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 기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영 Apr 18. 2024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무르게 자라는 것이 약점이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아직도 눈을 맞고 있다. 파도에 지워진 눈을.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p.15)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 같이 살고 싶어서. (p.17)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p.27)
그러나 여전히 깊이 잠들지 못한다.
여전히 제대로 먹지 못한다.
여전히 숨을 짧게 쉰다.
나를 떠난 사람들이 못 견뎌했던 방식으로 살고 있다, 아직도. (p.28)
끔찍하지?
아니, 라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봐도 끔찍한데.
나는 두번째로 거짓말을 했다.
사실 난 포기하고 싶어, 경하야.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p.41)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이를테면 고통, 유서를 완성하겠다는 모순된 의지로 지난 몇 달을 버텨왔다는 것. (p.45)
누군가 먼저 전화를 걸어, 여기 눈이 오는데 거긴 어떠니, 라고 물으면 여긴 내일 온대, 라고 다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내년에는 할 수 있을까, 라고 둘 중 누군가가 물으면, 그래, 내년엔 꼭 하자, 라고 다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었고, 그렇게 끝없이 연기되고 있는 바로 그 상태가 그 일의 성격이 되어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p.48)
좀전에 병원 로비에서 이미 깨닫지 않았던가,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는 걸?(p.49)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게. 내가 문제를 해결하든, 절반 정도만 해결하든, 마침내 실패하는 돌아오든 (…)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해 (p.51)
바람이 센 곳이라 그렇대, 어미들이 이렇게 짧은 게. 바람소리가 말끝을 끊어가버리니까. (p.73)
새들이 건강해 보이는 건 믿을 수 없어, 경하야.

끝까지 고개를 들고 횟대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지면 이미 죽은 거야. (p.171)
  온다.

  떨어진다.

  날린다.

  흩뿌린다.

  내린다.

  퍼붓는다.

  몰아친다.

  쌓인다.

  덮는다.

  모두 지운다.

  어떻게 악몽들이 나를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과 싸워 이긴 건지, 그들이 나를 다 으깨고 지나간 건지 분명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눈꺼풀 안쪽으로 눈이 내렸을 뿐이다. 흩뿌리고 쌓이고 얼어붙었을 뿐이다. (p.177)
죽은 다음에도 추운 게 있나, 다음 순간 나는 생각했다. (p.185)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주전자와 머그잔 두개를 양손에 들고 걸어오며 인선이 되뇌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p.192)
학영, 숙영, 진영, 희영 다음으로 순영이라고 이름 붙이려는 할아버지를 만류하면서. 안 그래도 순한 아기가 이름 따라 더 무르게 자라면 어쩌려느냐고. (p.216)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옷가지 한 장 신발 한 짝도 없었어요, 총살했던 자리는 밤사이 썰물에 쓸려가서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모래밭에서 죽였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p.226)
물속으로?
응, 잠수하는 거지.
왜?
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돌아본 거 아니야? (p.242)
정적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본다.

더 내려가고 있다.
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광하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

그 후로는 엄마가 모은 자료가 없어. 삼십사 년 동안.
인선의 말을 나는 입속으로 되풀이한다. 삼십사 년.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될 떄까지. (p.281)
돌아가자, 나는 말했다.
다음에 오자, 눈 그치고 다시.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인선이 말했다.
……다음이 없을 수도 있잖아. (p.307)
  이제 돌아가야겠어, 하고 인선이 뒤이어 중얼거렸을 때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돌아가고 싶은가. 돌아갈 곳이 있나. 비단이 미끄러져서 떨어지듯 인선이 눈 속에 앉은 것은 그때였다.
  돌아가자, 조금만 있다가.
  나를 올려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가서 내가 죽 끓여줄게. (p.309)
  사실은 죽고 싶었다. 한동안은 정말 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 (…) 영원히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다. (p. 313)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들어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이상 내 방으로 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p. 314)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이상 알 수 었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p. 317)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 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미쳤을 거야.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p. 318)


아무것도 쓸어가지 못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쓸려간 그들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더 이상의 다음은 없다.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만나지 않아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