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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건의검 13화

은명과의 전투 1

by 대건

크라이슨은 은명의 집무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희미한 불빛이 가구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검은 망토가 그의 어깨에서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차가운 눈빛이 방 안을 매섭게 훑었다. 방 안은 깔끔했지만,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크라이슨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없애버려라." 크라이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이 방법 뿐이겠지. 네놈도 잘 알겠지, 은명? 어차피 네 시대는 끝났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명령이 공기 중을 가르며 퍼졌다. 단 하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손잡이를 움켜쥐고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그의 망토를 살짝 뒤흔들었다. 그는 방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한 번 은명을 돌아보았다.


"즐길 여유는 없을 것이다."


그 말과 함께 그는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림자처럼 복도를 가로질러 걸음을 옮기며, 그의 검은 망토는 흔들리는 불빛 속에서 번쩍였다.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육왕성의 최정예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갑옷에 새겨진 룬이 희미하게 빛나며 마법으로 강화된 무기들이 일제히 은명을 향했다. 중압감이 방을 가득 메웠다. 한 병사가 전진하며 외쳤다.


"우리는 주군의 명령을 받들어, 너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나 은명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검붉은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겨우 이정도 병력으로 나를 쓰러뜨린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그는 갑옷조차 걸치지 않은 채였다. 느긋한 태도, 하지만 그 눈빛 속엔 짙은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손끝이 천천히 올라갔다. 금빛 마나가 손끝에서 피어나더니 방 안을 가득 채우며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방을 뒤흔들었다. 병사들은 비명조차 지를 틈 없이 공중으로 내던져졌고, 충격파에 휩쓸린 갑옷이 무너지는 돌덩이처럼 부서졌다. 벽이 갈라지고 천장이 금이 갔다. 붉은 피가 허공에서 뿌려졌다.


그러나, 그것이 함정이었다.


"지금이야...!"


무너진 병사들의 갑옷 속에서 검붉은 마법의 빛이 번쩍였다.


'이건...!' 은명이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단순한 폭발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설계된 제물의 마법. 쓰러진 병사들의 생명력과 연결된 이 술식은 강렬한 충격을 받은 순간 활성화되도록 짜여 있었다. 마치 먹이를 기다리던 함정이 덫을 치듯, 검붉은 마력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콰아아아앙!


피와 마력의 폭풍이 방을 삼키며 은명을 덮쳤다. 창문이 산산조각 나며 불꽃과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은명은 순간적으로 방어막을 펼쳤으나, 마력이 강하게 얽혀들며 신체를 감쌌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예상치 못한 방식이었다. 그의 피부 위로 뜨거운 불꽃이 스며들었고, 그을린 상처가 생겨났다. 그리고, 폭발의 충격으로 성벽 밖으로 내던져졌다.


은명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한순간의 정적, 귓가엔 폭발의 여운만이 남았다. 마나를 조절해 착지하려 했지만,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그의 몸을 붙잡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바닥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붉은 빛이 퍼지며 그의 몸을 옥죄었다.


'혈쇄결(血鎖結).'


순간, 거대한 쇠사슬이 허공에서 튀어나와 그의 팔다리를 단단히 휘감았다. 붉은 마력의 사슬들이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그의 몸을 질식시키듯 조여왔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원형 마법진은 성벽 전체를 덮을 만큼 거대했고, 중심부에서 강렬한 힘이 요동쳤다.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흔들렸다. 온몸이 묶여 무릎을 꿇었고, 마나의 흐름이 강제로 차단되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은명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근육이 저항하려 몸부림쳤지만, 쇠사슬은 더욱 강하게 조여왔다. 마치 거대한 맹수가 사냥감을 짓누르는 것처럼, 그의 몸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성벽 위, 크라이슨이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검은 망토가 바람에 휘날리며 그의 얼굴을 가렸다가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차가운 미소.


"혈쇄결을 네놈들이 구현해냈다고...?" 은명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오랜 세월을 들여도 실패만 했던 마법을? 흥... 네놈들이 감히 이걸 완성했다고 믿으라고? 정말 우습군." 은명이 중얼거리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눈빛 속에는 서서히 분노가 스며들었다.


은명은 몸부림치며 이를 악물었다. "이 건방진 놈들이...!" 그의 팔과 다리를 옭아맨 사슬이 더욱 강하게 조여오자 근육이 비틀렸다. 숨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폭발할 듯 뛰었다. 마나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혈쇄결이 마력을 질식시키듯 억눌렀다. 바닥의 문양은 그의 몸을 중심으로 더욱 짙어지며, 어둠 속에서 피처럼 붉은 빛을 내뿜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쇠사슬이 삐걱거리며 팽팽해졌지만, 은명은 이를 무시했다. "그렇게 기어코 날 가두려 했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쉽게 끝나는 놈이 아니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눈동자가 타올랐다. 전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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