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과 땅을 때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잠깐 잠이 든 모양이다. 초대한 적 없는 햇볕이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상을 옆으로 옮기고 햇볕과 상을 마주하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햇볕이 건네는 나른함에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방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나 보다.
방에 있던 햇볕은 돌아가고 어둑서니가 저 구석에 앉아 있다.
일어나 앉아 탁상시계를 본다. 오후 4시, 아직 어둠이 올 때는 아닌데? 마당을 내다보니 마당에 깔린 콩자갈에 물이 튀어 자글자글 끓는다. 소나기다.
안마당으로 나 있는 슬라이딩 창을 스르륵 밀고 툇마루에 나와 앉는다. 비 오는 날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마치 우산 아래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비와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주는 우산처럼 툇마루 위에는 깊은 처마가 있어 팔을 앞으로나란히 쭉 펴야 겨우 손끝에 빗물이 닿는다. 처마를 타고 떨어지는 낙수와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의 엇박자가 좋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드러난 발목 위로 간간이 튀는 빗방울이 비의 맥박 같아서 온 신경을 발목에 집중한다. 어느새 비가 잦아든다. 발목을 세게 때리던 맥도 잡히지 않을 때 즈음 하늘은 다시 밝아지고, 아니 붉어진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나둘 세고 있는데 안채와 별채로 둘러싸인 안마당에 불이 켜진다. 거실에서 홀로 TV를 보던 남편이 출출하다고 보내는 신호다.
별채의 창문을 밀어 닫고 안마당 가운데로 나와 허리운동 삼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직 뿌연 것이 별과 달은 보이지 않는다. 안마당의 모양대로 사각형으로 잘린 하늘이 집을 덮고 있는 이불 같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불이 비단처럼 반짝이겠지.’
안채의 거실 문을 막 여는데, 남편과 딱 맞닥뜨렸다. 아마도 신호를 보내도 기척이 없는 나를 부르러 마당에 나서는 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새를 참지 못하느냐고 타박하며, 주방에서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인다.
배춧잎을 씻고 밀가루를 개어 남편이 좋아하는 배추전을 해야겠다. 남편은 식탁에 앉아 신난 듯 내게 이야기를 건다.
주말에 올 아들과 딸 내외가 이번에는 어디에서 잘까? 큰애가 저번에 다락방에서 잤으니 아마 이번에는 별채에서 잔다고 할지도 몰라. 아니 작은애가 별채에 화장실과 주방이 딸려 있어서 좋다고 했으니 오빠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
주말 아침, 벌써 날이 뜨겁다.
아내는 안방과 이어진 대청마루의 폴딩도어를 모두 열어 놓고 맞은편 창도 활짝 열어 놓았다. 뒷마당에서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들어와 내 몸을 스치고 대청마루를 지나 안마당에서 아지랑이로 피어올랐다.
아침에 맞창이 있는 대청에 앉아 신문을 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은 느긋하게 앉아 신문을 볼 수 없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조금 있으면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부르며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올 것이기에 그전에 얼른 물을 받아 놓아야 한다.
안채와 별채 사이에는 방보다 조금 큰 야외 공간이 있다. 지붕이 있어 햇빛이 바로 들지는 않지만, 안마당과 밖을 잇는 바람길이 되어 여름이면 가장 시원한 장소였다. 손주들은 이곳에서 튜브로 된 간이 수영장에 물을 받고 온종일 물놀이를 했다.
아침에 물을 미리 받아 놓아야 오후에 차갑지 않게 데워질 것이기에 지금 물을 받아놓으려는 것이다.
원래 이 장소는 옆집에 사는 친구 부부와 탁구를 하려고 만든 공간이었다. 그런데 시골에 살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꽃도 심고 나무도 심어야 했고 집에서 먹을 푸성귀도 가꿔야 했다. 아내는 별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나는 천정 높은 거실에 앉아 TV를 보다가 하늘을 보다가 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정작 탁구를 할 시간이 없었다. 옆집 부부와 만나 집 이야기, 텃밭 이야기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탁구대를 놓지 않고 비워두길 잘 했다고 생각하며 튜브에 바람을 넣고 물을 채웠다.
아내가 아침 먹으라며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한 시간은 물을 받아야 하니 얼른 일어나 그 부름에 답을 한다. 집이 작으니 안과 밖에서 부르고 답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
그렇기에 ‘구시렁대는 소리도 조심해야 해.’ 속으로 되뇐다.
밤이 되어도 낮의 열기는 그대로다. 여름에 시원하게 살려고 대청마루에 폴딩도어까지 설치했는데, 한여름에 꽁꽁 문을 닫고 사는 아이러니라니. 한낮에는 에어컨을 켜지 않고는 도저히 못 견디겠으니 어쩔 수 없지만, 밤이 되어도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은 식혀 놓은 공기가 도망가는 것이 아까워서다.
