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말
구로동 주상복합 건물 15층. 거실 밖은 틔어있었고, 매일 노을 지는 하늘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남편이 결혼 전 마련해 둔 그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20평대의 작은 집이었지만 우리 둘이 살기에는 충분했고, 대출금 없이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러다 아이가 생겼고, 아이의 짐이 하나둘 늘어나다 보니 내가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드는 것이 불만으로 쌓여갔다.
“나도 30평대 살고 싶다.”
그냥 말했다. 당장 이사 가겠다는 마음이 있던 것이 아니라, 공간이 좀 더 넓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이었다.
남편은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 신경 쓰였는지 주말마다 부동산에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구경’하는 건가 싶었다. 아니었다. 남편은 괜찮은 집이 있다면 정말 옮길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맞벌이 부부였던 우리가 아이를 편히 맡길 수 있는 친정 근처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로 바라는 바가 달랐다. 내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집은 남편이 썩 내키지 않아 했다. 여러 채의 집을 둘러봤지만, 남편 마음에 드는 집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당분간은 이 집에 만족하며 살자고 했다. 집 주변에 지하철역, 대형마트, 도서관, 소공원. 충분히 가치 있는 집이었다.
주말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꿀꿀이와 쉬고 있었다.
“나 잠깐 집 좀 보고 올게.”
뜬금없이 나가려는 남편을 바라보는 내 눈은 휘둥그레 해졌다.
“갑자기? 어디?”
“여기 옆에 신축 아파트가 있다고 해서 잠깐 보고만 오려고. 구경만 하고 올 거야.”
날 좋은 주말, 콧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자 하려 했는데 아무 말 할 수 없게 하는 남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같이 따라나섰다. 그렇게 집을 보러 갔다. 1,700세대 신축 아파트.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어? 아래층이 어린이집인가 봐.”
“이 집으로 하자. 저희 이 집 계약할게요.”
난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아무 생각 없었다. 그냥 아이 손을 잡고 남편과 부동산 사장님 뒤를 따라 걸었다. 바로 가계약금을 이체했고, 집주인과 일정 조율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집 계약이 쉬운 줄 몰랐네? 우리 집 안 팔리면 어쩌려고….”
“30평대 가고 싶다며. 원래 마음에 드는 집이 나타나면 바로 계약하는 거야. 1층이 어린이집 아니었으면 안 했어.”
우리는 20평대 집을 매매하고 30평대 아파트 세입자가 되었다.
이 일은 부동산값 폭등이 시작되는 그때, 2017년 하반기에 일어난 일이다. ‘신혼부부특공’을 노리기 위한 계획이었다고 핑계를 대어보지만 대실패였다. 큰 폭으로 오르는 집값으로 매매는커녕 30평형 전세도 감당하기 어려운 가격이 되었다. 집은 함부로 파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지인들은 그때 집 마련을 했고, 우리는 있는 집을 파는 실수를 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부동산 이야기로 시작해서 언제까지 이 흐름이 이어질지에 대한 논쟁으로 마무리되었다. 난 바랐다. 이제 멈추기를. 집 매매한 친구는 바랐다. 이것이 시작이기를.
진아가 말했다.
“그래도 꿀꿀이 큰 집에 사니까 좋아하지? 애들도 큰 집 좋아해. 시댁에 말해. 1억만 달라고. 전세 보증금에 시어머니가 1억 보태주시고, 차액은 대출 더 받으면 되겠네.”
말은 참 쉽다.
“1억 받아도 살 수 없는 가격인데?”
웃으며 답했지만 속은 쓰렸다. 설령 1억을 주신다고 하셔도 10억이 넘는 이 집은 내 집이 될 수 없었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로또 당첨을 바라거나, 부동산 폭락 장이 보이기를 바라는 거. 그거뿐이었다.
30평대 전세살이 4년을 마치고, 옮겨야 하는 그때, 영혼까지 끌어모아 다시 집을 사겠다며 주말마다 동네 부동산을 들쑤시고 다녔다. 신축단지로 형성된 이 동네에서는 아무리 뒤져봐도 없다. 조금 멀리 구축 아파트로 반경을 넓혔다.
“거기 살다가 이 집에는 살기 어려울 텐데.”
“괜찮아요. 전 살 수 있어요!”라고 답했지만, 숨이 턱 막혔다. 그래도 어쩌겠나. 현재 나의 위치가 여기인 것을.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었고 남편에게 공유했다. 남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야! 나도 깨끗한 집에 살고 싶어. 누군 벽지가 누렇게 뜨고, 화장실에는 찌든 때 가득한 이 집에 살고 싶어 보고 온 줄 알아? 우리가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집이 이런 집이야. 그러면 네가 돈을 많이 벌어오든가. 너 엄마한테 좀 받아 오든가. 진아가 그러더라. 시어머니한테 돈 달라고 하라고. 아, 짜증 나! 네가 그때 갑자기 계약만 안 했어도 이 개고생은 안 하는데.’
이불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워 속으로 욕했다.
사실, 남편 탓만은 아니었다. 좀 더 넓은 집에서 쾌적하게 살고 싶기도 했고, 그 마음을 남편이 알아서 채워줬을 뿐이었다. 전세살이 몇 년 하다가 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때쯤 우리와 인연이 있는 집을 구해서 정착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 예상과는 다른 길로 걸어가고 있지만 누굴 원망하거나 슬퍼한다고 원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 평수는 줄었지만 깨끗한 집을 구해 살고 있다. 불편함 없이 잘살고 있다. 그거면 됐다.
그런데 내 딸은 아니었나 보다. 어느 날 뜬금없이 물었다.
“엄마, 근데 내 친구들은 이사를 안 하는데 우리는 왜 하는 거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그래도 답해야 했다.
“우리는 이 집을 잠시 빌려서 살고 있는 거거든. 그래서 집주인이 더 이상 빌려주기 어렵거나, 우리가 다른 집으로 옮기고 싶을 때 이사하는 거야.”
“그러면 지훈이는 아빠가 집을 산 거야?”
“응, 그런 거야.”
“우리도 집을 사면 되잖아. 난 이사 다니기 싫어.”
“꿀꿀이는 이사 다니기 싫구나.”
“응, 이 집 좋아. 이 동네서 살 거야. 나 중학교도 여기서 다닐 수 있어?”
“아마도? 엄마도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는데 우리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해 보자.”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를 꽉 안아주었다.
갑자기 떠올랐다. 진아가 말했던 1억. 미친 척하고 “저 집 사야 하니까 어머님이 보태주시면 좋겠어요.” 요구했다면 주셨을까. 주셔서 집을 샀다면 편했을까. 그랬다면 우리 아이는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글쎄…. 절대 그럴 리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