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건축학과 1학년, 조급하지 말아요

by 보통의 건축가

91학번, 건축학과 신입생 시절 얘기를 꺼내는 것에 대해 ’내가 말이야, 왕년에 다 했어~’라는 꼰대들의 흔한 말 첫머리일 것이라는 예단은 하지 않아줬으면 한다.

단지 건축학과 신입생으로 겪었던 경험이 그 때의 시대적 상황을 떼어놓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렇다.


90년대 초반은 군사정권 하에서의 민주화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시기였다.

87년 6월 항쟁이 내가 중3이었을 때니, 데모의 풍경은 나의 학창시절에 늘 배경으로 등장했던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서강대학교 바로 옆에 있던 중, 고등학교 덕에 최류탄 냄새는 담배 냄새보다 더 익숙해졌고 가끔 단축수업을 할 때도 있어 마냥 나쁘지 만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갔고 여전히 데모는 학교 안에서도 일상적이었으나 분위기는 뭔가 서울의 대학가와 달랐다.


용인 산 속에 있던 우리 학교는 시내에서 2km 정도 산길로 올라와야 정문이 나왔다. 스쿨버스 말고는 학교까지 갈 방법이 없어 당구장 버스가 학생들을 터미널에서 학교까지 실어다 주던 때였다. 우린 그 덕에 학교보다 당구장에서 더 시간을 많이 보냈고 학식보다 당구장에서 시켜먹은 자장면을 더 좋아하게 됐다.

학교가 산 속에 있다보니 데모는 대부분 학내에서 그쳤고 교문 앞을 지키는 닭장 차와 가끔 최류탄과 돌팔매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도였다.


난 데모와는 담을 쌓고 학구열에 불탔..을리가 있나. 아침부터 교양수업을 제끼고 술을 마시고 당구를 쳤다. 그래도 전공수업은 꼬박꼬박 들어가고 집중했는데, 따분한 이론 수업이 아닌 실습 위주라 나름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처음 한달이었다.

연필과 홀더, 샤프 등으로 선 굵기를 이리 저리 조정해가며 A1 전지를 가득채우는 선긋기는 마치 도를 닦는 듯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도면을 그리는 도구는 컴퓨터가 아닌 우리의 손이었고 2학년 본격적인 설계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의 손이 익숙한 도구가 되어야 했으므로 무식하게 많이 그려댔다.

아~ 선만 그리다가 끝나는거 아닌가 싶을 때 일이 터졌다.


91년 4월 26일, 서울캠퍼스에서 시위 중이었던 내동기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

학기가 시작된지 2달도 안되서 20살도 안된 꽃같은 청년이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에게 집단 린치로 죽임을 당했다.

학교는 발칵 뒤집어졌고 용인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태운 수십대의 버스가 서울 캠퍼스로 향했다.

이 때부터 학기가 끝날 때까지 우린 길 위에 있었다.


왕복 8차선의 성산로를 차가 아닌 사람이 꽉 메웠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밀어붙이고 밀리며 넓은 도로를 함께 걸었던 경험은 내게 특별했다.

지금이야 촛불 시위 문화가 자리잡아 그게 뭐 그렇게 특별할까 싶지만 엄혹했던 군사정권 하에서는 차 대신 사람이 도로를 따라 걷는 다는 것은 경험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만큼 엄중하고 큰 일이라 특별했던 경험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작은 골목길, 인도나 숲길 정도만 걸을 수 있었던 내게 그 큰길은 도시적 스케일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해준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때의 전율은 짜릿했다.

넓은 도로와 그 길에 늘어선 높은 건물, 인간을 넘어서는 거대한 스케일의 공간 속을 걸으며 난 건축이란 것이 이런 것이겠구나, 이렇게 어마어마한 것을 만드는 것이 건축인거구나 어렴풋이 자각하게 되었다.


학교로 돌아오니 선긋기 훈련은 여전했다. 스펙타클함과 거대한 힘은 선에 없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시시해 보였다. 이런 것들을 배우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인가?

교수님에게 반항의 마음이 일었고 수업은 하찮아 보였다. 학년이 올라가도 달라지지 않아서 기본도 챙기지 않은 상태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흉내냈고 툭하면 교수님들과 부딫쳤다.

작은 것도 모르면서 큰 것만 쫓던 모지리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길 위의 경험은 내가 건축으로 마음을 움직인 동인이 되어 주기도 했지만, 나를 방황하게 했던 포템킨의 거리이기도 했다.


