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모대학에서 2014년부터 설계스튜디오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4학년이었고 스튜디오의 인원은 7~8명 정도로 적은 편이었다. 5년제의 건축대학이었으니 4학년은 군대로 치자면 상병 말호봉인 셈이었다. 5학년이 되면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병장처럼 졸작을 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취업을 준비했다. 학교에서 설계를 배우는 마지막 학년쯤으로 생각하고 슬슬 하산을 준비하는 것이 4학년의 분위기였다.
취업에 대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였을까?
학교에서는 공모전의 일정과 강의 일정을 맞췄다. 적극적으로 공모전 참여를 독려한 셈이었다.
1학기에는 건축대전을 준비했고 2학기에는 문화시설 공모전을 준비했다.
나는 학교의 이런 전략에 동의했다. 이 학교 출신 설계 종사자의 층은 두텁지 않았으며, 학교의 인지도도 높지 않았다. 개인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모전은 역량을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물론 내게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처음 선생 노릇을 하는 마당에 자칫 과정이 아닌 결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닐까 저어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한 때는 밥 먹듯이 공모전을 해치웠고 성과도 있었기에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설계의 주제는 문화시설이었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학생 한 명 한 명의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난 왜? 라는 질문을 던졌다. 역시나 답을 내놓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학생 때의 설계 수업은 사회의 설계 조건(사회에서는 개인이든 관이든 회사든 의뢰인 또는 기획자가 따로 있으며, 설계자는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설계를 진행한다)과 달라서 학생 스스로가 기획자 내지는 의뢰자가 됨과 동시에 설계자가 된다.
왜 이런 건축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합목적적인 타당성을 갖춰야 하며, 학생 스스로가 그 필요성에 대한 근거를 내놓아야 한다.
그것이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문화’는 한 사회의 개인이나 인간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온 물질적, 정신적 과정의 산물이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이 문화이다. (나무위키)
이렇듯 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과거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어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문화이다. 그렇기에 문화를 담는 건축의 범위는 상당히 넓다. 그 넓은 범위에서 특정 시설(이를테면 도서관, 미술관, 전시관 등등)을 설계하겠다고 한다면, 왜 그 시설을 선택(기획) 했는지를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냥 해보고 싶어서요’는 답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시작되는 건축은 없다.
답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안에 있다. 그렇기에 동시대의 사회를 잘 읽어내야 한다.
‘사회’를 ‘독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 배경은 우리의 과거, 역사다.
과거에서 배운 것으로 현재를 진단하고 문제를 도출해야 무엇으로 해결할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치열하게 현재의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이 설계의 시작이다.
공모전의 성패는 이 단계가 중요하다. 지금 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야 좋은 제안의 여지도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무엇(건축물의 용도)을 할지에 대한 방향이 섰다면, 다음은 ‘어떻게’에 대한 고민을 할 차례이다. 이 ‘어떻게’가 건축하는 이들이 흔히 얘기하는 ‘컨셉’이 된다.
건축설계의 과정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주어진(스스로가 부여한) 문제를 창의적인 건축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건축공모전의 목표이기에 방법, 어떻게는 설계의 과정에 있어 핵심이고 뼈대인 셈이다.
컨셉이 단단하고 돋보이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왜?’라는 질문을 통해 도출한 문제가 구체적이어야 한다.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인 진단으로는 선명한 ‘어떻게’가 나올 수 없다.
학생들을 지도하다보면 설계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벽에 부딪치면 스스로가 설정한 전제(문제)를 수정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아주 안 좋은 상황이다.
스스로에게 관대한 이런 자세, 뾰족한 ‘어떻게’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문제’에 자꾸 물을 타게 되면, 결국 맹탕의 설계가 될 뿐이다.
‘어떻게’가 구체적이고 건축적이며, 창의적이라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아름다운 형태나 공간의 제안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목표는 멋진 판넬, 표현, 모형 등에 있지 않음을 장담할 수 있다.
어느 해 1학기에는 건축대전을 준비했다. 7명의 학생들과 함께 다시 학생 때로 돌아간 듯 흥미진진하게 수업을 진행했고 4명이 입상을 했다. 그 중 한 명은 우수상을 수상했다. 내가 지도했던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이 간접적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그 한 명은 우리 사무실의 든든한 팀장이 됐고, 지금은 독립해서 어엿한 건축사사무소 소장님이 되었다.
공모전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응원한다. 수업을 받으랴 공모전을 준비하랴 정신없는 시절을 보내는 것이 건축학과 학생들의 숙명 아닌가 싶다.
이왕 하는 거, 즐기기를 바란다.
노력하는 사람을 이기는 건, 즐기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