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명은 뭔가 기분이 석연치 않았다. 아무리 크라이슨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다 바쳐 충성을 맹세한 존재라 믿고 있었지만, 그의 최근 행적은 묘하게 달라 보였다.
첫째,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던 방문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제국과의 동맹을 맺고 오라는 명령을 내린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세부 행적에 대한 보고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셋째, 크라이슨에 대해 생각하기만 하면 내면 깊숙이 짜증과 불안이 동시에 솟구쳤다.
은명은 육왕성 내에 위치한 별관에 머물고 있었다. 별관은 웅장한 석조 건축물로, 육왕성의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에는 강과 숲이 요새처럼 성을 감싸며 자연적인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낮은 구름 사이로 붉은 석양빛이 퍼지며 성벽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별관 내부는 차갑고 묵직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금빛 장식품들은 흐릿한 촛불 아래에서 섬뜩한 반짝임을 뽐내고 있었다.
"음... 아무래도 이놈이 딴생각을 품은 모양이군." 은명은 드래곤 특유의 무겁고 깊은 숨소리를 내쉬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아니, 이것 또한 예정된 일이지."
육왕성의 실질적인 성주는 크라이슨이었다. 은명은 명목상의 주군으로 자리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권력과 통치권은 크라이슨이 쥐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조차 은명이 허락한 일이었다. 그는 크라이슨에게 힘을 부여했고,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지 관찰하며 자신만의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다.
왕국의 몰락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 그것은 은명이 건과의 약속으로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크라이슨의 배신조차도 그 거대한 계획의 일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라이슨의 행동은 은명에게 작은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감히 내 계획에 의문을 던지다니... 그래, 이게 얼마나 큰 실수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은명은 통신기 역할을 하는 반투명한 구체를 손에 들었다. 구체는 은은한 빛을 내며 은명의 마력을 흡수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크라이슨, 당장 내 방으로 와라."
겉모습은 어린아이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드래곤 특유의 위엄 있는 낮은 톤이었다. 방 안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마치 천둥 같았고, 벽에 걸린 금속 문양이 떨리며 은은한 울림을 더했다.
"주군... 지금 주군의 명령을 이행 중입니다. 당장은 어렵지만, 오후에 찾아뵙겠습니다."
"헛소리 말고, 지금 당장 와." 은명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구체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응답했다.
"...알겠습니다."
은명은 크라이슨을 부르기로 했다. 그의 내면에서는 묘한 충동이 솟아올랐다. 손놓고 먼저 당할 수는 없다는 결단이었다.
잠시 후, 성 밖에서 크라이슨이 등장할 때 강렬한 석양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며, 크라이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갑옷을 입은 육중한 부하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들은 각자의 무기를 손에 쥔 채 경계의 눈빛으로 은명을 응시하고 있었다. 갑옷의 금속판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네놈이 뒤에 데리고 온 것들은 무엇이냐, 크라이슨? 내가 한낱 인간 병사들 따위에 위협이라도 느낄 거라 생각했나?" 은명은 천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깔렸지만 그 속에 깃든 경멸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크라이슨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은명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당신의 시대를 끝낼 도구입니다. 당신의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은명은 그의 말을 비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끝났다고? 너희들 따위가 결정할 일인가? 내가 준 힘으로 내가 쌓아올린 이 왕국에서 내쫓겠다고? 네놈은 그저 힘의 맛을 봤을 뿐이야. 그 힘이 네 것이라 착각한 순간, 네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크라이슨은 목소리를 낮추고 은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주군, 힘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단순히 누군가의 손에서 베풀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영원히 당신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어야만 합니까?"
은명은 그의 말에 미소를 거두고 진지하게 응답했다. "힘은 본래 주어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그 가치를 결정한다. 하지만 네놈들은 그 단순한 진리를 배반으로 갚았다. 네 손에 든 칼은 나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며, 네가 딛고 선 땅 또한 내가 마련한 것이다."
크라이슨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그러나 주군, 당신이 준 힘이 우리를 구속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손길에서 벗어나 우리의 길을 걷고자 할 뿐입니다."
은명은 고개를 젓고 조용히 말했다. "자유를 원한다며 배반을 선택한 네놈들의 길이 결국 어디로 이어질지 아는가? 그것은 파멸이다. 나는 너희를 위해 왕국을 만들었고, 너희를 위해 그 길을 열었다. 그러나 네놈들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며 나를 배신했다."
크라이슨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당신이 말하는 파멸은 우리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책임 또한 우리가 지겠습니다! 당신의 길은 더 이상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
은명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방 안을 휘감았다. "그렇다면 네놈들이 선택한 길의 끝을 직접 보게 해주마. 자유란 이름 아래 네놈들이 만든 비참한 종말을."
방 안의 공기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갔다. 은명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반지는 오랜 세월 동안 그의 힘을 봉인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이것이 내 마지막 유희다. 네놈들이 무엇을 만들어낼지 직접 보아주마."
은명은 힘을 주어 반지를 부쉈다. 순간 강렬한 빛이 방 안을 채우며 모든 것을 휩쓸었다. 그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진동했고, 은명은 한 마디를 던졌다. "네놈들이 원한 자유의 무게를 견딜 준비는 되어 있는가?"
빛이 사라졌을 때, 방 안에는 끝없는 침묵과 싸늘한 기운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