저녁을 먹고 TV로 뉴스를 본다. 에어컨의 서늘함 때문에 윗옷을 걸치고 식탁에 앉아 있던 아내가 나를 졸랐다.
“마당에 나갑시다. 답답하지 않아요?”
나는 시원한 TV 앞이 좋건만 아내가 저렇게까지 하니,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며 “뭐 하려고?” 묻는 듯 아내를 쳐다본다.
“마당에 돗자리 펴고 수박이나 먹읍시다.”
그 말이 돗자리를 깔고 모깃불을 지피라는 지시임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파자마 차림 그대로 마당으로 나선다.
돗자리를 대청마루 앞쪽에 깔고 그 옆에는 화로를 가져다 놓는다. 봄에 따다 말려 놓은 쑥대를 놓고 불을 지피니 허연 연기가 마당에 퍼지다가 하늘로 오른다.
‘참 봉화 같네.’
마당에 돗자리를 펴니, 마당이 아늑해진다. 하늘의 별들만 내려다볼 뿐 누가 볼 사람도 없으니 오롯이 부부의 공간이다. 불이 켜진 밤의 안마당은 독백을 위한 무대 같아서 아내의 조잘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내는 그런 내가 좋은 듯 더 말이 많아지고.
수박을 먹으며 수박씨 뱉기 시합을 하다가, 또 웃다가, 그러다 하늘을 보니 별이 총총하다. 사각의 하늘에는 별도 참 많다. 내친김에 아내와 팔베개를 하고 누워 본격적으로 별을 바라본다.
“집이 참 크네요.”
아내의 말에 내가 화답한다.
“세상을 다 담고 있으니.”
영성이 충만한 밤이다.
오빠에게 별채를 양보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저녁이었다.
오늘 밤은 달빛이 너무 좋았다. 다락과 연결된 베란다에 나와 앉았는데, 지붕 형태가 이어진 얇은 프레임 안으로 달이 들어와 있다.
“저 쇠로 된 얇은 막대를 굳이 왜 걸었대?”
엄마에게 물었더니 밤에 보면 안다고 했던 대답이 이제 이해가 간다.
안마당이 조명을 받아 환했다. 바닥에 깔린 돌이 반짝거려 안마당은 더 밝아 보였다. 그래서일까, 집은 적막하고 어두운 바다에 떠 있는 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다거나 무서운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달콤한 고독의 느낌이었다.
나와 상관없는 도시의 번잡한 밤은 내가 소외된 외로운 밤이었고, 날카로운 소음이 예고 없이 찾아드는 무례한 밤이었는데, 이곳의 밤은 편안하고 안온했다.
문득 안마당이 집을 지키는 파수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을 막 재운 남편이 맥주를 들고 나왔다.
“그렇지. 이렇게 멋진 달을 보며 맥주 한잔하지 않을 수 없지.”
달과 술이 있는 밤, 낭만적인 밤이었다.
나는 거실의 소파가 영 불편하다. 그렇다고 남편이 앉아 있는 소파 밑에 앉기는 싫다. 그래서 남편과 거실에 같이 있을 때 내 자리는 늘 식탁 의자다. 좋아서 앉은 것이 아니라 거실에 앉을 곳이 없었다. 커다란 TV가 소파 반대편에 떡 하니 있으니 거실 바닥에 앉으면 TV를 가리기 때문이다.
나는 바닥에 앉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내 별채에는 앉은뱅이책상만 덩그러니 있다. 방바닥에 앉았다가 졸리면 눕는다. 그러다 잠이 깨면 다시 앉아 책을 읽는다.
내가 별채만큼 좋아하는 곳이 하나 더 있다. 침실과 주방 사이에 있는 대청마루다. 대청마루의 폴딩도어를 열어젖히면 한옥의 마루에 나와 앉은 기분이 든다. 남향이지만 처마가 있어서 햇빛은 딱 폴딩도어가 있는 곳까지만 들어온다. 그래서 덥지 않다. 뒤편의 창을 열면 맞바람이 불어서 시원하다.
별채가 좋은 것은 오롯이 내게 집중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고, 대청마루가 좋은 것은 자연과 대화할 수 있어서다. 대청마루에 앉아 안마당 쪽을 바라보면 거실 TV와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커다란 TV를 보는 것 같다. 그 TV는 아주 느린 속도로 자연의 다큐멘터리를 보여준다.
며칠 전에 대청마루의 쓸모를 하나 더 발견했다. 아랫집 친구가 놀러 왔는데, 영 심심한 김에 마주앉아 화투를 쳤다. 그때 깨달았다.
‘대청마루는 혼자 있는 것보다 이렇게 마주앉아 뭔가를 할 때가 더 좋구나.’
마주앉아 화투를 치든 바둑을 두든 그것에 몰입하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보는 자연은 더 맛이 좋았다.
남편이 좋아하는 대추차를 준비했다.
‘오늘은 남편과 대청마루에 마주앉아 차를 마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