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명은 혈쇄결 마법진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금빛 마나가 그의 몸을 감싸며 번개처럼 튀어 올랐다. 혈쇄결의 압박감이 피부를 찌르는 듯했지만, 그는 여전히 서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다섯 명의 오신(五神)은 저마다 각기 다른 특유의 기운을 내뿜으며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전에 예고된 것이 바로 이것이었군.'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해 온 싸움이 마침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성채를 둘러싼 황량한 대지는 폭발의 여파로 여기저기 갈라져 있었고, 붉은 하늘은 마치 불길한 종말을 암시하듯 잔뜩 물들어 있었다. 혈쇄결의 마법진이 형형하게 빛나며 오신들에게 힘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혈쇄결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은 아르토르였다. 그의 손에 들린 대검은 전보다 더 무겁게 빛났다. 검날에서는 검붉은 에너지가 맴돌며 불길한 기운을 뿜어냈다.
“은명, 인정하지. 네놈은 강하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강자도 결국 끝이 있다는 걸 보여주마.”
아르토르의 뒤에서는 비오네가 은명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두 손을 위로 뻗었다. 그녀의 주변에서 파란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점차 거대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 형상은 은명의 움직임을 더욱 억제하기 위해 설계된 또 하나의 속박 마법이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드래곤이라면 더 이상 공포의 상징이 아니다," 비오네가 차갑게 말했다. "네 힘은 이미 이 혈쇄결 속에서 반쯤 봉인되었다. 이제 우리는 너를 단죄할 뿐."
은명은 그녀의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단죄? 그것도 나를 상대로? 어리석구나.”
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그의 몸에서 방출되는 마나가 혈쇄결의 억제력을 밀어내며 주변 공기를 일순간 뒤흔들었다.
그 순간, 혈쇄결의 외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큼 입만 살았다니 재미있군. 한 번 날려버려도 후회는 없겠지?”
검은 로브를 두른 한 남자가 혈쇄결 너머에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는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지팡이 끝에서는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오신 중 한 명, 크라이센의 최측근 레이트론이었다.
레이트론이 손을 뻗자, 혈쇄결 내부에서 검은 마법진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마법진은 은명의 발밑에서 빠르게 회전하며, 그의 움직임을 더더욱 억누르려 했다.
“이 마법진은 너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거다, 은명. 네 힘을 단순히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네 본질을 완전히 부정하는 마법이다.”
은명은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마법진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 본질을 부정한다고? 어쩌면 흥미로운 시도군. 하지만, 레이트론… 네놈들의 준비가 아무리 치밀해도…”
그는 주먹을 쥐며 금빛 마나를 강하게 끌어올렸다. 그의 주변 공기가 흔들리고, 혈쇄결 자체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건 네놈들 기준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콰쾅!
은명이 발을 내딛자, 혈쇄결 안의 마법진 일부가 부서졌다. 그의 마나는 폭발적으로 방출되며 혈쇄결의 장력을 거칠게 밀어냈다. 오신 중 일부는 뒤로 물러났고, 레이트론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 이 혈쇄결은 완벽했을 텐데…”
은명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금빛 마나가 그의 손끝에서 소용돌이치며 방 전체를 뒤덮을 듯 퍼졌다.
“완벽한 속박? 너희의 한계를 내가 알려주마.”
그 순간, 은명은 마나를 집중시켜 방출하려는 찰나였다. 그러나 오신 중 가장 뒤편에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은명은 즉각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은명.”
작고 날렵한 체구의 여성이 혈쇄결의 모서리에서 날아오르듯 움직였다. 그녀는 단검을 쥔 채 은명의 허점을 찌르기 위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오신 중에서도 최고의 암살자, 이카르타였다.
은명은 그녀의 접근을 감지하고 몸을 틀었지만, 이미 마법의 속박 때문에 반응 속도가 늦었다. 단검이 그의 어깨를 스치며 날아들었다.
"큭…!"
강력한 마법 단검이었고, 은명의 몸을 스치며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은명은 통증을 느꼈지만, 곧 이를 악물고 비웃었다.
“고작 단검 한 자루로 나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나 이카르타는 웃지 않았다. 그녀의 단검에서 퍼져나온 검붉은 마나가 은명의 몸을 타고 흘렀다. 단순한 물리 공격이 아닌, 그의 생명력을 흡수하며 마법진과 연결되도록 설계된 독이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은명. 서서히 네 힘을 갉아먹으며 무릎 꿇게 만들겠어.”
은명은 이를 악물며 마나를 더 강하게 끌어올렸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은 이카르타의 독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혈쇄결이 점점 약해지며 주변 공기가 균열을 일으켰다.
“좋다… 한 번 네놈들의 전력을 모두 확인해 보자. 과연 오신의 실력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은명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마나는 혈쇄결과 맞서며 점차 공간을 흔들고 있었다.