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적당한 무관심이 필요하다
멍집사, 냥집사에 이어 최근에는 식집사가 유행이다.
집에서 화초를 키우는 것은 '뒷방 늙은이'의 취미 정도로 여겨지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젊은 사람들도 그 재미에 푹 빠진 경우가 많다.
참고로 나는 '비자발적 멍집사'와 '자발적 식집사'를 겸하고 있다.
강아지는 나의 퇴근을 반기는 유일한 생명체다.
그 존재가 제법 따뜻하고 든든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집에서 날 귀찮게 하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딸내미 어렸을 때처럼 참 손이 많이 간다.
반면 식물은 살갑진 않지만 집안의 빈자리들을 묵묵히 채운다.
강아지 못지않게 집안에 생명의 온기를 더한다.
혼자 쉬고 싶을 때 귀찮게 굴지 않는 것은 그만의 미덕이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멍집사나 냥집사보다는 식집사를 추천한다.
여기서 초보 식집사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팁이 하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식물들에게 관심을 너무 많이 주지 말라는 것이다.
나도 초보 식집사였을 때 식물을 고이 보내드린 안타까운 기억이 많다.
대부분은 잎이 시들시들하다가 검게 변하면서 가셨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문제는 과습이었다.
초보에게는 화분의 흙이 말라 보이는 것이 굉장한 두려움이다.
금방이라도 큰 일 날까 싶어 조금이라도 물이 마르는 것 같으면 바로바로 물을 준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들 거리면 물이 아직 부족한가 싶어 또 거듭거듭 물을 주고 만다.
과도한 물기로 힘든 애한테 물을 더 퍼붓는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은 물이 말라죽는 것보다 물이 너무 과해서 죽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그런 무지의 시절을 보내고 나서 깨달은 것이 있다.
식집사에게 필요한 필수 덕목 중의 하나가 바로 적당한 무관심이라는 것이다.
불안으로 인한 지나친 관심을 거두어야 한다.
손대면 상할까 바람 불면 날아갈까 너무 애지중지하면 안 된다.
물도 아직 살 만하면 주지 말고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거 같을 때 주어야 한다.
심한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보일 때 물을 주어야 한층 더 푸르고 싱싱해지는 걸 느끼게 된다.
신기한 건 이게 비단 식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강아지를 키울 때도, 아이들을 키울 때도 마찬가지다.
강아지에게 무한한 관심과 무제한적인 사랑만 주면 '개는 훌륭하다'에 출연하는 것을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이들도 과도한 관심과 과도한 사랑만 준다면 '우리 애가 달라졌어요'의 주인공으로 등장해야 할지도 모른다.
요즘 부모들은 다 큰 아이를 한 두 정거장 거리도 굳이 차를 태워 학원에 데려다준다.
말만 하면 아이팟이며 아이패드를 그냥 사준다.
밥 투정하는 중학생 아이의 입에 먹을 것을 떠서 바친다.
아이를 사랑한다면 그가 많은 걸 스스로 하게 하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자기 용돈을 모아서 사라고 하자.
사랑한다는 이유로 아이가 먼저 요구하지도 않고 아이에게 정작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자꾸 쉽게 습관적으로로 건네는 어리석음을 행하지는 말자.
아이에게 주어진 필요 이상의 관심과 집착은 아이의 자생력을 떨어뜨려 작은 고난과 실패에도 쉽게 좌절하게 만든다.
요즘 세상은 과거와 다르다.
부족한 것보다 너무 풍족한 것이 문제다.
영양결핍보다 영양과잉이 문제다.
방임보다 과보호가 문제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과도한 관심과 과잉된 풍요로움과 지나친 개입이 아니다.
적당히 무관심하고 적당히 결핍되고 적당히 방임하는 부모의 태도가 절실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식물도 너무 애지중지하지 말아라.
그래야 식물이 연약하지 않고 튼튼하게 자란다.
식집사의 정신적 불안과 육체적 피로를 예방하는 이득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나 예외는 있다.
식물 중에도 물을 조금만 늦게 주면 금세 고꾸라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아이들도 그 성격과 기질이 아주 다양하니 일률적으로 적당한 무관심이 다 옳다고 할 자신은 없다.
그러니 각자 알아서들 잘하시라.
그 영광과 책임 모두 당신들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