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진실된 친구가 있는가?
'진실된'이라는 말의 반경과 심도는 어디까지인가?
대학 3학년 때, 그 당시 같은 동아리에 있던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겪어보니까 말이야, 정말 진실된 친구는 기쁜 일에 같이 기뻐하는 친구인 것 같아. 슬픈 일보다는 기쁜 일에 함께 해줄 수 있는 게 진짜 친구 같아."
그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왜? 왜지? 같이 기뻐하는 게 뭐 그리 어렵지?
그때 그렇게 말한 선배는, 그래봐야 나보다 세 살 많았다.
무얼 그리 겪었을 나이가 아니고, 풍족한 집안에서 평탄한 삶을 사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나이가 어려도 경험이 일천해도 인생의 본질적인 것을 깨닫는가 보다.
그때 나에게 그 말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의아했기 때문이지 동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니, 문득문득 그 말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공부를 마치고 30대 초반 친해졌던 친구, 녹록치 않은 초짜 사회생활을 함께하며 몇 년 간 서로 많이 의지했던 - 그렇다고 생각했던 - 친구가 있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 이 친구도 정말 열심히 사는데, 소식을 전하며 혹시 속상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안 한 것이 아니다. 조심스레 알렸고, 뭔가 서늘한 축하를 받았다. 그 후, 오랜만에 그저 안부를 물으려 보낸 문자에 생각지 못한 답이 왔다.
"축하할 일이지만, 축하만 할 수가 없구나. 네 연락을 받는 거 자체가 힘이 드니, 이런 안부 문자는 안 하면 좋겠다."
너무 명쾌해서, 내가 무슨 해석의 오해를 했나 따위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알겠다, 그러겠다 라고 담담히 답했다.
우리 모두 삶이 불안하고 고단한 사회 초년이었다. 어느정도는 이해한다. 그래서 조심했다.
다만 안부를 묻지 말라는 단호한 그 문자로 이 관계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을 뿐이다.
기뻐만 해 줄 수 없는 마음은 서운하더라도 이해해 볼 수 있으나, 그것을 뛰어넘어 인사도 나누고 싶지 않다 직접 표현하는 마음까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친구가 아니었구나. 나 혼자 이 관계를 오해했구나.
그 후로도 가끔 오는 그의 문자. 가끔 마주치는 그.
무엇을 물으면 아는 한도에서 답을 했고, 부탁을 받으면 크게 애쓰지 않아도 되는 한도에서 도왔다. 만나면 농담도, 식사도, 대화도 했지만,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되고, 무례하지 않게 대하면 되는 지인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지만, 나보다 훨씬 먼저 미국에 와서 살고 있는 친구가 있다. 함께 한국에서 그 아이와 지냈던 시간은 생각해 보면 겨우 7년 남짓이다.
내가 나의 재능과 능력에 대해 의심하고 방황하던 어린 시절, 그 애는 힘차게 전진했다. 그가 승전보를 전할 때마다 나는 꼭 그걸 내가 해낸 것처럼 기뻐했었다. 자랑스러운 내 친구. 그런 마음이었다. 그 아이 또한, 내가 겪는 좌절을 다 알고 있어도, 자기가 이루고 있는 성취를 숨긴 적이 없다. 언제나 같이 기뻐했다. 둘 다 철없어서 그랬던 게 아니다. 어려서 그게 진심인지도 몰랐지만, 서로에 대한 진심이 있어 그랬다.
나도, 그 아이가 겪은 인생의 험곡을 그 아이가 공유해 준 만큼 알고 있다. 그 빛나던 재능을 잠시 접고 선택한 다른 경로에서, 모든 것을 최대한으로 일구어 이루어내며 살고 있는 존경스러운 내 친구.
같이 시작한 경로를 접어가면서도, 내가 가고 있는 모든 길을 아낌없이 응원하고 격려하던 아이. 그의 축하나 격려를 받을 때마다, 그것이 본인의 아픔을 밀어 두고라도 할 수 있는 진심이라는 것을 너무나 알고 있어서 때마다 찡했다.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범주의 관계라 해도, 모든 친구가 이럴 수는 없다. 그러나 한쪽의 성취나 기쁨이 다른 한쪽의 상실이나 슬픔을 확대하기만 한다면, 그 관계를 친구라고 부르긴 어렵겠다. 그것은 이미 서로의 삶에 그리 큰 자리를 차지할 필요는 없는 관계다. 친구가 아닌 지인. 그저 사회생활의 일부인 그와의 연을 너무 모나지 않게 잘, 친절하게 잘, 이성과 합리에 의해 잘, 건사하면 된다.
안부문자를 거절당했을 때, 대학시절 '기쁜 일에 같이 기뻐하는 것이 슬픈 일에 같이 슬퍼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라던 선배의 그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지나면 이 일을 좀 더 다르게 볼 수 있으려나 궁금했던 마음도 희미하게 기억난다. 십수 년이라는 충분한 세월이 흐른 지금, 잊었던 그 일을 다시 떠올림에, 그다지 나의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본다. 다만, 그에게도 상대의 기쁨을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진짜 친구는 있었겠지 라는 생각은 한다. 그게 내가 아니었다는 것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가끔 나에게 묻는다.
나에게는 진실된 친구가 있는가?
다시 말해보자면, 서로의 기쁜 일에 순수하게 같이 기뻐해 줄 수 있는 진실된 친구가 있는가?
눈치 보지 않고 나의 기쁨을 전하고, 나의 심난한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의 기쁨을 같이 나눌 친구가 있는가?
많지 않다. 그러나 없지 않다.
그럼 그걸로 충분하다 말해도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