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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 행복한 집짓기의 여정 _ 건축주의 후일담

무위재의 세 번째 여름

by 보통의 건축가

새들의 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코너창이 훤해지면 눈이 떠진다.

마당으로 나간다.

근 두 달 여행하느라 돌보지 않은 꽃밭에 펜스테몬 싹이 엄청 올라왔다. 가기 전에도 뽑고 갔는데 또 이렇게 나오다니 과연 다산의 왕이라 할 만하다. 그보다 급한 게 괭이밥이다. 벌써 씨를 물고 있다. “미안! 땅빈대도 이제 안녕” 하면서 괭이밥과 함께 뽑아낸다. 일주일 만에 정리가 되었다.

아직까지는 70평 정원은 일주일에 10시간 정도면 관리할 수 있겠다. 지난봄 숙근초 새싹이 툭툭 올라오던 신비한 느낌이 되살아나 행복해진다.


마당에서 일할 때는 모르겠더니 허기가 진다.

간단한 아침을 허겁지겁 먹고서 커피를 들고 툇마루에 앉는다. 세상 행복한 순간이다.

우리 툇마루는 중정 안에 있어서 여름에는 온종일 해를 피해 앉을 수 있고, 겨울에는 해를 따라가며 앉을 수도 있다. 이것도 재미있다.

이웃들이 마루를 보며 비 올 때 젖으니까 중정에 투명 지붕을 하라고 하고, 매번 칠을 어떻게 하느냐고 한다. 그러면 나는 겨울에 중정에 눈 내리는 걸 보는 게 얼마나 감동인데, 오일스텐 칠하는 것도 학교 다닐 때 하지 못한 붓질하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데 하며 웃는다. 정말이지 눈 내리는 걸 보다 보면 반대로 눈이 올라가는 것 같고 내 몸도 올라갈 것 같은 때가 있다.

지금은 툇마루가 우리가 주로 발 딛는 자리와 앉는 자리, 빗물 자리에 따라 색이 조금씩 다른데,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나도 궁금하다.


탁구와 수영을 마치고 주말에 대가족이 함께 먹을 장을 보아 왔다. 할머니 밥상 시그니처인 갈비찜 거리와 제철 채소들을 잔뜩 샀다. 좋은 물건, 특히 채소를 보면 한두 가지 더 욕심을 내서 사게 된다. 여주살이 2년 만에 대책 없는 큰손에서는 벗어났다. 예전과 달리 냉장고가 꽉 차 있으면 신경이 쓰이고 할랑할랑 비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다용도실이 좁아 김치 담기가 좀 불편하지만, 거기에 맞는 규모로 하니 오히려 좋은 점도 있다. 다행히 조리대가 넓어서 쭉 늘어놓고 일할 수 있다.


일하다 힘들면 잠깐 중정 전이공간으로 간다. 탁구대는 접어 둔 채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지붕 있는 골목인 이 장소가 외부에서는 가장 애용하는 공간이다. 골바람이 있어 탁구를 하기보다 놀기에 최적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와 앉아 있는 곳이고, 바비큐, 풀장 등 이벤트가 벌어지는 곳이다.

1년 전부터 밥 먹으러 오는 들고양이 ‘하하’ 일당이 제일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다. 작년 여름 새끼 두 마리와 함께 이 공간을 점령하고 우리가 오면 엄청 공격적으로 나와서 일주일 넘게 가드를 쳐서 지켜냈는데, 요즘 다시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다. 엄마 하하는 그동안 세 번의 임신과 출산을 했다. 남은 새끼들과 이웃집 수고양이까지 밤에 이곳에서 놀면, 소리와 털 뭉치가 감당이 안 되어 밥만 주고 있는데, 동물이라도 인연이 참 어렵다.


본채에 있으면 계속 뭘 먹거나 일을 하게 되어, 30분이라도 시간이 되면 별채로 가려고 한다. 별채의 첫째 쓰임을 나의 놀이터, 그중에서 책을 읽는 곳으로 생각했다. 그것만큼 좋은 것이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분이 처질 때는 올드 팝을 듣는다. 듣다 보면 흥이 나서 춤도 춘다. 마당에서 일할 때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일하면 더 즐겁다.


손주들은 별채보다 다락방을 더 좋아한다. 넓기도 하고 애들 부모도 별채에서 건너오려면 불편하니까 다락방을 먼저 선택한다.

별채는 손님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다. 첫해 겨울에는 절대 휴식이 필요한 언니가 보름 동안 쉬다가 갔다. 더 있어야 하는데 내가 힘들까 봐 갔다. 골드미스인 조카도 별채에서 자면 피로가 풀린다고 좋아하는데,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자주 오지 못해 서로 안타까워하고 있다.


저녁 먹으면 다시 마당에 나간다. 집도 마당도 잘 준비를 한다. 저녁 마당 느낌은 또 다르다. 이곳저곳 살피다 보면 달이 떠온다. 북두칠성을 찾아 아이들의 무사 안녕을 빌고 들어온다.

장마가 시작되려나 보다. 내일 아침은 빗소리를 들으며 깨겠구나 하며 자리에 든다. 나는 빗소리가 좋다. 높은 아파트에 살 때는 비가 오는 것 같기는 한데 소리는 들리지 않아서 아쉬웠다. 비로 인한 수고로움을 덮고도 남을 만큼 비 오는 소리를 좋아한다. ‘장마 끝나면 정원에 유박을 듬뿍 줘야지. 툇마루와 외벽에 오일스텐을 칠해야지’ 하면서 잠이 든다.


2022년 7월에 이사했으니 두 번의 봄여름과 가을, 겨울을 살았고 세 번째 여름이다.

설계할 때는 나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하게 한 무위재. 설계부터 시공, 그 후로도 엄청 큰 사랑을 받은 집. 설계도를 보며 세상에 없는 집처럼 좋아했고, 들어와 살면서는 방송국의 출연 요청을 사양하고 집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배우게 한 집. 그렇게도 거세던 나의 여행 욕구를 사라지게 한 집. 시골에 와서도 바쁘게 사느라 집을 자주 비우는 걸 본 이웃이 집 잘 지어 놓고 왜 밖에서 사느냐고 지청구를 듣게 하는 나의 집.

멋지면서도 편안하고, 집안 어디서나 꽃과 나무가 보이고, 툭 걸터앉아 쉴 데가 많은, 작으면서도 큰 집. 새소리, 빗소리, 바람결, 햇볕과 빛에 따라 변하는 산과 들의 색깔과 모습, 꽃밭의 귀요미들, 정원에 초대하지 않은 아이들을 살살 뽑는 느낌. 이 모든 것이 타인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진실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라고 한다.

무위재에서 나는 그렇게 살려고 한다.



web_DSC8821.jpg 무위재의 밤



오래 기다렸던 두 번째 책 '장소의 발견' 이 3월 17일 세상에 나옵니다.


책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가족과 늘 함께하는 것이 ‘집’이다.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길 기대한다면, 집에서의 생활이 행복하여야 함은 당연하다. 이 당연한 것을 건축가의 입장에서 환기하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저자는 나이 들고 뒤늦게 집에 사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그 즐거움을 저자가 설계한 집에 사는 가족도 누리길 바라며 고심하고 애썼던 집짓기의 과정을 얘기한다. 집에 사는 즐거움은 가족이 저마다 특별한 기억과 의미를 가지는 ‘장소’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저자와 함께 보물찾기하듯 ‘장소를 발견’하는 재미를 이 책에서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

구매로 응원 부탁드립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6037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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