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
아빠를 바라보면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그와 나는 많이 닮았다. 엄마의 유전자와 아빠의 유전자를 적절히 섞어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성별을 제외한 외모, 성격, 체형 모두 비슷하다. 심지어 혈액형도 똑같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빠도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 엄마는 늘 말했다.
“너희 아빠랑 어쩜 그렇게 닮았니?”
닮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엄마의 그 말에 짜증 섞인 말투로 답했다.
“내가 그 말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나?”
아빠를 닮았다는 그 말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기에 그랬다.
엄마는 성격이 급하고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틀리면 틀리다. 맞으면 맞다. 본인이 느끼는 감정과 주관적인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감정 상태를 금방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익숙하고 본인의 생각이 늘 옳다고 말한다. 엄마의 의견에 반대되는 말 한마디 던지면 끝없는 연설을 들어야 했다.
나는 말도 행동도 느린 사람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생각이 많다. 낯가림도 심해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대방이 무심코 던진 말도 속으로 되뇌고 곱씹는다. 말 한마디를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는 뇌가 충분히 움직일 시간이 필요하다. ‘이 말을 해도 되나. 말아야 하나.’ 생각만 하다가 말할 타이밍을 놓치기도 한다. 우리 아빠도 그렇다.
엄마는 이런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늘 답답하다 했고 다그쳤다.
“말 좀 해봐. 말 좀!”
엄마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하면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치 조개가 위협을 느끼면 입을 닫고 숨는 것처럼. 엄마는 그렇게 태어난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그게 나인 것을 모르는 엄마가 미웠다. 엄마로부터 천천히 도망쳤다.
어느 날 엄마가 물었다.
“근데 너 아기였을 때 그때는 종일 쫑알대던 아이였는데…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있었던 일에 대해 다 말해주고 그랬는데… 지금은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새로운 사실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궁금했다. 그때의 나를 떠올려 보려고 앨범을 뒤적거려 보지만 사진 속 모든 상황이 낯설었다. 그저 내가 엄마에게 쉬지 않고 이야기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이 언제나 어려웠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심장이 두근거려서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발표해 볼 사람?” 물으면 눈을 피했고, ‘제발 제 이름을 부르지 말아 주세요.’ 간절히 빌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아직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다.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가 덜 되어 말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꼬마였을 때 엄마에게 시시콜콜 많은 이야기를 했다니 믿기지는 않지만 그랬다면 아마 어린아이의 엄마에 대한 강한 믿음 때문 아니었을까.
그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라졌다.
“엘라는 잘하는 것이 많네.”
무엇이든 똑 부러지게 하는 동생과 늘 비교당했다. 부러웠다. 우유부단한 나와는 달리 사리 분별력이 좋고 자기 의사 표현이 정확한 아이였다. 비교되는 삶을 살다 보니 가물에 콩 나듯 해주는 칭찬이 달갑지 않았다. 좋을 법도 한데 싫었다. 어쩔 수 없는 칭찬 같았다.
언제부턴가 엄마가 다정다감하게 묻는 말에 무뚝뚝하고 짜증 섞인 말투로 짧고 굵게 답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한발 다가오려 하면 나는 두 발 물러섰다. 엄마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달라는 엄마를 향한 고요한 외침이었다.
사실 나도 친구들처럼 손들고 발표하고 싶었다. 장기 자랑 시간에는 춤이든 노래든 뭐든 해보고 싶었다. 새로운 반에 들어서면 내가 먼저 크게 외치고 싶었다.
“안녕? 내 이름은 아란이야. 우리 친구 할래?”
그럴 용기가 없었다. 자신이 없었다. 늘 누가 먼저 다가와 주길 기다렸다. 나도 그런 내가 바보 같고 싫었다. 변하고 싶었다.
내 생각을 남들에게 또박또박 전달하고 싶은 마음만큼 나의 입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도 시도는 해보려 했다. 말하기 어려우면 편지를 썼고, 발표해 보고 싶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손을 살짝 들어 올려봤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연습을 아주 천천히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타고난 기질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남들은 애쓰지 않아도 되는 그 일을 난 의식적으로 해야 하다 보니 금방 지쳤다.
작은 목소리로 발표하면 옆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내가 전한 말에 “그건 아니지!”하고 반박하면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없었다. 한없이 작아졌다. 작은 실수에도 ‘역시 나는 별로야.’라고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며 내가 나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나에게는 ‘자신감’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나에게 좋은 점은 없었을까. 있다. 분명히 있다. 내가 말수가 적다 보니 남의 말은 잘 들어준다. 마음의 상처가 되는 말이 상대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알고 있기에 상대를 먼저 생각하려 한다. 남을 배려하고 생각해야 그 또한 나를 배려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렇게 살아왔다. 덕분에 “너는 착해”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싫지도 좋지도 않은 그 말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에게 “잘했어”라고 칭찬하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나를 믿지 못했고 의심하면서 ‘나 잘살고 있는 거야? 이대로 괜찮은 거야?’라고 끝없이 물었다. 딱히 시원한 답을 얻을 수 없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어쩌면 나를 답답해하며 끊임없이 던지는 엄마의 그 한마디가 싫었던 이유가 나도 그런 나를 싫어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때? 이게 나야!” 이 말을 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서. 내가 나를 부정하고 싶어서.
“엄마, 나 이제부터 이런 나의 모습도 그대로 받아주려고. 엄마도 이런 딸 이해하고 따뜻하게 안아줄 수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