짜 내 소유가 될 만한 것들을 눈에 담는다. 다시 생기가 돈다. 이러니 이 쇼핑몰들을 하루 종일 벗어나지 말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나 사는 동안 세상엔 내가 못 보고 갈 것이 얼마나 많은데, 내 눈으로 본 것도 다 내 세상이지! 나는 내 눈으로 본 것, 진짜 내 것이 된 것들에 만족한다. 이 별천지에서는 적당히 바라고 적당히 만족하고 사는 내가 기특하다. 그게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이다. 눈에 기어이 띄고 마는 그런 것보다, 실은 나처럼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세상을 오밀조밀 만들어내고 있다.


봄이면 카페들이 예쁜 옆 동네 플리마켓에 간다. 내가 사는 곳엔 직장인들만이 많을 빌딩 천지라 그 넓은 상가라도 주말이면 통째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듯 낯선 침묵으로 문을 닫고 말지만, 사람 사는 그 곳엔 주말에 노니는 이들도, 집어들 수 있는 것도 훨씬 많으니 걸어간 보람이 있다. 괜히 어둠에선 키우지도 못할 작은 화분을 그 밝은 곳에서의 기운에 객기로 집어오기도 하고, 그 때문에 가장 여유로울 그 곳의 분위기에 열어버리고 만 지갑과, 가장 이성적이고 말 내 어둠의 방에서의 소비 편차를 극심하게 느끼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난 역시 내가 밖에서 쬐어 저장해 온 그 햇빛에 만족하고 산다. 이 방에선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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