정신 차리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듯 싶다.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서 실무를 하며 깨달았다. 내가 지닌 것이 참 보잘것 없음을. 내 도구의 부족한 쓸모가 내 생각을 제한하고 있음을.

물리적 스케일의 욕망 이전에 내 지식과 정신의 스케일을 키워야 함을 이제는 안다.

그나마 나의 손(건축을 표현하는 도구), 나의 생각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달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요즘 1학년은 아마도 선긋기 같은 수업은 하지 않을 것이다(1학년을 지도해본 적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시절에 맞는 기초적인 학습을 할 터인데, 이 기본적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기를 당부드린다.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미션클리어의 목적이기 보다는 건축을 지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초체력을 다지는 것이고 더 좋은 건축을 하기 위한 좋은 자세를 만드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손의 훈련을 게을리한 탓일까. 난 프리핸드로 그리는 도면이나 스케치를 잘 하지 못한다. 요즘 같이 컴퓨터로 대부분의 작업을 하다보니 그걸 잘 못한다고 건축설계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이 아쉽다.

자기의 생각을 트레이싱지에 스케일도 없이 일필휘지로 그려나가는 건축가를 보면 몹시 부러웠다.

스케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에 대해 낙담하지 않기로 했다. 내 부족한 부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정을 하니 결핍은 열등한 것이기 보다는 좋은 건축을 하기 위한 강력한 동인이 되었다.

내 부족한 건축의 도구를 다른 것에서 찾아 보기로 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를 건축의 도구로 삼기로 했는데, 그것이 '글'이었다.


건축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나는 손으로 그리는 '그림' 이 아닌 '글'을 손의 대신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 글이라는 도구는 내게 아주 유효했다.

'건축은 좋은 장소가 발현되게 하는 것'이라 믿는 내게 글은 적합한 표현 도구이다. '장소'는 '공간'과 다르다.

공간은 사람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있을 수 있지만 장소는 사람이 전제되어야 성립한다.

사람이 있고, 사건을 벌이고, 사람에게 기억될 때 장소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그렇기에 장소에 담긴 이야기, 기억을 포착하는 방법으로 글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림은 사건의 인과 관계, 사람이 느끼는 감정 등을 드러내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글쓰기' 연습을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물론 글을 잘 쓰기 위함이 목적이기 보다는 건축을 더 잘하기 위한 목적이다. 글의 여러 형식 중 요즘 공을 들여 훈련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시'이다.

시는 글의 여러 장르 중 특별한 장면이나 감정을 크로키 하듯 빠르게 포착할 수 있다. 시로 그림을 그리고 건축으로 변환한다. 건축이 완성된 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소를 글로 찾아내 기록하고 다음의 건축에 적용한다. 이것이 내가 찾은 건축의 방식이다.

인류에게 오래 된 문화인 건축과 언어의 협력은 새로운 미래를 맞을 때도 유효하다고 믿는다.

도래하는 AI 시대에 마음껏 상상하고 구현할 수 있는 여지는 글의 행간에서 드러난다고 보기에.


'그림'과 '글'은 건축의 도구이기 전에,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이다.

내 건축학과 1학년은 건축의 기본적 도구 사용법도 배우지 못한 후회를 남겼다. 그리고 더 크게 후회가 되는 것은 '눈'에 현혹되어 '생각'하는 훈련을 게을리 한 것이다.

건축학과 1학년은 건축으로 향하는 길 위에 막 첫 발을 내딘 시기이다. 저 멀리 건축이라는 목표를 바라보고 시작부터 요이땅 달리지 않기를 바란다. 금방 숨이 차게 되고 가는 걸음을 멈출 수도 있다. 천천히 걸으며, 길 위의 나도 돌아보고 길 옆의 작은 꽃과 풀, 나비도 보면서 그 작은 것들이 주는 감동을 오래오래 느껴보길 바란다. 그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지 깊게 생각해보고 길가에 앉아 그림도 그리고 글로도 남겨보길 바란다.


당신(신입생)들은 이미 건축 안에 있으므로 조급할 것 없다. 내 도구의 쓸모를 높이고 건축적 사고를 이어가며 그 길을 즐겁게 걸어가길 바란다.


[z] 2982.jpg








keyword
이전 04화90년대의 건축학과, 작업실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